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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태복음 07:01-06/ 비판하지 말라 [수요]
  • 조회 수: 734, 2013.11.19 19:43:50
  • 이 시간 “비판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한 10여년 전에 사랑의 교회 안성 수양관에서 제자훈련 지도자 과정 훈련을 받았는데 한 번은 소그룹 훈련 실습차 사랑의 교회의 한 다락방모임을 인도하러 갔습니다. 모든 훈련받는 목사님들이 다 그렇게 실습을 해요. 그 때 다락방 모임의 성경공부 내용이 오늘 본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내용이죠. 제가 첫 말을 이렇게 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이 주제에 제일 민감한 분들이 기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랬더니 거기에 모인 모든 부인들이 막 웃는 겁니다. 눈이 동그래서 쳐다보니 순장이라는 분이 자기 다락방 멤버들이 전부 기자 부인들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비판과 언론의 기능에 대해서 서로 나눈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 언론이 발달되어 있는데 언론의 목적이 사회적 감시와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비판의 기능입니다. 언론이 비판의 기능을 상실한다면 그 언론은 진정한 언론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언론에 종사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할까요? 

      2년 전에 MBC pd수첩 고발로 우리나라에 엄청난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우병 파동은 일단락되었지만 이로 인해 정부나 또 축산행정...등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이 혼이 좀 났죠. 후에 이들이 법정에 방송사를 고발하여 세웠는데 한 1년간 법정에서 언론의 사회적 역할과 개인의 피해...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 PD수첩 프로그램이 국가에 대한 사랑과 미래의 발전을 위한 비판이라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겠지만 만약 증오심의 발로며, 단순히 정부를 뒤흔들 의도에서였다면 지탄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비록 언론사라고 해서 무한한 비판의 자유와 권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비판은 사랑이 없는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비판은 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정죄나 심판과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비판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첫째 “비판하지 말라”는 우리가 흔히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로 쉽게 착각을 합니다. 본문이 끝나는 7장 1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서 주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을 구별하십니다. 따라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분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두 번째 비판하지 말라 를 “진리를 타협해도 된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진리를 매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사용하는 비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비판이라는 단어의 원문 “크리네테” 라는 헬라어 동사는 “크리노”에서 나온 단어로, 나중에 영어 크리티스, 크리티사이즈... 이렇게 발전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그런 비판의 의미와는 뜻이 다릅니다. 재판의 의미가 있는데 번복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정죄”를 의미합니다. “재판관이 재판석에 앉아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결정적이며 완벽한 그리고 마지막인 최후의 판단과 형벌을 가하는 것.”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비판의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오면 더 이상 갈 때가 없죠.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비판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비판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비판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내가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1-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하는 자는 누구에게 심판을 받습니까? 먼저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약2:13에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성경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이 의인 모르드개를 모함하여 죽이려다가 그 장대에 누가 달렸습니까? 모르드개가 달린 것이 아니라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습니다. 비판하면 사람에게서도 비판을 받습니다. 좋은 말하면 좋은 말이 오게 되어 있고 비판하면 비판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속담이 맞습니다. 사랑 없이 판단하는 말은 다 비판이라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자신도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3-4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티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들보는 뭡니까? 대들보라 해서 집에서 수직으로 지붕을 떠받쳐 들고 있는 기둥 중 가장 큰 제목이 들보입니다. 자신은 더 큰 죄인이면서 남의 작은 흠을 보고서 비판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속담에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말한다."는 말이 있지요. 솔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가랑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한 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은 한 여인을 예수님에게로 끌고 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들은 기세등등했던 모습을 버리고 하나씩 둘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안다면 어떻게 남의 티를 보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이거나 외출에 가서 조심해야 할 사항이 남 이야기입니다. 누구에 대해서 감정이 좋지 않고 기분이 나쁘면 비판을 하게 되는데 남의 이야기 많이 하는 것 자체가 좋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 아니면 남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3. 사랑 없이 하는 비판은 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 구절에 사랑이라는 낱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라는 낱말 속에 사랑해야 할 의무가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 없이 누구의 티를 뺄 수 있겠습니까? 잘못 하다가 눈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사랑이 없이 하는 것은 악의적입니다. 의로운 율법 가지고도 사랑 없으면 무수한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게 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개인적 친분이 있을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감싸고돌지만 나와 상관이 없다 했을 때는 너무나 혹독합니다. 좀 더 우리의 사랑을 예수의 사랑으로 바꾸고 더 넓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만이 남의 티도 빼줄 수 있고 진정 바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남을 비판한다는 그 자체가 그 인격의 모순과 죄악성을 무엇보다 더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비뚤어진 사람이 남 비판하지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은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4. 비판은 귀한 것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제가 무슨 좋은 말을 하거나 충고나 권고의 말을 할 때 절대 듣지 않고 도리어 나에게 상처를 줄 사람인가 생각해서 분별해서 말을 하거나 안할 때 이 말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개가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냐면 바리새인들을 보고 개라고 하신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이방인들을 향해 개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향해 개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기가 막힌 역습입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왜 말귀도 못 알아 듣는 개나, 좋은 것을 볼 줄 모르는 돼지로 비유하셨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정죄하는 사람들, 비판하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심리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상당히 똑똑합니다. 냉철하고도 예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단점은 남들의 좋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판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배타성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비판은 ‘크리네테’ 정죄에 가까운 비판입니다. 너희들은 이래서 문제다. 너희들은 틀렸어. 이런 정죄를 하는 사람들 속에는 심리적 배타성이 있다니까요? 대화가 안 됩니다. 대화 자체가 안 됩니다. 왜 바리새인들에게 개라고 돼지라고 했겠습니까? 비판하는 사람들은 축복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말이나 충고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유명한 풍자적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날 푸쉬라는 고양이 한 마리가 런던을 방문했습니다. 루이스는 런던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푸쉬야 너 어디 갔다오니?” <예, 나는 여왕을 만나러 런던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푸쉬야, 너는 런던에서 무엇을 보았니?” <나는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보았습니다.> 고양이 푸쉬는 런던의 그 아름다운 왕궁에 가서 엘리자벳 여왕이나 찬란한 궁궐의 그 아름다운 사적을 본 것이 아니라 겨우 여왕의 의자 밑을 기어다니는 생쥐를 보고 온 것입니다.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 먹잇감을 찾듯이 사람들 속에 있는 이 생쥐 같은 어두운 구석만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상대방의 장점을 찾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상대방의 단점을 더 찾는 사람들입니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기를 밥 먹듯 하던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데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탄은 바로 이 비판하는 습성 속에 공격의 화살을 쏘아대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손상시킵니다. 사람들은 남을 비판할 때마다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비판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되면 아예 작심하고 사람들에게서 비판거리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평소 비판을 잘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그처럼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냐고 힐문하면 그는 자신의 성품이 너무나 솔직하기 때문에 그저 솔직한 의견을 말했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거나 도와주는 삶과는 무관한 채 사람들과의 소외감 속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게 되겠지요. 어느 기독교 사역자는 비판을 피하려는 그의 의지와는 달리 그의 마음은 항상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을 읽던 중 로마서 14장 10절의 말씀 앞에서 그의 심장이 멎었다고 고백했습니다.“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그 후로부터 그는 비판적인 생각이 바로 사단의 공격임을 깨닫고 말씀으로 대적하는 삶을 살면서 그 굳어진 습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족 된 우리가 서로 비판하기보다는 사랑하고 보듬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심 같이 긍휼히 여기십시다. 사랑 없는 비판은 결국 자기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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