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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하박국 3:17-18/ 감사하는 신앙 [주일낮]
  • 조회 수: 757, 2013.11.19 19:45:42
  •     누가 예수님을 잘 믿느냐, 누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이냐 할 때에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어떤 일에까지 감사할 수 있으며,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 이 두 낱말의 헬라어 어원은 같습니다. 기쁨은 내적인 것이며 감사는 외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기쁨은 그 내용이요, 감사는 형식적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쁨이 북받쳐 오를 때 거기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에 2장 4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고백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 속에서 참된 기쁨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은 이 절대적인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무조건적인 기쁨이며, 차원 깊은 곳에서 솟아나온 변치 않는 기쁨이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신앙적인 기쁨입니다. 하박국 선지서의 배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 대 제국이 유다를 침략하는 시대입니다. 즉, 바벨론의 침략으로 유다가 멸망당하는 공포와 두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눈앞에 원수가 쳐들어오는 장면이 보입니다. 특별히 3장 16절을 보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가올 환난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우면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으며, 내 몸의 처소가 떨린다고 고백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인의 참 감사가 무엇인가를 역력히 보여주는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현대는 기쁨이 없는 세대입니다. 잃은 사람은 억울해서 기쁨이 없고 얻은 사람은 더 얻지 못해서 기쁨이 없습니다. 적으면 모자라서 걱정, 많으면 지키느라고 걱정, 이래저래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감사로 차별화됩니다.

    구필화가 김준호씨의 글을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구필화가라는 말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데 김준호씨는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에 진학하여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했는데 군복무 19개월이 되던 10월 어느 날 부대에서 관물대 위에 올라가 물건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바닥 위에 있는 소총 위에 그대로 떨어진 것이 척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추를 크게 다쳐 전신마비 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신체장애를 탓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며 생활한다고 합니다. 그의 감사는 4가지인데 첫째, 내가 전신마비 환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고 믿게 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하고, 둘째는, 군대에서 다쳤기 때문에 치료비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셋째는 원호병원에 입원하는 중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때 병원의 실습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구필화가 가 된 것에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인당이라는 화명으로 붓을 입에 물고 글씨나 그림을 그리고 있고  세종문화회관이나 여러 유명한 곳에서 그림을 전시하는 구필화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분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이렇게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빌립보서 1장 3절 부터 6절 까지에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고, 아니고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느냐... 즉, 저 사람이 진짜 신자라고 할 때 어디에다 기준을 두고 그렇게 말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로서 1, 감사 2, 선교 3, 기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감사의 덕목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로서 으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어떤 면에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까?

       빌 1:3에서 바울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을 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신앙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생각을 할 때마다 원망을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런 일, 저런 일을 원망하다 보니 잠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높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우리는 꼭 내가 받아야 감사하고 꼭 내가 먹어야 감사합니다. 나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잘 되면 속이 쓰립니다. 이런 심보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차원 높은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산다고 하면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래도 저 사람이 잘 되니까 참 좋네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기쁨이 곧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이런 감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4절에는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이 잘못된 사람은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요, 원망과 불평이 튀어 나옵니다. 기도할 때 자꾸 자신과 하나님을 연결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연결시켜 자꾸 가르치는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게 됩니다. 기도 중에서 가장 능력 있는 기도가 기쁨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의 여집사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상업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술을 심하게 마시는 분이었습니다. 남편이 술 마시는 것이 늘 불만이었는데 하루는 남편이 술 마시고 와서 어지럽혀 놓은 것들을 다 정리하고 잠든 남편 옆에 앉았습니다. 그만 손톱으로 얼굴을 확 할키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저는 언제까지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합니까?" 슬피 울며 탄식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감동하사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나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감사할 일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순간 스스로 마음이 감동되어 "그래도 과부 신세보다야 낫지 않은가? 지금은 저 꼴이지만, 언젠가는 사람이 될는지도 모르지.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제 집 찾아오는 것 하나는 신통하다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감사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랍니다. 토요일은 특히 술을 많이 마셔서 주일날은 꼼짝 못하고 누워서 집을 보면서 아내보고 교회 나가라고 하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렇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웃고 있는데, 남편이 눈을 떴습니다. 밤중에 혼자 앉아 실실 웃고 있는 아내를 보자 남편이 놀라서 묻습니다. "왜 웃는 거요?"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그 부인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하나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다 듣더니 "나도 예수 믿어줄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제 그 부인은 간증합니다. "내가 10년을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으시던 하나님께서 한 번의 감사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감사함으로 모든 사정을 아뢰어 보십시오. 그리할 때 당신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5절에서는 성도의 교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코이노니아’로 영적 교제요 복음 안에서 맺어진 교제에 대한 감사입니다. 교인을 만나는 것이 꺼림칙하고 거북한 사람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 만나도 기쁘고, 저 사람 만나도 반가운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성도의 교제란 종말론적인 공동체입니다. 오늘 여기서 만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집에 살던 식구끼리도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길이 서로 달라집니다. 하지만 성도의 교제는 하늘나라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니 성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기고 잘 맺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 구원의 기쁨을 소유한 사람만이 가능한 삶입니다. 이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억지로, 혹은 냉랭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그러한 기쁨이 있는 자들은 바로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진정 즐겁고 기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성도의 기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며, 성도 안에 함께 하여 주시고, 세상에서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구원하여 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이 성도의 기쁨이 될 때 성도의 생활은 즐겁고 능력 있는 삶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기쁨을 소유하여 승리하는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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