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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로마서 08:12~17/ 자녀됨을 증거하는 성령의 역사 [주일낮]
  • 조회 수: 961, 2013.11.19 20:11:47
  •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들 가운데서 특별히 베드로가 용기백배하여 권세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전에는 대제사장의 계집종 앞에서도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 떨었는데 지금은 얼마나 당당한지 몰라요. 우리집 온유가 북한 여성 아나운서가 말을 할 때마다 ‘늘 당당하다’고 합니다. ‘엄마, 북한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인데 왜 저리 당당해?“ 이렇게 묻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무식이 용감하다고 그냥 막가파식으로 당당한 겁니다. 지금도 그렇게 굶어 죽고, 나라가 기울어 가는데 그냥 당당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막가파식으로 당당한 겁니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니까... 큰 소리나 치다 죽자 이겁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변했습니다. 이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해답을 찾을려면 로마서 8장을 보면 됩니다. 14절에 보니까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전에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존감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영이 그의 안에 거하시게 되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누가 나를 건드리냐...’ 이겁니다. 그리고 15절과 16절 보면 더 확실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친아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양자로 인정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양자도 아들입니다. 양자가 된다는 것은 본래 속했던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서 새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새 성을 갖게 됩니다. 새 가정의 전통과 규범에 따라 예의범절, 교육, 인간관계, 언어생활, 행동방식이 다 달라져야 합니다. 새 가정의 명예와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왕이 있는데 그 왕에게 왕위를 물려줄 자녀가 없다고 합시다. 그러면 촌수를 따져서 왕위계승순위가 가장 빠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그런데 그 왕가에 아들이 귀해서 촌수가 아주 먼 왕족 가운데 한 사람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왕손은 왕손이지만 가세가 기울고 아주 가난해서 평민 중에서도 평민 같이 살아왔다고 합시다. 왕궁으로 불려온 그는 그때부터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수업을 받아야 합니다. 그 수업의 내용과 과정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너무 어렵고 고됩니다. 거북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궁중예절이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특별히 개인교사가 붙여집니다. 신변경호도 이십사 시간 따라 붙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 왕궁이나 국가가 나서서 다 해결합니다. 말만 하면 알아서 다 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왕위계승자로서 왕의 아들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해야 하나님의 자녀다운 언어와 행실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하게 됩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하게 해주십니다. 본문 16절과 17절 상반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증언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각하게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곧 하나님나라를 차지할 상속자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상속자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언어와 행실은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답게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져야 하며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의 모습을, 육신적 삶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나라 상속자의 모습을 지니게 되며 그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 답을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갈5:16-26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여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을 버리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나라 상속자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생각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붙여주신 교사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지도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삶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며 그 삶의 과정에서 닥치는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을 어떻게 지켜주셨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해지자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이집트로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창12:10).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곳 사람들이 자기의 아내 사라가 너무 예뻐서 그녀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그녀가 자기의 누이동생인 것으로 알려지게 하여 자기를 죽일 필요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꾀는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이 데려가기도 쉽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집트 왕이 그녀를 자기의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잃고, 사라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순결을 잃게 된 위기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다 살리신 일이 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한 남자로서 나약하고 겁 많고 졸렬함을 드러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지켜주심에 대한 믿음이 없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가서 거류할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랄 사람들이 자기의 아내 사라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자기와 사라가 부부임을 감추고 오누이 사이라고 했는데 그랄 왕 아비멜렉이 그런 줄 알고 사라를 데려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사라를 가까이 하기도 전에 그날 밤으로 그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하셔서 아비멜렉이 곧바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까지 모두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병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삭이 잉태되어야 할 태속에 다른 씨가 잉태되지 못하게 근본적으로 막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숨도 지키셨고, 사라의 순결도 지키셨으며, 나중 태어날 이삭의 출생의 정결함도 지키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지켜주심을 확신하고 이 세상에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 항도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나타내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르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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