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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태복음 05:09/ 화평케 하는 자 [수요]
  • 조회 수: 852, 2013.11.19 20:16:57
  • 어느 마을에 화평한 가정이 있었다. 하루는 친구가 와서 화평하게 사는 방법을 물었다. 주인은 곧 큰아들을 불러서 밭에 이삭이 갓 패인 보리를 베어 묶어 세우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들은 보리를 벨 때가 아니지만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것을 중단시키고 이제는 소를 지붕 위로 올리라고 하니 아들은 또 소를 지붕에다 끌어올리려고 애썼다. 이것을 본 친구는 ‘화평의 비결이 이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곧장 집으로 가서 아들을 불러서 “보리를 베어 묶어라”라고 하자 아들이 대답하기를 “아버지 식전에 어디 갔다 오시더니 노망이 들었소?” 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화평은 원리와 법칙을 내 세울 때에는 불가능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백 인종차별이 지배하는 어두운 시대 가운데 태어나 하나님의 목자로 부름을 받아 예언자의 길을 걸었으며, 49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제단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예수님의 약속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암살당하기 5일 전 설교에서 자신의 장례식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는 “누군가 나의 삶을 회고하는 조사를 하게 된다면 노벨평화상을 비롯해 수 백 개의 상을 받은 것을 언급하지 말고 화평케 하는 자의 삶을 살다가 갔노라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로 오셔서 인간과 하나님을 화평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원래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였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려고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전선에서 통신병에게 아주 중요한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의 포탄공격으로 통신선들이 다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방법은 이 통신선들을 연결하는 것인데 이 선이 짧아서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연결할 방법은 없고 시간은 점점 지나갑니다. 부대원들의 생사가 바로 이 통신선 연결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급박한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통신병은 끊어진 양쪽의 전선을 자신의 양손으로 붙잡았습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마지막 그 명령을 아군 지원부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마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건이 2000년 전 유대 땅 골고다 산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가 다시는 하나님과 회복될 수 없이 관계가 훼손되었을 때,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잡으시고, 또 한 손으로는 우리를 붙잡으시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회복되었습니다.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분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서로 원수 되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마귀의 아들이다.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 일을 하였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화평케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화평케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성품을 가져야 한다.

      1. 먼저 내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가 나사렛 사람인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시인한다. 그가 왜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는 하나님과 화목하신 분이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시는 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나 복 받기 원합니다.” 해도 소원대로 안 되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지 못해서 그렇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내게 와서 나와 화목하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 너무 멀리 떠났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지 못한다.  인간이 사단에게 사로잡혀 그에게 소속되는 바람에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이다. 아담이 마귀의 수하가 되는 바람에 에덴에서 쫓겨난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보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는 화목하시다. 예수께서 침례 받고 물 위로 올라 오실 때 하나님은 “저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셨다. 예수도 자기 뜻이 있지만 그것을 앞세우지 않고 아버지와 조금의 갈등도 없이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대로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과 갈등이 없이 영원히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평 하려고 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사 화목을 이뤘다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예수는 매우 노력하셨다. 철저히 복종하셨다. 빌립보서 2장 5~9절의 말씀에서 보듯 그는 아버지와 동등하지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복종하셨다. 

    부자지간이란 것은 절대적이다. 화목해야 한다. 부자유친이란 말도 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절대 화목이다. 화평이다. 평화이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가 그 뜻을 거역한다며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없다. 오히려 원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의 어떤 주장이나 의지가 있지만 그것을 전혀 고집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 율법의 강령인데 예수는 그 강령대로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복종하시고 섬기셨다. 

    2.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혹 누구에게 화해를 청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죄인이 아니라도 죄인처럼 자세를 낮추어야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높은 자세로 명령해서 화해되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왜 말구유에 오셨습니까? 그보다 더 낮은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오시어 화해의 진수를 보여 주셨습니다. 

    3. 온유한 마음이라야 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힙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화를 내어도 내가 유순하게 대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때로는 바보같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런 사람이 바로 화해를 만드는 자입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자세히 보면 모두가 쇠덩어리 입니다. 여기에 부드러운 기름이 있기에 기계들이 마찰없이 잘 돌아갑니다. 만약 기름이 떨어지면 당장, 차는 굳고 굳은 쇠끼리 부딪쳐서 불이 나서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3. 관용이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초조하고 성급한 사람은 회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안티오코스가 전쟁 중에 자기의 막사 안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막사 밖에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들이 왕이 그 안에 있는 사실을 모르고 왕에 대해 갖은 욕을 다 했다고 합니다. 안에 있던 왕은 그 욕을 듣다못해 천막을 들추고 하는 말이 "듣기가 거북하니 조금 멀리 가서 하게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른과 어린 아이 중 누가 더 관용을 베풂니까? 큰 사람일수록 너그러움이 있고 관용합니다. 

    4. 인내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화해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몇 가지 조건이 필요 합니다. 화해자의 반대는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람의 죄목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 당 짓는 것, 분쟁하는 것, 수군수군 하는 것, 비방하는 것, 교만 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한 마디로 trouble maker 입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trouble maaker가 많습니다. 이 말 저 말 옮기며 분열을 일삼고, 평화롭게 사는 집에 불을 지르며, 가는 곳마다 좌충우돌하여 말썽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남은 일생을 나쁜 말 안하기로 결심하고 살면 얼마나 평화로운 삶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불화한 가운데 peace maker가 들어가면 화해가 되어 좋은 관계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칭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좋은 중재자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출애굽기 32장에 모세의 유명한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잠깐 없는 틈을 타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이백성은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으로 하여금 새로운 민족이 되게 해서 가나안 땅에 가게 하겠다"라고 하실 때 모세는 "어찌하여 구원하신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하며 간절히 매달리다가 32절 마지막에 가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자기 백성은 망하는데 혼자 살아 남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 백성을 사랑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진노의 채찍을 거두셨습니다. 모세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peace maker 입니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매달렸습니다. 참으로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물로 침례를 받으시고 나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화평의 축복을 받아서, 화평의 생활을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과연 너는 내가 기뻐하는 자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라는 말씀을 듣게 되면 이에서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야말로 하늘의 유산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동물들은 모두 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양이나 소는 바치게 하셨어도 말은 바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말은 뒷발질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리나 늑대같은 공격형 동물은 원치 않으시고, 순한 동물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비둘기는 부부간에도 금슬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순결하고, 지조가 곧고, 정조 관념이 대단한 새입니다. 암컷이나 수컷이나 한 쪽이 먼저 죽으면 죽을 때까지 혼자서 산다고 합니다. 놀 때도 가만히 있지 않고, 서로 목을 비비기도 하고 부리를 맞추기도 하면서 얼마나 다정하게 지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비둘기를 보고 화목하게 지내는 법칙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평화는 좋은 것입니다. 올림픽 때에도 비둘기를 날려 보내서 평화를 기원합니다. 유엔의 깃발에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노벨상도 5개 부문중에서 평화상이 제일 큰 상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고서 평화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칼을 녹이는 평화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들으시겠습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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