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구약 출애굽기 14:01-14/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새벽]
  • 조회 수: 208, 2013.11.20 11:15:36
  • 하나님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으로 홍해의 광야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죠?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연약한 믿음을 이해하셨던 겁니다. 만약 정로(征路)인 블레셋 땅을 지나가게 되면 필경 전쟁이 있을 터, 이를 막 믿음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들이 겪게 되면 그만 마음이 여려져서 애굽으로 돌아가자 할까봐 정로가 아닌 우회로를 택하신 겁니다. 이것은 철저히 이스라엘에 대한 배려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해와 믹돌 사이에 있는 비하히롯 앞에 장막을 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곧 일어날 일을 말씀하십니다. 즉 바로가 마음을 바꿔 이스라엘을 곧 추격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이 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게 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것은 좋지만 바로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러 곧 온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리가 알기론 바로는 이스라엘을 내 보냈습니다. 10번째 재앙에 항복을 하고 이스라엘을 내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꿔 추격이라니요? 사실 바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내보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내보낸 것은 사흘 길 떨어진 광야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다시 돌아오라고 한 것일 뿐입니다. 네 번째 재앙을 만난 바로가 모세에게 했던 제안을 기억하십니까? 8:20-32절을 보십시오. 파리 떼로 홍역을 치른 바로는 모세를 불러 멀리 갈 필요 없이 애굽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이 사흘 길쯤 들어가는 광야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며 제사를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10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내보낼 때 그들을 완전히 내보낸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흘 길이 아닌 더 먼 곳을 나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이 바로 자신을 속이고 도망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겁니다.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5절)

     

    우리는 이 내용을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야,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이렇게 다르구나!’하는 느낌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10번째 재앙 앞에 바로와 그의 백성들이 얼마나 당황했습니까? 두 번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이 꿈에라도 나타날까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백성에게 무엇을 구하든, 그것이 패물이든 의복이든 다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바로는 하나님이 예견하신 대로 마음을 바꾼 겁니다. ‘안 봐서 시원하다’에서 ‘아깝다’는 마음으로 바뀐 겁니다. 물론 기본적인 마음이 다시 돌아올 것을 조건으로 내보낸 것이긴 하지만, 사실 안보여서 시원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생각이 달라지는 겁니다.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5절) 우리는 바로의 말에서 절절한 후회를 느낍니다. 그 느낌은 한 마디로 ‘아깝다!’는 겁니다. 그들을 노예로 부려 편하게 지내던 시절이 그리워진 겁니다. 이 2백만 명의 노예를 하루아침에 잃는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거였습니다. 마음이 완악해진 바로가 추격할 채비를 합니다. 선발된 정예부대인 600대의 병거와 나머지 모든 병거들을 동원합니다. 그리고 전군 동원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추격합니다.(6-8절) 그리고 이스라엘 바로 뒤까지 추격을 하였습니다.(9절)

     

    자, 바로의 이 추격에 이스라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8절에서 보다시피, 출애굽 당시 보여주었던 담대함입니까? 아닙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를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0-12절)

    우리는 이스라엘에게서 바로와 다를 것이 없는 변덕스러움을 보게 됩니다. 10개의 재앙이 시리즈로 진행될 때 가졌던 그 담대함은 이제 볼 수가 없습니다. 불과 며칠이 지났다고 그 호헌장담하며 하나님께 맹세하던 그 담대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아주 치사한 말을 합니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물에 빠진 사람 살려놨더니 왜 살렸느냐고 땡강 부리는 수준입니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하소연하기에 기껏 살려줬더니 하는 말이 고작 원망인 겁니다. 그리고 죽음의 땅 애굽을 그리워합니다. 옛날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아주 아주 치사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치사한 태도에 대해 모세는 넉넉한 태도를 보입니다. “두려워 말라!” 모세가 이 치사한 백성에게서 읽은 코드는 ‘조석지변’(潮汐之變)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습니다. 분명히 애굽에서 나올 때는 담대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낯선 땅 광야에서 다시 마주친 바로와 애굽의 군대는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믿음 안에서 잘 살다가도 좀 버거운 일을 만났다 싶으면 옛 기질이 다시 나옵니까? 원망, 불평, 불만, 불안 등과 같은 옛 기질이 다시 나옵니까? 그래서 내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가 하는 의심이 듭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모세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14절)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태도의 본심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을 흔드는 것의 대부분은 두려움입니다. 참으로 문제는 두려움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또한 현재에 대한 큰 기대도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 이 세상에 대한 포기, 이 두 가지가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는 약(藥)입니다. 그렇다면 이 약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불안하여 자리를 옮기지 마십시오. 다른 곳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그냥 그 자리에 서 계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눈앞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미련을 갖고 있는 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을 위해 싸우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을 보십시오!!!

댓글 0 ...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4371
189 새벽 527
188 새벽 497
새벽 208
186 새벽 150
185 새벽 457
184 새벽 521
183 새벽 927
182 새벽 794
181 새벽 719
180 새벽 684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