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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사무엘하 09:01-07/ 다윗의 삶에 표현된 하나님의 자비 [주일낮]
  • 조회 수: 483, 2013.11.23 15:30:31
  • 다윗은 집요한 사울의 추격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소년으로 골리앗을 물리친 후부터 40세에 왕이 되기까지 적어도 십 수 년 동안 사울로부터 괴롭힘을 받으며 견뎌왔습니다. 우리가 한 번 다윗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왕이 되기까지 다윗의 마음이 시커멓게 탔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시커멓게 탔다는 것은 그의 마음도 황폐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좋을 때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원망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전에 가졌던 좋은 생각들은 원망의 불에 다 타버리고 그 마음에는 미움과 증오만이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했기 때문에 이런 원망과 증오를 극복하고 오늘 본문과 같은 보기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권력을 쥐고 난 후에 대부분의 왕들처럼 사울의 집안에 대해서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다윗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삭막하고 기계화되어가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를 사람들에게 표현하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합니다.

     

    먼저 간단하게 성경의 본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하 5장에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10개 지파의 추대를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베냐민과 유다지파의 추대를 받아 12개 모든 지파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다윗이 그의 모든 원수들을 진멸하여 궁에서 편히 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8장에 보면 왕국의 모든 관리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9장에 와서 여유가 생기고 나니 그 다음에 한 일이 사울의 잔당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처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동양권에 속하는데 동양의 역사에서는 왕가가 바뀌고 또 라이벌이 되어 전쟁을 한 그런 경험이 있으면 상대방 왕가의 자손들을 멸절시키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습니다. 아마 9장 이면에 재기된 문제는 바로 이런 문제였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왕가의 자손을 추적하다 보니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무비보셋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이라고 했겠죠. 그런데 다윗은 그를 아주 선대합니다. 잘 환대하여 맞아주고 그의 기업을 회복시키고 다윗 왕실에 함께 기거할 수 있는 특권을 줍니다. 므비보셋으로 볼 때 이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이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런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게 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자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필요로 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3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기에 하나님의 자비를 므비보셋에게 베풀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그냥 ‘내가 은총을 베풀겠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겠다고 하는 다윗의 선언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이 단어는 ‘헤세드’ 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영어로는 kindness, 혹은 genleness 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친절’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가페라는 독특한 세상의 사랑과 차별이 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할 때 쓰이던 구약적인 단어입니다.


    이 헤세드는 신약에 나오는 아가페와 함께 아주 중요한 성경의 단어로서 구약에 무려 250회나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사실 신약의 아카폐, 구약의 헤세드... 이 두 단어가 똑 같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인데 도리어 불쌍히 여겨 그를 선대해서 그에게 베풀어 주는 사랑... 이것이 바로 헤세드,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장 7절에 보시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으로써?....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뭐에요? 자비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구약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이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있었던 분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도 나름대로 독특하게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기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 자비를 늘 마음속에 느끼고 있었고 따라서 이 자비를 받은 자로서 이 자비를 이웃들과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무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윗과 같이 자비의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모른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모른다면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 마땅한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나를 그의 자녀로 회복시켜주신 하나님의 자비... 이 자비를 확신할 때 우리도 다윗과 같이 자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2. 다윗의 마음속에 가진 빚 진자의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빚 진자의 의식, 채무 의식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1절을 보면 사무엘하 9장1절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하고는 원수관계였지만, 사울의 아들이었던 요나단은 다윗의 친구로서 다윗의 목숨을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잊지 않고 요나단에게 가진 채무의식을 므비보셋에게 갚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7절에 보시면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무비보셋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그랬습니다. 비록 사울 왕에게 집요하게 여러 해 동안 목숨의 추적을 받으면서 죽음의 위기를 넘나들던 다윗이었지만 요나단이 그에게 베풀었던 호의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일종의 빚진 자 의식, 채무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에 무엇보다 빚지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변의 많은 이웃들에게 빚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빚진 자라” 바울이 누구한테 빚 졌다 그랬습니까? 헬라인, 유대인, 지혜자나 야만인.... 이건 그 당시 바울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아래서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에 다 얽혀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에요. 우리는 얽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부에게도, 농부에게도, 기술자에게, 심지어는 그 어떤 음지의 사람들에게 조차..... 우리는 얽혀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 인도네시아에 그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파푸아 뉴기니아, 심지어 정글에 사는 사람들과도 얽혀있는 관계입니다. 거기서 원목이 오거든요. 원목이 한국까지 와서 그거 가지고 가구 만들어 집에다 갖다 두고 살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우리는 빚지지 않은 인생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빚 진 자의 의식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겸손해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채무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보다 더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3. 다윗은 므비보셋에 대하여 가족의식을 가졌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무비보셋은 다윗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원수 집안의 후손이며 또 자기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항상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 사람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원수의 관계였습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로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셔서 우리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된 사람을 그의 아들로, 그의 친 자녀로 받아 주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비보셋... 다윗이 그를 받고, 품고, 영접하고, 자비를 베풀었던 이 무비보셋이라는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믿습니다. 얼마나 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입니까? 이 사람이 한 때는 왕자였으나 이제는 반역자의 위치에 서서 도망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 거기다 그는 신체까지 불편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절망적인 처지에 있었던 이 사람... 그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오죽하면 8절에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므비보셋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사울 왕가의 모든 재산을 회복시켜 주고, 거기다가 궁에서 다윗과 함께 먹고 마시는 특권까지 주었습니다. 이것이 므비보셋이 받은 은혜일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인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므비보셋이 다윗의 아들처럼 된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자비라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크레스토스 라고 발음하는데 그리스도라는 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도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고 발음합니다. 그런데 발음이 비슷하게 들리죠? 그래서 옛날 초대교회 시절에 사람들이 이 두 단어 사이에서 굉장히 혼동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뭐로 알아듣느냐 하면 ‘친절’로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누군지 모르지만 아 그 분은 친절한 분이로구나, 그 분은 자비로운 분이구나... 이렇게 이해를 했다 그래요. 그래서 그리스도인... 이러면 친절한 사람.... 이렇게 이해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좀 친절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친절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날 수가 있을까요?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


    이 말씀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향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이지만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세상의 바람을 따라 살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자비를 표현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이것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삶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이 춥고 음산한 초겨울의 냉기를 녹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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