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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고린도전서 14:13-25/ 예언과 방언의 은사 [새벽]
  • 조회 수: 299, 2013.11.26 11:09:09
  •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방언의 은사가 자신을 세우는 일에 사용되지 않고 과시용으로 사용될 때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구절은 19절입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렇게까지 방언의 은사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고 하는 데는 아마도 고린도교회 내에 방언의 은사를 자신의 신령한 면을 과시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남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자신을 세우는 일에 사용되는 반면 예언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된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방언은 첫째,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개인에게 아주 초보적으로 주시는 은사이며, 둘째로,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위해 주어진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주로 기도를 많이 하고 깊이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방언은 개인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익한 은사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는 주로 신앙에 입문한 사람들이 기도를 뜨겁게 하다 보면 이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됩니다.

     

    저도 중학교 3학년 말에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 하다가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3 아이가 뭐 그리 신령하겠습니까? 기도원에 가서 보니 여러 사람들이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저의 어머니는 몸이 좀 아프셨거든요. 그래서 순간적인 충동에 3일 금식기도를 기도원 원장님 앞에서 서원하고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금식하니까 배도 고프고, 힘도 빠져서 기도고 뭐고 아무 것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냥 그 추운 성전에서 이불을 똘똘 말고 누워 있다가, 엎드려 있다가 이렇게 하면서 시간만 가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기도가 안 돼요. 철없는 나이에 무슨 기도입니까? 그런데 금식을 마치는 그 날 새벽에 제가 너무 한심해서 그냥 아무도 없는 성전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부르짖다가 방언이 터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그렇게 방언을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연예인들의 간증도 들어보면 아주 신앙의 초보 상태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아 신앙이 깊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방언의 은사는 개인을 신앙으로 세우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방언의 은사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여 공적인 회중의 자리에서 분별력 없이 ‘따따따따...’ 하면서 방언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방언의 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23절에 그렇게 나와 있죠?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래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하지, 방언을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고린도서신이 쓰여진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설교자가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1950년대에는 신학을 졸업한 교역자가 부족해가지고 전도사님 한 분이 몇 개 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하였던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초대 교회에는 지금처럼 성경이 확정되지도 않았기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순간순간 일어나서 자신이 묵상한 내용을 발표했는데... 이런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한다고 퀘이커교도들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씀하는 것이 바로 예언의 은사였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자리에서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니까 혼란스러운 거죠. 그래서 공적인 자리에서 방언으로 말하려거든 반드시 통역을 하게 하라고 바울이 권하는 것입니다. 통역 없이는 절대로 방언을 말하지 마라.... 그래서 19절을 다시 인용하자면 “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그렇습니다. 모든 은사는 개인에게도 유익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적으로도 유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은 그 은사를 받은 자체가 자신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인 유익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과시하게 되고, 남용하게 되어 공적으로는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라고 은사를 주신 것은 아니거든요. 은사를 가지고 그렇게 공동체를 흔들어되느니 차라리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 바로 19절의 말씀입니다. 참 이렇게 말씀하시기까지 사도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은사가 사람의 과욕에 의해 해로운 것처럼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 유익한 것입니다. 재물도 유익한 것이고, 직분도 유익한 것이고... 그런데 사람의 욕신이 이 유익한 것들을 무익한 것들로, 심지어는 해로운 것들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사들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거리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유지하며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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