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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창세기 28:17/ 하늘의 문을 여소서 [주일낮]
  • 조회 수: 733, 2013.12.05 22:29:10
  • 오늘 본문 중에서 17절 말씀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는 말씀은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던 중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그 사닥다리 위를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야곱이 깜짝 놀라서 고백한 일종의 신앙고백으로 한 때 우리가 주일 낮예배 시작 때마다 불렀던 ‘하늘의 문을 여소서’ 라는 내용의 복음송 가사가 생각나게 하는 본문입니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끊이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만약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처럼 신앙경험을 하였다면 우리가 정말 이 찬양을 간절한 마음으로 하였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제목을 ‘하늘의 문을 여소서’ 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먼저 그가 표현한 ‘하늘의 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속임으로써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원래 그 위인이  욕심과 시기심이 많아 평소에도 형을 속여서 이용해 먹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의 형 에서가 사냥을 한 후에 허기가 져 있을 때 그가 끓이는 팥죽 한 그릇을 팔아 형의 장자권을 샀습니다. 사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고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에서의 편에서는 농담 삼아서 ‘그래, 그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냐. 그 장자권 너나 가져라.’ 이렇게 하면서 넙죽 팥죽 한 그릇을 받아먹었을 것입니다. 흔히 농담으로 한 것을 진담으로 받아드리는 사람을 보고 속 좁은 사람이라고 그럽니다. 그만큼 야곱은 욕심도 많고 속도 좁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사람이 호인이어서 이런 야곱을 개의치 않고 허허 웃어넘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정도를 넘어서서 자기가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채니까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에서가 야곱을 향해 분노하고 있는가는 성경을 보면 압니다. 창세기 27장 41절을 보면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호인이었던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까지 하게 된 모든 원인 제공은 다 야곱이 한 것입니다. 야곱도 형 에서가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는데 까지는 철저하게 준비했으나 형 에서의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하는 문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형 에서를 호인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좋을 수는 없는 법이고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에서와 같이 폭발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에서는 칼과 활을 잘 다루는 무인이기도 하였으니 야곱이 결국은 일을 낸 것입니다. 

    이렇게 대책 없이 일을 벌이고는 정처 없이 길을 떠납니다. 그의 형 에서의 분노 앞에서는 그의 집도, 그의 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야곱이 기댈 언덕이 되지 못했습니다. 정말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사방팔방으로 꽉 막혀서 갈 곳이 없기에 야곱은 할 수 없이 부모와 집을 떠나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어머니 치마폭에 싸여서 음식이나 만들고 집안일이나 거들 줄 알았지, 집을 나가본 적이 없는 야곱이었기에 그가 어두운 밤에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을 잘 때 그가 얼마나 두려워 떨었겠습니까? 이런 그에게 하늘의 문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오는데 그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방팔방으로 길이 꽉 막힌 그의 앞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길이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시는데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의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3-15)는 실로 엄청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걸 보고 깜짝 놀라 잠이 깬 야곱의 신앙고백이 바로 17절입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꿈을 꾸며 하나님은 만났던 곳은 인적이 없는 거친 광야 브엘세바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곳에서 하늘의 문을 보았으며, 하늘의 길을 본 것입니다. 브엘세바 광야는 일교차가 심한 곳입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춥습니다. 그 속엔 사람도 없고 한밤의 추위를 피할만한 집도 없습니다. 광야에 서식하는 독사와 전갈 그리고 이리떼들이 있을 뿐입니다.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만나시고"리고 했스빈다.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했던 광야는  사람이 거처하거나 통과하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일사병으로 쓰러질만큼 폭염이 계속되다가 밤이 되면 추위가  몰아  닥칩니다.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기 십상이고 독사와 맹수들이 들끓기  때문에 언제 기습을 받을런지 예측불허입니다. 거기다가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그토록  열악하고 위험천만한 황야를 횡단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단 한명도 목말라  죽었거나 일사병으로 죽었거나 배고파 죽었거나 추위에 얼어 죽었거나 맹수에 물려 죽은 일이 없었스빈다. 애굽에서 나왔던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었지만 그들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한 죄 때문이었지 황무지와 짐승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32:21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라고 했습니다. 환경이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이 좋은데 타락하거나 잘못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환경이 열악한데 바로 되고 잘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을 탓하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이 어렵기 때문에 주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믿음을 굳세게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잘 벌고 성공하고 잘  살게 됐기 때문에 주님 외면하고 교회 등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하고 감격해서 신앙생활을 더욱 잘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일이 되든지 안 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황무지와 짐승이 울부짖는 광야에 들어섰을 때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은 그들이 사잘굴과  풀무불 속에 들어 갔을 때 사자의 입을 봉해 주었고  풀무불이 사르지 못하도록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언제, 어디서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늘의 문을 보고, 하늘의 길을 보게 되는 것이 바로 브엘세바 같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입니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며 사방팔방이 막혀 있어 갈 곳을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삶에도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을 향한 길이 보이는 줄 믿습니다. 
      
    지난주일 오후예배 시에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천국의 문이 어떠한가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천국의 문은 동서남북 4방으로 세 개의 문씩 총 12 문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에스겔서 48장 30-35절에도 보면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12 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처럼 동서남북에 세 개씩 문이 있어 합하면 12문이 됩니다. 그리고 문 사면을 합하면 1800 척이 된다고 했습니다. 1척이 30cm 조금 더 되니까 1천척이면 300m, 그러니까 총 500m가 더 되니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는 문이 많고, 크고, 넓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문이 크고, 넓고 많은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무엇보다도 어느 누구도 좁아서 천국을 들어가지 못했다고 변명할 여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신령한 영감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도 문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서울에도 4대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은 아침이면 열렸다가 저녁이면 닫혔습니다. 문 안에 사는 사람은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와야 했고 문밖에 사는 사람은 문이 닫히기 전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문은 닫혔다 열렸다 하지 않습니다. 계시록 21:25을 보면 성문들은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더니 거기는 밤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이 열려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21:27을 보면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문의 의미를 요한복음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0:8을 보면 "나는 양의 문 이다"고 하셨고, 9절을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크고 위대한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받고 풍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은행문도 밤이면 닫힙니다. 청와대 문도 중앙청이나 서울시청문도 밤이면 닫습니다. 그러나 하늘 문은 닫히지 않습니다. 

    세상문은 막힙니다. 동문도 북문도 남문도 서문도 막힙니다. 그러나 하늘문은 열려 있습니다. 지금도 '나는 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이 모든 문을 열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세상문은 막히기도 하고 닫히기도 합니다. 어떤 날 갑자기 건강의 문이 막히고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가 하면 직장문이 닫혀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은행 문이 닫혀 사업지원 자금을 단돈 천만원도 빌려 쓸 수 없는가 하면 모든 도움의 손길이 막혀 절망의 벼랑에 서게 됩니다. 앞길도, 뒷길도, 옆길도 다 막혔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막히지도, 막을 수도 없습니다. 하늘문은 열려 있습니다. 

    헬렌 켈러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눈도 귀도 입도 다 막힌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삼중고의 비극을 한 몸에 지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다른 문이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과 의지로 자신의 닫힌 문을 극복한 후 백악관을 들어서며 원더풀을 연발했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세상에서 누리는 성공의 문이 활짝 열렸다고 기뻐하거나 자만에 빠질 필요도 없고 세상 문이나 길이 막혔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직후 벤자민 스포크 박사가 쓴 「육아법」은 아이를 키우는 전 세계의 어머니들과 교육학자들의 필독서이자 베스트 셀러였습니다. 그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은 사람만 1억 5천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은 3천만 달러를 벌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폐렴에 걸려 매월 1만 달러를 썼고, 그 결과 3천만 달러를 다 탕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 그의 아내는 전 세계를 향해 스포크 박사를 도와 달라는 구호요청을 했는가 하면 보험혜택도 받지 못한 채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 문 닫히면서 그의 인생문도 닫힌 것입니다. 

    하수도를 들여다보면 썩어 냄새나는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면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쪽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 문도 저 문도 닫혀버린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아니면 툭 터지고 열린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가 어느 날 시청 사장실에 들어갔다가 시장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한 폭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닷가 모래 위에 배 한 척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썰물 때여서 모래 위에 놓여있는 배와 노는 처절하리만큼 고독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 밑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이 새겨 있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인 셈이었 습니다. 카네기는 사장에게 그 그림의 사연을 물었습니다. "저는 외판원과 작은 사업을 시작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만 28세 되던 해 거듭된 실패로 자살까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절망 속을 헤매던 어느 날 어느 사무실을 찾아 갔다가 저 그림이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다. 지금은 썰물 때라 저 낡은 배와 노가 쓸모없이 모래 위에 방치돼 있지만 밀물 때가 되면 저 배는 검푸른 바다 위를 떠다닐 수 있다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날 희망이 움트는 소리와 성공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림의 주인에게 용기를 내어 그림을 저에게 달라고 부탁했고, 그 후 저는 그 그림을 바라보며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소망으로 일했고,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이 빠져나가는 썰물 때가 있는가 하면 반드시 물이 몰려드는 밀물 때가 있는 법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겐 썰물과 밀물의 원리가 아니라 하늘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늘에도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열려 있습니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 믿고 기도하는 사람, 예수님이 영원한 문이신 것을 믿는 사람은 그 문을 찾고 새로운 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을 잘못 다루면 실패가 되고 실패를 잘 다루면 성공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문이 막혔습니다.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면 거기 사닥다리가 있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 거기 서 계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눈을 뜹시다. 그리하여 하늘 문에 서 계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내가 너에게 주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길은 있습니다. 하늘에도 문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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