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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창세기 28:10-19/ 하늘의 문, 하늘의 길 [주일낮]
  • 조회 수: 329, 2013.12.07 16:19:21
  • 오늘 본문 중에서 17절 말씀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는 말씀은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던 중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그 사닥다리 위를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야곱이 깜짝 놀라서 고백한 일종의 신앙고백으로 한 때 우리가 주일 낮예배 시작 때마다 불렀던 ‘하늘의 문을 여소서’ 라는 내용의 복음송 가사가 생각나게 하는 본문입니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끊이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만약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처럼 신앙경험을 하였다면 우리가 정말 이 찬양을 간절한 마음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을 ‘하늘의 문, 하늘의 길’ 이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속임으로써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원래 그 위인이 욕심과 시기심이 많아 평소에도 형의 것을 호시탐탐 노린 자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의 형 에서가 사냥을 한 후에 허기가 져 있을 때 그가 끓이는 팥죽 한 그릇을 팔아 형의 장자권을 샀습니다. 사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고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에서의 편에서는 농담 삼아서 ‘그래, 그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냐. 그 장자권 너나 가져라.’ 이렇게 하면서 넙죽 팥죽 한 그릇을 받아먹었을 것입니다. 흔히 농담으로 한 것을 진담으로 받아드리는 사람을 보고 속 좁은 사람이라고 그럽니다. 그만큼 야곱은 욕심도 많고 속도 좁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사람이 호인이어서 이런 야곱을 개의치 않고 언제나 허허 웃어넘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정도를 넘어서서 자기가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채니까 여간해서는 개의치 않고 허허 웃어넘긴 에서도 그만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에서가 야곱을 향해 분노하고 있는가는 성경을 보면 압니다. 창세기 27장 41절을 보면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호인이었던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까지 하게 된 모든 원인 제공은 다 야곱이 한 것입니다. 야곱도 형 에서가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는데 까지는 철저하게 준비했으나 형 에서의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하는 문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형 에서를 호인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좋을 수는 없는 법이고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에서와 같이 폭발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에서는 칼과 활을 잘 다루는 무인이기도 하였으니 야곱이 결국은 일을 낸 것입니다.

     

    이렇게 대책 없이 일을 벌인 결과로 쫓겨 가다시피 해서 길을 떠납니다. 그의 형 에서의 분노 앞에서는 그의 집도, 그의 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그 어디도 야곱이 기댈 언덕이 되지 못했습니다. 정말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사방팔방으로 꽉 막혀서 갈 곳이 없기에 야곱은 할 수 없이 부모와 집을 떠나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어머니 치마폭에 싸여서 음식이나 만들고 집안일이나 거들 줄 알았지,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야곱이었기에 그가 어두운 밤에 광야에서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을 잘 때 얼마나 두려워 떨었겠습니까?

     

    이런 그에게 하늘의 문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오는데 그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방팔방으로 길이 꽉 막힌 그의 앞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길이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시는데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의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3-15)는 실로 엄청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걸 보고 깜짝 놀라 잠이 깬 야곱의 신앙고백이 바로 17절입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꿈을 꾸며 하나님은 만났던 곳은 인적이 없는 거친 광야 브엘세바였습니다. 브엘세바 광야는 일교차가 심한 곳입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춥습니다. 그 속엔 사람도 없고 한밤의 추위를 피할만한 집도 없습니다. 광야에 서식하는 독사와 전갈 그리고 이리떼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곳에서 하늘의 문을 보았으며, 하늘의 길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길은 열릴 때가 있는가 하면 닫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문은 언제나 그 사랑하는 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축복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만약 눈에 보이는 물질에 연연했다면 집과 부모를 떠났겠습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의 유산을 엄청나게 물려받았고, 거기다가 창세기 26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의 아비 이삭이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아버지 집을 버리고 떠나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이삭이 죽을 때까지는 그래도 집에 붙어있어야 재산이라도 좀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야곱은 이런 눈에 보이는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떠나는 데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야곱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문을 여시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문이 닫히고 하늘의 문이 열릴 때 야곱의 인생도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첫째, 야곱이 이스라엘이 됩니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뜻이 후에는 “넘어 트리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만약 야곱이 그대로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갔다면 그는 틀림없이 사기꾼, 남을 올무에 걸려 넘어뜨리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야망에 불타는 인물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며 그의 별명처럼 남을 밀치고 넘어뜨리면서라도 그 야망 속에 살다가 죽을 그런 사람이죠. 그런데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하늘의 길로 나아갈 때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위대한 의미가 있고, 더 나아가 남을 넘어뜨리는 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쓸모없는 인생에서 쓸모 있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인생으로 바뀌는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둘째,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앞장서게 하셨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를 잇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의 부친 이삭은 평안한 삶을 누렸으나 야곱은 한 시도 편안했던 날이 없었습니다. 형의 미움을 받아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가서 살았고, 거기서도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외삼촌의 집에서 빠져나올 때에도 도망가다시피 해서 나왔습니다. 자녀들은 이복형제들끼리 서로 분란하며, 다투었고, 심지어는 형제들끼리의 분란 끝에 어린 요셉을 이국에 팔아버리기까지 하는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을 야곱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야곱의 가정을 보호하시고 마침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큰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고생을 했으나 넘어지지 않고 마침내 믿음의 명문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셋째, 언제나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을 보고 하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광야의 길이 있으나 그 광야가 그의 인생을 삼키지 못합니다. 야곱이 천신만고 끝에 외삼촌 라반을 속여서 많은 재물과 가족을 이끌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때 그의 형 에서가 그를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야곱이 그렇게 많은 재물과 가족을 얻었는데 이제 형님께서 자기를 죽이러 온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이 무슨 청청병력 같은 소리입니까? 십 수년이 지났고 잊을 때도 되었건만 자기를 잊지 아니하고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앞이 캄캄합니다. 이제는 죽은 것입니다. 끝장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로 씨름할 때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녹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죽일 마음이 사라지고 동생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잠언 16장 7절에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늘의 문을 보고, 하늘의 길을 보게 되는 것이 바로 브엘세바 같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입니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며 사방팔방이 막혀 있어 갈 곳을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삶에도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을 향한 길이 보이는 줄 믿습니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 믿고 기도하는 사람, 하늘을 보는 사람은 하늘의 문을 찾고 새로운 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문은 막힙니다. 동문도 북문도 남문도 서문도 막힙니다. 어떤 날 갑자기 건강의 문이 막히고,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가 하면 직장 문이 닫혀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모든 도움의 손길이 막혀 우리가 절망의 벼랑에 서게 됩니다. 앞길도, 뒷길도, 옆길도 다 막혔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이 하늘의 문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야곱에게 하늘의 문을 여시고 하늘의 길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사야도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사도 요한도 반모섬에서 귀향살이 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에 복을 주는 하늘의 문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이렇게 하늘의 문이 열리고 야곱과 같이 복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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