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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고린도전서 02:01-09/ 하나님의 지혜 [새벽]
  • 조회 수: 735, 2014.02.01 16:43:06
  • 오늘 본문 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또 4절에서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아니하고...” 비슷한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그는 왜 고린도교회 교인들 앞에서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의 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5절에 보니까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에 세상의 지혜, 세상의 말, 세상의 방법, 세상에서 경험한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시작했을 당시 그는 좀 기가 죽은 상태였습니다. 3절에 보니까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 이런 소심한 표현은 거칠 것 없었던 평소 사도 바울의 모습답지 않습니다. 그는 얼마나 거침이 없었습니까?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의 대선배인 사도 베드로조차도 야단칠 줄 알았던 배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찌하여 이렇게 기가 팍 껶여진 모습으로 고린도교회 교인들 앞에 서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악몽과도 같은 아덴에서의 그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아덴은 그리스의 아테네 도시를 말하는 거죠. 그리스 아테네 하면 학문의 도시이고, 그 당시는 학문 중에서도 철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알아주었습니다. 이렇게 세상 지혜로 무장된 아테네에 사도 바울도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잠간 사도행전 17장 16절부터 31절에 보면 나와 있고,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이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 지역으로 온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의 그의 사역의 결과는 그가 행한 모든 사역들 가운데서 최고의 실패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무장되어 있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세상의 지혜로 한 번 이겨보겠다고 나섰지만 그 결과는 실패, 낙담, 절망뿐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고린도지역으로 이동해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한대로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거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험을 가지고 다시는 믿음의 세계에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5절에 있는데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말하자면 우리 믿음의 세계는 사람의 지혜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리는 세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장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보면 “이 세상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야 믿음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란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은 소위 사람의 지혜라는 것에 대비시키기 위해 사도 바울이 만들어 낸 말입니다. 사실 사람의 지혜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말씀하면서 사람의 지혜라는 것을 잠간 설명하는데 ‘이 세상의 지혜,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의 지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지혜라는 것이 사실은 그것의 본질 자체가 지혜가 아니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왜 그게 어리석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의 지혜를 따라가다 보면 그 결과는 마귀의 짓이요,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지혜가 있다고 행하는 사람들 보십시오. 제 딴에는 뭐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의기양양으로 설쳐 되지만 그 결과가 어떻느냔 말입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고, 나라와 공동체를 결딴나게 하는 짓들만 골라서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걸 사람이 좋아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좋아하겠습니까? 마귀만 좋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이 마귀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만든 심히 아름답고, 지혜로운 천사 루시퍼, 계명성이 하나님보다 자신이 높아지기를 원하며 교만하여 타락했을 때부터 이 마귀로 말미암는 사람의 지혜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볼 때 이 사람의 지혜는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1절에서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눈에 보암직하고, 탐스러워 보일 뿐이지, 먹으면 탈이 나는 그런 선악과 같은 것입니다. 

    그에 반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은 잠언 1장 7절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데서 시작되고, 여기에서 시작되는 지혜는 선량하고, 참되고, 온유하고, 겸손하며, 그 결과가 사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마귀가 틈조차 탈 수 없는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결론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서 주시기로 예비하셨고,  이런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성령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란 말씀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그 삶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등교육을 받고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하다고 하더라도 그 삶의 결과가 나쁘면 그는 지혜롭지 못한 삶을 산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그 인생의 본질... 그가 어떤 지혜를 붙잡고 살아왔느냐 하는 것은 그의 삶 결과가 그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일생이 사람의 지혜를 붙잡고 살아왔다고 한다면 마귀의 열매로 귀결될 것이 뻔하고, 만약 그 일생이 하나님의 지혜를 붙잡고 살았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의의 열매요, 믿음의 열매요, 성령의 열매요, 천국의 열매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고 자신을 복되게 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영육 간에 성공인생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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