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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데살로니가전서 05:19-22/ 사순절에 챙겨야 할 신앙의 3요소 [주일낮]
  • 조회 수: 689, 2014.03.08 16:45:03
  • 지난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주일 전까지 각 주일을 빼고 40일이 채워질 때까지가 바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라는 의미는 40일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40일이 경건의 훈련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를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도 들 수 있습니다. 아마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만들어 낸 것도 성경의 이런 40일의 의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순절이 생겨난 것을 보면 부활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만약 부활주일을 그냥 하루만 지낸다면 그건 너무나 섭섭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능한 한 길게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부활.... 이런 의미를 생각하고자 이런 사순절 절기를 만들어 냈을 것으로 보고, 우리도 부활절을 기다리는 동안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깊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로서 먼저 이 사순절에 갖추어야 할 신앙의 3요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 예언, 착한 행실.... 이 세 가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을 생각할 때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본문에 의하여 이 3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19절에 말씀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회개와 중생, 거듭남, 성화의 과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원의 역사 이면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는 회개, 중생, 성화... 이런 전 과정을 성령의 역사로 인정합니다. 이런 의미가 있으니 성령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어떤 분들이 공적인 기도를 할 때 ‘우리에게 성령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는데 물론 그 기도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하지만 교리적으로는 틀린 기도입니다. 차라리 ‘성령충만을 주옵소서!’, ‘우리 삶을 성령으로 더욱 더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해 계시는데 그런 성령 하나님을 우리가 소멸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성령 하나님을 소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연약한 인간인 우리의 의지로 소멸할 수 있을 정도로 성령 하나님은 그렇게 연약한 분이십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비록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종류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고, 또 하나는 육신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바울은 육신을 좆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일들을 "육신의 열매"라고 불렀고, 성령을 좆아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들을 "성령의 열매"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16-23)."


    그러므로 예수를 믿은 후에도 육체의 욕심을 좆아 살면 여전히 육체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을 소멸한다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소멸한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스베누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불이나 등불을 꺼버린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한 것은 "성령을 떠나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는 한 번 성도들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은 결코 떠나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의 "성령을 소멸한다"는 말은 "불같이 일어나는 성령의 감동을 거부하여 차갑게 만들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성령은 성도들의 안에서 때로 어려운 사람을 돕도록 뜨겁게 감동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또는 기도하라고, 또는 용서하라고.... 이렇게 감동하죠. 그런데 이러한 경우에 성도들이 그 감동을 억누르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 감동은 식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의욕이 충만해 있다가 누가 한 번 기를 꺾어버리면 그만 의욕이 상실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의 불순종과 죄는 그 안에 계신 성령의 감동을 식게 만듭니다. 성령께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감동하실 때에 못 본 체하고 지나갈 수도 있고, 성령께서 전도할 마음을 주실 때에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감동하실 때에 음란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며, 또 정직하기를 원하는 성령의 뜻을 알고도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마음에 일어나던 성령의 감동은 식어지게 되고, 더 이상 성령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거나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아주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강하게 역사하도록 하려면 매일 매일 성령님이 감동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길이야 말로 우리를 성령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길이며, 거기에서 바로 능력 있는 삶이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20절에 보니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예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신구약 66권이 다 구비되어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하지만 신약시대에는 지금처럼 신구약 66권이 다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초대교회에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하신 것은 성령을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받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 의해 주어집니다. 신약시대의 예언자라고 할지라도 뭐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기를 누구든지 예언을 하려거든 순서에 따라 질서 있게 예언하라....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예언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자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남들 보다 더 많이, 더 큰 소리로 예언을 함으로 다른 교인들이 불편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을 다 엉터리 예언가다... 이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언을 하기는 하되 질서 있게 하라.... 어쨌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니까.... 무슨 의미냐 하면 사람을 보면 책망하고 싶은데 그 입에서 나오는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금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문제이지, 예언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언자 그 됨됨이를 보고 예언도 무시한단 말이죠. 이건 잘못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면 그 말씀을 존중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구약 창세기부터 욥기까지 읽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사순절에도 말씀을 많이 읽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삶의 진지한 태도를 일컫습니다. 에서를 생각해 봅시다. 에서는 성격이 대범합니다. 야곱의 말을 게의치 않습니다. 한 번은 야곱이 팥죽을 쏘는데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배가 고프단 말이죠. 그래서 동생이 쏘는 팥죽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뭐라고 합니까? 형님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라는 것입니다. 말이나 됩니까? 장자가 그 장자권을 판다고 팔아집니까? 아니죠. 그래서 에서는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까짓 것 판다고 팔아지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하라고 했죠. 그러면서 한 마디 더 덧붙였는지도 모르죠. 이를테면 그깟 장자권이 주린 배를 채워주기라도 하냐..? 그런데 결국은 이런 진지하지 못한 삶의 태도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야곱은 매사에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사소한 팥죽 한 그릇 가지고도 형님의 장자권을 노렸단 말이죠.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바로 삶에 대한 이런 진지하고, 진지하지 못함의 차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좀 치열해야 합니다. 좀 깐깐이 따져 보고, 생각해 보고... 이렇게 할 때 범사에 옳은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은 악을 흉내조차 내지 말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우리가 흔히 무늬만 아가씨다, 무늬만 교인이다, 무늬만 학생이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이 무엇이냐 실제로는 아가씨가 아니고, 아줌마다, 교인인 것 같지만 실제는 교인 아니다, 실제는 학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로 살펴보면 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악을 흉내 내는 것조차 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은 그 의미가 실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옳은 것을 택해야 하는데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옳은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판단하여 옳은 것을 택하고, 옳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실제로는 최고 보다는 차선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음은 언 그렇다, 겉은 이래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다... 는 식으로 합리화를 합니다. 나름대로 다 진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신앙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모양만 악이 아니라, 그 속도 악한 것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모양을 살짝만 비틀어 놓으니까 결국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흔히 악한 것은 처음부터 거창한 게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출발하여 가정과 그 인생을 뒤흔들만한 엄청난 죄로, 악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말은 매일 매 순간이 인생을 결정하는 선택의 순간이기 때문에 최선의 것을 선택하여 그 인생에 악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둘째 주간에는 성령충만과 말씀 충만으로 삶의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매일 매일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훈련을 통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흉내라도 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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