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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누가복음 07:36-50/ 신앙의 자세 [주일낮]
  • 조회 수: 626, 2014.03.15 16:13:52
  • 하루는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청하였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40절에 의하면 이름이 시몬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 시몬이 아니고 바리새인 시몬입니다. 흔히 식사에 초청을 하는 것은 존경심이나 친근함을 표현합니다. 누가 그랬다고 합니다.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 중에서 가려야 할 자리 중의 하나가 밥 먹는 자리라고 합니다. 아무 하고나 함부로 같이 밥을 먹다가는 무슨 낭패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나 밥자리를 같이 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하기는 하였으나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피해야 할 자리란 말입니다. 


    44절에 보면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집으로 초창하기는 하였으나 그에 합당한 예를 갖추어 모시지 않았습니다. 보통 이스라엘은 비가 부족하여 먼지가 풀풀 날리는 땅입니다. 그래서 외출하여 조금만 걷다가 집으로 돌아와도 발과 온 몸에 먼지가 묻습니다. 특별히 발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귀한 손님을 초청했을 때 집에 들어오기 전에 손과 발을 씻을 물을 제공합니다. 이게 그 당시 손님을 맞는 가정 예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모시면서 이런 가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44절에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 그러면 왜 그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했을까요? 짐작컨대 예수님에 대해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호의로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피기 위해서, 흠 잡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올무에 바지고, 낭패를 당하는 그런 자리에 예수님이 가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한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 발 뒤로 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그 흘린 눈물로 발을 씻기고, 그의 머리칼로 닦고, 그 위에 향유를 부어주었습니다.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도 했으나 예수님은 잠자코 계십니다. 참다못한 바리새인 시몬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군거리는 내용이 39절에 보니까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정말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아볼텐데... 이 여인이 누군지도 모르니까 저런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그냥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바리새인 시몬이 여인이 행한 일을 보고 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무시하고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집으로 들였는데 이는 큰 실례란 말입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꼼꼼히 정결의식을 행합니까? 장로의 유전까지도 다 기억하여 행하는 자들인데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이방인에게나 하는 그런 태도로 예수님을 맞았다는 뜻입니다. 자기는 이랬는데 아, 이 여인은 눈물로 발을 씻고, 그 귀한 머리칼로 젖은 발을 닦고, 옥합에 담긴 향유를 머리에 붓는 것은 아주 지나칠 정도로 극진한 대접이란 말입니다. 이걸 본 바리새인 시몬이 좀 무안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자기는 그렇게 안 했는데 마치 자기가 그렇게 안 한 것을 꾸짖기라도 하듯 여인이 극진히 씻고, 닦아주고, 향유를 뿌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안한 선한 일을 누가 하면 그걸 부끄러워하고 그 사람을 칭찬해주어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지 않은 선한 일, 좋은 일을 누가 하면 칭찬하기는커녕 오히려 비난합니다. 이렇게 비난을 해야 만이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합리화되거든요. 교회에서 열심히 일할 때 그 열심히 일하는 것을 누가 비난하느냐....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비난해요. 전도 열심히 하는 것을 누가 비난하느냐.... 불신자들은 비난하지 않아요. 오히려 수고가 많다고 하며 격려를 해 줍니다. 그런데 꼭 전도를 하지 않는 신자들이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보고 비난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정말 별나게 믿는다, 나처럼 좀 점잖게 신앙생활 하라고 하죠. 아마도 이런 심리로 바리새인 시몬이 여인을 비난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여인은 좀 오해를 살만한 그런 부분이 있었기는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모르는 여인이 남자에게 다가와 이렇게 해도 놀랄텐데 2천 년 전에 행한 이런 여인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수근거릴만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까 이 여인의 행동을 다 알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다른 사람은 다 오해해도 예수님은 이 여인의 진심을 알았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행실이 나쁜 창녀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 시몬이 이 연인이 행실이 나쁜 여자처럼 표현했고 37절에도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이라는 암시에서 행실이 좋지 못한 여인임을 표시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그 당시 알려진 죄인이라면 남자는 세리, 여자는 창녀...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런 여인인지라 그가 예수님에게 다가가니까 사람들이 당연히 오해를 하게 되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행동 속에 진실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았기에 그의 행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해하나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진심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시몬이 말한 바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한 말은 틀린 말이고, 예수님이 참 선지자요, 참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이 죄 많은 여인의 진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행한 태도에 대해서 한 가지 당연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왜 예수님을 초청했는가? 그렇게 푸대접하는 걸 보니까 호의적인 태도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초청했느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배의 자리에 오시는 분들 가운데서 왜 예배의 자리에 나왔을까 생각하게 하는 태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안 드리는 이 바리새인 시몬.... 이는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죄 많은 여인을 보십시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 행한 그의 행동이 과해 보이나 이는 상식적이 아니라 사랑, 은혜가 넘치기에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세련되게 드리기보다 열정을 다 해 드려야 합니다. 지난 목요일 가족끼리 박지혜 자매의 바이올린 독주를 들었습니다. 이 자매는 독일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훌륭한 바이얼리니스트가 되어 독일 정부 관리 하에 있는 세계 3대 명기의 하나인 바이얼린을 올해로 11년을 사용하도록 매년 허가받아 그걸 가지고 세계를 다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자매입니다. 저는 그의 연주를 보고 들으면서 마음이 치유 받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주 잘 아는 찬송들이지만 그의 연주하는 몸짓, 간증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말 주님을 열망하는 그런 간절함이 느껴졌습니다. 이때까지 그 어떤 연주자나 연예인의 간증 가운데서도 그런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연주도 훌륭했지만 연주하는 그 선율 너머로 표현되는 주님을 향한 사랑, 눈물과 열정.... 바로 이런 것이 이 죄 많은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죄 많은 여인은 그런 열정으로 주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않고는 이런 반응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지엄하신 분이십니까? 영광스럽기가 한량없으신 분이죠. 사도 요한은 그가 본 예수님의 발을 ‘빛나는 세마포 사이로 살짝 비치는 풀무에 단련하여 빛나는 청동’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빛나는 예수님의 발이 지금 이 세상에 내려와서 먼지가 묻고, 때가 타고, 각질이 생기고, 갈라지는.... 이런 초라한 발이 되었는데 이를 안다면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 발을 손수 씻어드리지 않겠습니까? 어찌 향이 나는 기름으로 그 발을 발라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신앙의 관점으로 볼 때 바리새인 시몬과 이 죄 많은 여인 중에서 과연 누가 지당하고, 누가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죄 많은 여인이 옳고, 백 번 지당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옳고, 지당한 것이 비상식적인 것이 되어 매도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죽은 종교, 죽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이 여인을 책망하는 것을 보십시오. 39절에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이 바리새인 시몬이 생각하기에는 예수님이 ‘어디서 더러운 여자가....’ 하면서 이 여인을 발로 차버려야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의 행동을 다 받아주니까 예수님이 엉큼하단 말이죠. 심지어는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 무슨 은밀한 관계가 벌써 맺어진 것이 아닌가.... 이런 억측까지 할 수 있겠죠.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서는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이 있다고 소설을 쓰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이시기에 이 죄 많은 여인의 행동을 바로 보신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행위요, 이것은 사랑의 행위요, 이것은 깨달음의 행위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윗처럼 염치, 체통을 불구하고 춤을 춥니다. 춤을 추다가 바지가 벗겨지고, 엉덩이가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게 개의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다윗의 고백 아닙니까? 성경 사무엘하 5장에 보면 하나님의 법궤를 아비멜렉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옮기면서 다윗이 너무 기뻐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아마도 기쁨에 겨워 너무 과해 바지가 내려가고 엉덩이가 보이고 말았습니다. 이걸 창문에서 내다보던 그의 아내 미갈이 다윗을 비난합니다. ‘왕의 체통도 모른 채 춤을 추다가 바지가 벗겨지는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느냐...’ 이렇게 비난하니까 다윗의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 보다 더 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더 과한들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왕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죠. 


    예수님은 이 본문을 통해 죄 많은 여인과 바리새인 시몬을 뚜렷이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그러셨습니다. 세리의 기도와 바리새인의 기도도 그러하셨습니다. 선한 사미리아인의 비유도 그러셨습니다. 이는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고 잘못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50데나리온 빚진 자로서 죄가 적고, 죄 많은 여인은 500데나리온 빚진 자로서 죄가 많은 여인이다... 예수님이 이런 의미로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한 쪽은 맞고, 한 쪽은 틀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바리새인 같은 태도, 죄 많은 여인의 태도... 이게 둘 다 용납되는 게 아니라 오직 죄 많은 여인의 태도.... 이 것 하나만 용납되는 것이고, 이 여인의 태도야말로 참된 예배자, 참된 구도자, 올바른 신앙의 길로 걸어가는 자의 자세임을 명백히 하려고 한 것입니다. 


    과연 이 바리새인 시몬, 그리고 죄 많은 여인.... 이 두 사람의 모습 중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바로 죄 많은 여인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이야 말로 살아 있는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기에,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그 큰 은혜를 알기에 이런 살아 있는 예배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살아있는 예배의 자세가 우리의 신앙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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