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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요한복음 13:31-38/ 잘못된 열정 [주일낮]
  • 조회 수: 911, 2014.03.29 14:12:24
  • 베드로라는 인물을 평가해 보면 요즘 말로 '상남자'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베드로는 의리의 남자이고, 성미가 급하고, 자심감으로 충만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주님과 나눈 대화에서도 이런 그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36-37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대화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식사를 겸한 교제의 자리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주시면서 떠남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베드로와 주님 간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앞서 33절에 보니까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렇게 떠남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울해집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떠남은 예사 떠남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죽음을 불사하는 어떤 고난의 길인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결사각오로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를 대견하게 여기며 따뜻한 격려의 말씀 한 마디라도 건네주시면 좀 좋겠는데 38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며 아주 기를 꺾어놓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베드로의 기를 꺾어놓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베드로가 언제나 자기의 열심을 내세우는 그런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제일 위험한 것이 자기 열심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뭘 해보겠다는 것은 참된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철저하게 내 것을 비운 후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잘못된 것, 내 삐뚤어진 인생을 철저하게 고쳐서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교만한 것, 내 자랑... 다 비우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신앙의 인물들을 보면 다 이런 과정을 거쳤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 초기에 관여하셔서 철저하게 자신들의 것을 비우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머물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불러내셨습니다.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게 했습니다. 야곱의 경우도 아비 이삭의 집을 떠나 십 수년간 타향살이를 하는 가운데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게 한 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셔서 쓰셨습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다 비우게 한 후, 다 고친 후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베드로의 자신감은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심하게 말하면 마귀적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니 베드로가 무엇이라 했으며,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또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21절에서부터 23절까지를 보면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을 걱정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라 인간의 열심으로 나설 때는 똑 같은 책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여러분... 내 기도가, 내 찬양이, 내가 하는 봉사가, 내가 교회에서 하는 일들을 향해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처럼 이렇게 책망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도 이런 책망을 들었는데 우리도 이런 책망을 들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이 말을 들을 때 어감이 굉장히 강해서 불쾌한데... 사실은 뭐, 특별히 악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도 들을 수 있는 책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도 신앙에 열심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죽이고, 감옥에 가둔 이 모든 것도 다 신앙적인 열정으로 그리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늘로부터 그런 음성을 들을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세상에 이 무슨 청천병력 같은 소리란 말입니까? 자기는 한 순간도 자신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자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자기를 향해 하나님을 핍박하는 자라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경험을 마음에 두고 로마서 10장 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잘못된 종교적 열정을 항해 이렇게 쓴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니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 잘못된 열심으로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마귀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자신감과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식의 자신감이 아니라 사도 바울 식의 자신감.... 말하자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자신감입니까! 이 자신감은 백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한 '주여, 제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주를 따라 가겠나이다!' 하는 이 자신감은 빵점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그 자신감의 근거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는 말씀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베드로... 네가 나를 좇아오겠다 하는 것은 모든 힘과 원리와 그 근거가  너 자신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에 나를 따라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충만케 되는 날이면 비로소 나를 따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 인간적인 열심을 볼 때 그것이 참인지? 그릇된 것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 7:21-2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자기는 열심히 살았다고 믿었는데 주님께서는 불법을 행한 자들아... 하고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분명히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 또한 눈에 나타나는 확실한 업적과 능력들을 보고서 만족해 왔었는데 주님의 판결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내게서 떠나가라!’는 청천병력 같은 심판인 것입니다. 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의 상상으로, 자기의 지식으로 주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모두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베드로가 열심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요, 책망을 면치 못했던 것처럼 육적인 열심은 조금은 대단한 것 같이 보이나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요, 책망을 면치 못하는 열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51:16-17절을 보십시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이 말씀에서 ‘번제’와 ‘통회하는 마음’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제사라는 것은 내가 제사를 드린다는 것 때문에 ' 내가 뭔가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 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상한 심령'이란 자기의 것, 자기 자신 때문에 좌절하는 마음입니다. 내 안에 신앙에 대한 열망은 있는데 그 길을 갈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법을 지키고 싶은데 실제는 사망의 법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상한 심령을 이렇게 표현했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랴!!!!" 이런 마음을 가질 때 마음이 상합니다. 이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고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싶은데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럴 심성이 없으며, 그럴 심보가 내 안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 마음입니다. 이게 상한 심령입니다. 이게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여기서부터 참된 신앙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보았던, 내가 상상했던 신을 디자인 하고,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꺼내 놓아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뭐 아름답고 대단한 것 같지만 기껏해야 하나님을 애굽에서 보아온 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열심으로 그렇게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세의 돌판으로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돌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렇게 우리가 뭘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기껏해야 금송아지 형상이나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것으로 뭔가를 만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에서부터 성물, 제사장의 옷에 이르기까지 크기, 모양, 색깔... 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성경이 말하는 교만이나 자만이니 하는 것은 세상의 지혜, 철학, 경험... 이런 것에 기초를 놓고서 그 위에다 신앙적인 무엇을 쌓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바벨탑처럼 다 무너져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배푸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코 우리의 것을 내세울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들이며, 은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을 내기 전에 주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며, 무엇을 만드시려고 하는가? 또한 나의 인생을 통하여 무슨 메시지를 펼치시려고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을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열심은 모두 다 헛발질에 불과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초기에는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호된 야단과 책망을 들었지만 전설에 의하면 그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힘으로 주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겠다고 뛰어나갔을 때에는 8시간도 채 버티지 못했던 것이 주님 앞에 거꾸러지며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다음에는 기꺼이 그를 죽는 자리까지 가도록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비우는 것이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에게 필요한 고백은 '나는 없어졌습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할렐루야! 진정 우리의 마음에서 이런 고백으로 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하늘의 보고를 열고 하늘의 온갖 능력과 부유함으로 우리 삶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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