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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누가복음 16:19-31/ 죽은 부자의 소원 [주일낮]
  • 조회 수: 671, 2014.04.19 18:50:43
  •   본문 말씀은 거지 나사로 이야기인데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기에 여러분들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더러는 소설로 소개되고 영화로도 소개되고 영어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의 유명한 말씀이죠. 이 말씀은 사람이면 누구나 예외가 없이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내세가 있으며 그리고 내세가 있기 때문에 살았을 때에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부활주일이니까 아침에는 부활의 메시지로, 또 부활에는 죽음이라는 문제가 빠질 수 없으니 오후에는 이 죽음의 문제를 이 본문으로 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그 거지가 죽어...’ 라고 하셨습니다. 또 22절에 ‘부자도  죽어...’ 라고 하셨죠. 사람이면 부자가 되었던 거지가 되었건 다 죽는다는 내용의 말씀인데... 그렇죠. 죽음 앞에서 인생은 구별이 없고 예외가 없습니다. 다만 죽는 방법이 다를 뿐이고 또 순서가 바뀌어 먼저 가기도 하고 나중에 가기도 하는 차이뿐이지 반드시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부자는 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제물에 취하고, 권력에 취하면 앞날에 대해서 아주 안하무인격으로 될 때가 있습니다. 이 부자도 보시면 돈이 많으니까 불안한 미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재벌처럼 이 부자도 돈으로 뇌물 삼아 환경도 바꾸고, 권력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죽음이란 웃기는 일입니다. 하나님, 웃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 아닙니까? 자기가 우습게 여긴다고 해서 죽음이 지나갑니까? 


    그러니 이 부자는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어쩌면 부자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 죽음의 문제를 회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자뿐만 아니라 불신앙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죽음 후에 대해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보면 신자들보다도 불신자들이 더 고집스럽게 무언가를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을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고집, 죽음 이후의 문제는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고집... 이런 게 어떻게 보면 신앙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성경의 표현은 아주 ‘잠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욥기 20장 5-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좀 우리가 같이 읽어야 합니다. 괜히 제가 지어낸 말인 줄 알거든요. 자 다 펴셨으면 함께 읽겠습니다.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이 부자도 자신의 즐거움이 잠깐 동안 있다가 지나갈 일장춘몽이요, 아주 짧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짧은 이 현세보다도 영원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구세군을 만든 윌리암 부스가 어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책에 쓴 적이 있었습니다. 런던에 살고 있던 이 가족은 예수님에 대해 알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였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너무나 적대적이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집 대문을 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가정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한 한 소녀가 이 집 아들이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집 대문 가까이 가서 잠시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그 안에서 아버지의 굵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애야 마음을 굳게 먹어라. 네가 혹 죽을는지 모르지만 죽음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단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평안한 잠속으로 빠져들 것인데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걸어갔던 인생의 끝이란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가 흐느끼며 말하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떠나는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가 내세의 가능성에 대해 다 알아보았지만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단다. 그저 편안하게 잠드는 거야.’ 조금 후에 그의 누나의 소리가 들립니다.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돼. 우리는 오래 전부터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잖아. 너 이제 곧 잠들게 될거야. 그것이 전부야. 그 사실을 꼭 붙잡도록 해!’ 그런데 죽어 가는 아들의 절망과 슬픔에 가득 찬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옵니다. ‘알겠어요. 하지만 내가 꼭 붙잡을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나는 암흑 속으로 들어갈텐데 암흑 속에서 내가 무엇을 붙잡을 수 있나요?’ 


       참으로 무책임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기계처럼 백 년 정도 살다가 기계가 마모되면 고물이 되어 쓰레기장으로 들어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체를 주신 것처럼 영혼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의 건너편까지 손을 잡아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의 손을 붙잡지 않은 사람은 죽음의 순간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손을 잡고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사실이 정말 희미하다면 이 시간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요한복음 14장 1-3절까지 기록되어 있죠.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몰랐던지, 아니면 의식적으로 부인했던지... 이 어리석은 부자도 드디어 죽어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생각하지 않았던 지옥,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지옥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여러분! 죽은 자도 소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 육체가 한 번 죽고, 거기서 끝났으면 좋겠는데 죽으면 다 없어진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그 후에는.....” 다시 말해서 “죽고 난 후에는...”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으로 어떤 인간도 이렇게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부정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까? 이 말씀이 틀렸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간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심판이 있다는 것을 큰 소리로 아니라고 말할 만큼 용기 있는 분은 말씀해 보십시오. 거지 나사로가 아니라 나름대로 한 세상 떵떵거리며 세상을 잘 살았다고 생각한 부자가 죽은 후에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잘 살았던 사람이 죽어서 무슨 무슨 소원이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거 한 번 해 보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 그러지 않습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들은 실수로라도 이런 소리, 이런 농담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어도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지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촌스럽게 여기던, 말도 안 되던 지옥... 혹시라도 지옥을 너무 과격하게 말하면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을법한 그 지옥... 이 지옥에 부자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본 지옥은 금세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25절에 보니까 부자는 금세에서 위로를 받고 내세에서 고민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삶의 상황이 확 바뀌고 말았습니다. 지옥은 이 세상 육신의 죽음에서부터 바로 시작된다는 것을 22-2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지옥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겁주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실제하며, 실제로 고통을 느끼며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장소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강도는 그가 죽인 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양심의 고통과 불의 뜨거움을 느끼는 곳이며, 투전꾼은 그가 속여먹은 자들을 생각하며 고통을 느끼는 곳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거부하고 지옥 간 사람들은 영원히 그때 믿어둘걸 하며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아주 기억이 생생한 장소.... 그래서 그 부자가 나사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지옥은 천국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23절에 말씀합니다. 천국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부자를 더욱 괴롭게 하겠죠. 자기가 거처하는 곳과 비교되지 않는 천국을 보면서 영원한 분노와 억울함으로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다를 것입니다. 천국에 있던 나사로가 이 부자 보고 한 마디도 거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이 지옥을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착한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니 지옥을 보면 불행해집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보면 괴로울 것입니다. 당장 자기하고 맞바꾸자고 할지도 모릅니다. 착한 사람은 할 수 없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도 너무 착한 사람을 보면 복장이 터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린 만화를 보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강을 건너도록 되어 있고 그 강물을 마시게 되면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다 지워지게끔 되어 있다는 내용으로 만화를 그렸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는 요단강을 건너서 하늘의 시온성으로 입성한다고 하는데 그 요단강물을 마심으로 이 세상에서의 모든 기억들이 사라지는지.... 어쨌든 천국이란 행복한 곳, 즐거운 곳이 되어야 하니까 과거의 불행들은 다 지워버려야 하겠죠. 그 뿐만 아니라 지옥도 보지 못하도록 해야 하겠죠. 흔히 부자들은 이 땅에서도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사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싫으니까 진짜 담을 얼마나 높게 쌓고 사는지.... 천국을 누리는데 지장이 잇기 때문에 그러는 것처럼 진짜 천국도 지옥은 보지 못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입장을 바꿀 기회가 있으나 지옥에서는 입장을 바꿀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지옥에서는 하나님 믿겠다고 해도 허락이 안 됩니다. 다 이 세상에서 결정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또한 지옥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 가는 곳이며 죄를 뉘우치지 않은 자들이 가는 끔찍한 곳이며 도무지 탈출할 수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퇴원할 날을 기다리고, 형무소에 들어간 사람도 퇴소할 날을 기다리며 소망을 갖지만 지옥에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고통만 계속되는 곳입니다. 또한 지옥은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지만 이는 대단히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지옥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생생하게... 또 영원히 맛보는 곳입니다. 의식을 가지고 끝없이 맛보는 고통의 장소가 지옥입니다. 24절에 보니까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지옥에 대해 묘사할 때 꺼지지 않는 불, 유황불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다 고통의 상징이며 이런 상태에서도 벌레 한 마리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용암이 들꿇고 엄청난 불이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이 불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옥불을 만들지 못하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는 지옥을 그저 웃음으로 넘길 수 있지만 죽어서 지옥은 심각한 곳입니다. 부자가 불속에서 고통당하고 있었던 것처럼 지옥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들을 위해 준비된 장소임을 믿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지옥은 모든 사람이 쉽게 가고, 천국은 그렇다면 아주 어렵게 들어가는 곳입니까? 아니죠. 천국도 가기 쉬운 곳이었는데 부자는 몰랐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도 간 곳입니다.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나사로가 갔는데 세상에서 큰소리친 부자는 왜 못 갔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생을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이걸 부자가 지옥에 떨어져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부자에게 소원이 생긴 것 아닙니까? 자기가 와서 보니까 도무지 자기는 이 지옥을 벗어날 길이 없으니까 아직 이 지옥에 오지 않은 가족들, 형제들만이라도 이 지옥에는 오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생각으로 아브라함에게 소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자기 자식들 이야기는 없고 형제들 이야기만 할까요? 제가 생각해 볼 때에는 우선 어른들부터 믿어야 어린 자녀들도 믿게 된다는 거죠. 반대로 자녀들이 믿어 어른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면 큰일 나죠. 아마 이런 이치에서 형제들부터 먼저 전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어른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설득하고, 안 되면 어른의 권위라도 동원하여 억지로라도 예수 믿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어른들이 자녀들을 다 방치합니다. 저는 답답해요. 불의의 길을 가고, 불신앙의 길을 가는데 그저 멍 하게 바라만 보고, 방치하고 있단 말이죠. 그래도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요즘 아이들이 듣냐’ 하는 거죠. 그러나 듣지 않아도 해야죠. 말로 안 되면 때려서라도 해야죠. 자녀들에게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해야죠. 그게 신앙의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가요? 신앙에는 인권, 민주주의... 이런 거 없습니다. 배가 불러야 민주주의도 있죠.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거기에 민주주의도 있고, 인권도 있는 거죠. 다 죽어가는데 무슨 인권, 무슨 민주주의가 있습니까? 너무 과격하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이 부자의 소원은 죽은 나사로가 다시 세상에 가서라도 좀 자기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어떻게 소원이 이렇게 싹 바뀝니까? 철이 들면 이렇게 소원이 바뀌는 줄 믿습니다. 철들기 전에는 제물, 출세, 권력, 명예... 이런 것 달라고 기도하지만 철이 들면 ‘죽을 이 죄인 살려주십사, 죽어가는 내 새끼, 내 형제, 내 이웃 살려주십사...’ 이렇게 소원이 바뀌어 집니다. 여러분! 죽어서 소원이 바뀌지 말고 살아서 소원이 바뀌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어서 가지게 되는 소원... 모두 다 허방입니다. 죽어서 부자가 가진 소원...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소원은 죽은 자나 산 자가 다 가질 수 있으나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축복은 오직 산 자들만의 특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발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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