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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요한복음 11:17-27/ 절망을 이긴 부활의 능력 [절기]
  • 조회 수: 1115, 2014.04.19 18:52:13
  •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여 나오신 주님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의 2대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 밤 9시 뉴스를 보시면 개신교와 캐톨릭의 부활절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각 종교의 지도자의 부활절 메시지도 잠간 들려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절이 우리 마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으로서는 받아드리기 힘듭니다. 

    세상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셔서 아주 유능한 공학도로 대접을 받으며 사셨던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40대 중반 늦은 나이에 목사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평신도로 사셨습니다. 목사의 아들이어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는데 이 부활이 믿어지지 않아서 교인이기는 하되 그저 형식적인 교인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소그룹 공부 모임에서 어떤 교인이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듣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도 부활이 믿어지지 않았는데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이란 내가 이해되어짐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으로 받아드릴 때 그 때부터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증거해주심으로 신앙의 길이 보여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부활도 내가 이해하는 것보다도 내가 그냥 마음으로 받아드리니까 그 때부터 믿어지고 그 후로부터는 한 번도 부활을 의심해본 적이 없노라.... 이런 고백을 듣고 깨달아 이 목사님도 그때부터 부활을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신앙에 힘이 생기고, 그것도 너무 뜨거워지니까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목사가 됐다는 거죠. 아마도 다 부활을 믿으시겠지만 이 부활이 믿어지는 것 자체가 이 부활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인줄 믿습니다. 부활절인 오늘.... 베다니 동네의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이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부활의 의미와 축복을 대새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오늘 본문은 사실 요한복음 전체를 다 읽어야 하는데 시간 관계상 일부분만 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며 사역을 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나사로의 위독함을 전해주었습니다. 나사로의 집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유하신 후에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나사로의 위독함을 듣고도 예수님이 지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쉽게 대답하자면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나사로의 가정에 각별한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나사로의 집에서 머물곤 하셨습니다. 요즘 선교사님들이 잠간 귀국하면 머물 때가 없어서 곤란을 겪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숙소, 안식관..등을 교회와 교단 차원에서 마련하기도 합니다. 나사로의 집은 예수님에게 이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기만 하면 기꺼이 집을 내드리는 헌신된 가정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마리아는 2절에 보니까 옥합 향유를 쏟아 붙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헌신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온갖 재료와 솜씨를 발휘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열성 팬입니다. 두 자매 모두 다 예수님을 극진히 모시는 열혈 팬들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 모두를 다 사랑하셨습니다. 이렇게 각별한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느긋하게 이틀씩이나 지체하다가 나사로가 죽은 뒤에야... 그것도 장례가 다 끝난 뒤에야 찾아갔을까요?
        
    그래서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안색이 예수님을 향하여 별로 좋지 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 못해 예수님과 말은 나누지만 내심 원망이 가득찬 표정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헌신적이었는데 그럴 수가 있나. 통보를 받았으면 만사를 재쳐두고 달려오셔야지. 그게 인지상정 아닌가? 장례식까지 다 끝난 뒤 오시니... 이제 뭣하러 오시냐?" 반드시 그랬는지는 몰라도 뭐 이런 원망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인 이상 이런 원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은근히 원망이 깔려있는 한 마디 말을 예수님께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도 32절에 똑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지체하신 이유를 잘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하기에는 좀 뭔지 모르게 2프로 정도가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나 다만 무슨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주일 욥의 고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욥의 고난은 합리적입니까? 욥처럼 착하고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이 동방에는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풍랑에 휩싸였습니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해도, 이해하지 못해도, 믿고,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그 무덤 앞에서 마리아가 우는 모습과 또 그와 함께 하는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35절에 보니까 나사로의 무덤을 본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은 딱 두 번 나타납니다. 한 번은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앞으로 예루살렘이 당할 일을 생각하시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 앞으로 다가올 환란 때문인데 그 사실이 누가복음 19장 41절 이하에 다 나와 있습니다. 아마 AD 70년 예루살렘이 무너질 일, 그 성의 운명을 생각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애국의 눈물이요,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눈물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한 개인의 연약함, 한계.... 이런 불쌍한 운명을 생각해 볼 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이 인생.... 이 인생이란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까? 화무십일홍.... 꽃은 피었다가 열흘도 못되어 시들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인생이 기껏 해봐야 이런 꽃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잠깐 피었다가 지는 아침 안개처럼 허무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욥은 이 허무한 인생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고난의 불꽃이 하늘로 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꽃이 하늘로 튄다고 표현하는데 나무를 때다 보면 불꽃이 탁탁 튀면서 하늘에 올라갑니다. 올라가는가 싶으면 금방 사라집니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고난의 불꽃이라고 하였습니다. 환희의 불꽃... 이래도 시원찮을 판에 고난의 불꽃이라 그랬어요. 잠간 불꽃처럼 사는 인생인데 그것도 고난으로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으며, 이런 인생에 무어 그리 자랑할 거리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연약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생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연약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이 죽음.... 지금 예수님은 죽음 앞에 무기력하게 울고 있는 인생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안겨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인간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이 가족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39절에 예수님이 명하십니다. "돌을 옮겨놓으라!" 예수님 왜에 누가 감히 이런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둔 굴을 큰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큰 돌도 다 굴려졌단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 길을 가로막는 그 어떤 큰 돌이 가로놓여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 한 마디이면 그 돌도 사라지고 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홍해의 물을 가르신 하나님은 무덤의 돌도 열게 하시고, 우리 인생의 거친돌, 막힌 돌 다 뽑아내고, 걷어내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능력을 모르는 마르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시신이 썩어 냄세가 난다'고 하며 예수님을 만류합니다. 죽으면 하루가 지나든, 나흘이 지나든, 아니면 100일이 지나든 무슨 상관입니까?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죽은지 3일까지는 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육체를 빠져나간 영혼이 3일까지는 미련 때문에 시신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3일까지는 그래도 예의상 살 가망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믿는다기 보다는 미련 때문에 시신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을 위로해주기 위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3일장 문화가 생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흘이 지났다면 끝입니다. 그 영혼마저 포기한 시신입니다. 뭘 기대할 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흘이란 말은 죽음에 대한 절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이고, 나흘리고, 심지어 100일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죽으을 이기고 부활함을 믿습니다. 내세의 부활 뿐만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면 이 나흘이라고 하는 절망도 아무 의미가 없는 줄 믿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저와 여러분의 삶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40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책망하는 듯한 느낌까지 듭니다. "너는 그동안 내가 행한 그 숫한 기적의 일들을 보아왔으면서도 나흘이란 말로 내 능력을 제한하느냐?" 이런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40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할렐루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세의 부활은 믿는다고 하면서 현세적인 부활은 믿지 못합니다. 마르다가 그랬습니다. 23절에 예수님게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살것이라고 말씀하지만 24절에 마르다가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아나이다" 이 말씀은 주님이 들으실 때 참 기가 찬 말씀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부인하지 않으면서 현세적인 믿음은 싹 피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절을 맞으면서 다시 한 번 부활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믿느냐 하면 다 믿는다 그럽니다. 이 대답은 참으로 쉽습니다. 내가 아직 책임질만한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죽어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부활을 믇느냐 물어보면 마르다처럼 애매모호하게 피해갑니다. 교리를 대고, 합리성을 들고.... 이러면서 이 나흘이라는 합리적인 한계선을 딱 그어놓고 예수 부활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이는 참 부활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합니다. 함께 읽으실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의 삶에 현세적인 부활의 능력을 가록막는 이 나흘의 절망, 이 한계선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기는 고치실 수 있으나 다른 중병은 고치실 수 없다거나, 다른 중병은 고치실 수 있으시나 죽고 난 다음에는 끝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이런 한계를 그어놓는 그 자체가 불신앙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부활의 능력을 보지 못하게 하는 신앙의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신앙을 조장하는 이 나흘이라는 인간의 한계선을 극복하고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실 때 아멘으로 큰 소리로 대답할 수 잇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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