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신약 요한복음 21:15-23/ 참된 회개와 치유 [주일낮]
  • 조회 수: 557, 2014.04.26 19:43:49
  •  오늘은 참된 회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그만 하늘로 올라가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자, 이제 내 역할이 끝났으니 하늘로 가자.... 이렇게 무심하게 하늘로 가 버리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몸으로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면서 하신 일들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를 비롯한 7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특별히 시몬 베드로를 위로해주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그의 인생에 진정한 턴닝 포인트가 되게 한 사건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난 것도 중요하지만 이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진정한 사도 베드로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베드로와 같은 신앙의 단계를 경험합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그를 둘러싼 환경적인 변화가 일어났기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인정하셨고, 칭찬도 들었지만, 야단도 얼마나 많이 맞았습니까? 심지어는 사탄이라고까지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가야바 앞에 끌려가셨을 때에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세 번 주님을 부인하셨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릴 때에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한 번의 거짓말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을 3번이나 반복하여 확인해주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의리의 인간,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베드로로서는 이 사실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실수입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서 3년을 따라 다녔지만 그의 삶이 완전히 변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교회로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이 부활신앙으로 내 생애를 직접적으로 만져주심이 없다면 갈수록 종교성에는 익숙해지겠지만 여전히 베드로와 같이 혼돈의 인간,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약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만져주시고, 용서하시고, 사명을 주셔서 새롭게 세워주실 때 우리는 변화된 베드로처럼 놀라운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활절을 보낸 우리에게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만지시면서 위로하시고, 용서하시고, 새로운 사명의 길로 세워주신 것 같이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우리 모두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길 소원하는 것입니다. 


    1.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베드로에게 3번 묻는 주님의 마음, 그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세 번의 의미는 주님께서 베드로가 주님을 3번 부인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이 3번이라는 것은 사실 숫자로 볼 때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충분한 수입니다. 율법이 어떤 죄인을 추궁할 때에는 두 세 증인을 반드시 세우라고 한 것에서 볼 때 이 3이라는 숫자는 어떤 사실을 증명할 때 필요충분조건입니다. 3번이 넘어가면 3번이나 100번이나 똑같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3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그 벌로 3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는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 것 같이 내가 이제 3번 네게 같은 말을 묻겠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3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에게 얼마나 양심을 찌르는 아픔이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의리를 자랑했던 베드로,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베드로.... 이런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의 질문에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할 때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럴 때 주님이 하실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네가 그렇게 나를 배반한 거니?”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창피하고, 부끄럽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얼버무리듯 대답하고 빨리 지나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얼버무리듯 넘어가시지 않죠.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네가 그렇게 나를 배반한 거니?” 라고 묻는 대신에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같은 질문을 철저하게 두 번이나 묻고 또 묻습니다. 


    저는 이것이 베드로를 회개하게 하시는 주님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죄에 대해서 보복하여 육체를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아프게 함으로써 철저하게 뉘우치게 하고 다시는 주님을 배반하지 못하도록 뼈 속 깊이 새기게 하죠. 그렇게 해서 주님을 위한 진정한 일꾼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가장 효과적인 주님만의 응징방식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들을 돌이켜 회개시키는 주님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주님이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징표이며, 따라서 이런 회개에는 베드로처럼 뼛속 깊이 새겨지는 아픔과 부끄러움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만이 사람을 그 죄로부터 보호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시켜서 사명을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바로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서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의 내용들이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2. 그 다음 말씀은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사명자의 모습으로 서게 될지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18절과 19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스스로 띠 띤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옷을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옷을 입는다는 말이죠. 옛날 옷은 통체로 누빈 옷들이라 헐렁한 겉옷을 두른 후에는 이 옷을 단정하게 하기 위해 띠로 옷을 동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띠를 띤다는 것은 옷을 입는다는 표현이 되기도 하고.... 또 이 띠는 멋도 내잖아요. 멋진 색깔, 멋진 디자인, 멋진 재료... 이런 것을 가지고 멋을 내죠. 유행을 많이 타는 그런 아이템입니다. 따라서 이 말의 뜻은 젊었을 때에는 마음대로 옷을 입고, 멋도 내고, 자기 잘난 모습으로 세상에 돌아다녔으나....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랬어요. 단순히 늙어서 힘이 없어서 누가 옷을 입혀주는 그런 모습처럼 비쳐지는데 사실은 그런 의미보다 여기서 말하는 띠는 앞에서 말하는 띠하고는 이제 약간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냥 단순한 띠가 아니라 자기의 직분, 신분... 이런 것들을 옷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속뜻은 이제는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원하는 길을 가며 자기를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님을 위한 인생, 다른 사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철저하게 이타적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예언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는 주님의 이런 예언적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성경에 직접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베드로도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주님처럼 죽을 수가 없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된 베드로가 평생토록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다가 그렇게 장렬하게 순교했습니다. 


    참 이런 대단한 변화의 인생길을 걸어간 베드로이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것이 베드로가 원해서 된 것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9절에 보면 "원하지 않는..."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명자로, 사역자로 나선 뒤에도 여전히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뭐 우리는 사역자라서 대단한 줄 알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니까, 사도 바울이니까... 아니면 구약의 엘리야니까... 그렇지 않겠느냐... 하지만 사실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인물이죠. 그 분들도 배가 고팠고, 피곤했고, 좋아하는 것도 있었고, 싫어하는 것도 있었고...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5장 17절에 보면 엘리야에 대해서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런 성경의 인물들이라고 해서 뭐 대단히 초월적인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들도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이 있고, 또 하고 싶지 않은 일,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치 않는다고 해도 주님이 밀어내시니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니까 원치 않는 띠를 띠고, 억지로 옷을 입고, 억지로 가야하고, 뭔가를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역자의 길입니다. 그래서 사역자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게 하시니까, 주님이 밀어내니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한다면 마냥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때로는 원치 않는 일도 해야 하고, 원치 않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니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 속에서 묵묵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괜히 옆에 있는 사도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께 물어보다가 큰 무안을 당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앞으로 이런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데.... 베드로는 옆에 있는 사도 요한이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묻습니다. 21절에 보니까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상당히 무안을 주는 말씀이죠. 베드로는 자기가 그렇게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요한도 자기 못지않게 고난의 길을 간다는 대답을 들어야 뭔가 위안이 될 터인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아주 퉁명스럽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남아 있을지라도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그렇게 어려운 고난의 길을 가고, 요한은 그렇게 오래 살면서 영화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너에게 무슨 상관이냐... 라는 투입니다. 인간적으로 들으면 참 섭섭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건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함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역의 특징, 사역의 내용, 그 결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 것을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절대로 사람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상처입기 쉽고, 실족하기 쉽습니다. 이건 신앙의 길 뿐만 아니죠. 오늘날 사람들이 경험하는 행, 불행들 중에서 다른 사람을 바라봄으로 생기는 것들이 아주 많아요. 좀 심하게 말하면 대부분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나의 인생이,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냐는 거예요. 이건 자존감의 상실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명심해서 들어야 할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이 결국은 주님을 부인하면서 생기는 것이거든요. 어떤 때는 무의식적으로 죄를 짓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처럼 아주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이죠. 이럴 때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베드로처럼, 다른 제자들처럼 디베랴 바닷가로 가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실 주님이 아니시기에 주님께서 직접 디베랴 바닷가에 가셔서 베드로를 만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만져주셔서 지난날을 부끄럽게 하시고, 새롭게 결단하게 하셔서 새 사명의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베드로를 찾으신 주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희 모두를 찾으시사 우리 심령을 만져주시고, 그동안의 우리의 삶을 회개케 하시고, 새롭게 세워주시는 큰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댓글 0 ...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4012
2103 새벽 344
2102 새벽 386
2101 새벽 507
2100 새벽 696
2099 새벽 297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