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고 그 가정의 달 중 첫 째 주일이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날은 원래 어린이주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22년에 방정환 선생에 의해서 어린이날이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데 처음에는 5월 1일이 되었다가 1927년부터서는 무조건 5월 첫째 주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린이날이라고 해 봐야 그 행사가 미미했고 교회 안에서만 어린이날이 대대적으로 지켜졌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방정환 선생이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색동회라는 것을 조직해서 어린이날을 많이 홍보했으나 별로 신통치 않았고 오히려 교회 주일학교를 통해 이 어린이날이 대대적으로 지켜졌기 때문에 결국은 5월 첫째 주일을 어린이 날로 변경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 1946년서부터는 5월 5일로 바꾸어 국가적으로 어린이날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방정환씨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천도교 신자였죠. 천도교 교주가 손병희 씨인데 이 손병희 씨의 사위가 바로 방정환 선생입니다. 이 방정환 선생이 일본에서 어린이날을 가지고 왔는데 사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어린이 모임이 가장 활발했던 것이 교회 주일학교입니다. 교회의 이 주일학교와 어린이날이 잘 만나 우리나라에 어린이날을 정착시키게 된 개기라고 저는 믿습니다. 일본식민지 시대부터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국가나 개인이나 참 가난한 시대였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해 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선진국으로부터 많은 물적 지원을 받았고 또한 모든 교육 시스템이 교회로부터 시작되어 사회로 흘러나갔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로 많은 어린이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만큼 어린이들은 교회 주일학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 주일학교가 점점 약해져 가니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잘 양육할 것인가에 대해서 삼손의 부모님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자녀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는 남녀가 결합하여 자녀를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자녀는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걸 ‘천륜’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천륜을 사전적인 의미로 표현해 보면 “부모와 자식 간에 하늘의 인연으로 정하여져 있는 사회적, 혈연적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하늘이 맺어준 것으로 이는 어떤 조건 하에서도 저버릴 수 없는 것으로 못 박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부모와 자녀 간의 이 관계를 어찌 사사롭게 다룰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자녀.... 이걸 생각해 볼 때 부모로서 자녀에 대해 가지는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번씩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하여 외국에 입양된 자녀들이 잘 자라나 미스컴에 오르내리게 될 때 우리는 그걸 보고 감동을 받습니다. 특별히 장애가 심해서 부모마저 버린 고아들이 외국의 좋은 부모를 만나 아름답게 성장한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어떤 경우는 정신장애가 심한 아이를 둘씩이나 입양하여 고생하며 키우면서도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양부모들을 보면 저 부부는 틀림없는 천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은 그들이 어릴 때부터 자녀를 대하는 성경적인 관점이 생활 속에 녹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성경적인 가치관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부모로서 자녀를 함부로 대하는 죄를 범치는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127편 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이요, 상급이라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신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인물들은 자녀들을 생각할 때마다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기업과 상급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많은 사람들일수록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특별히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선 자녀들은 전통에 가득 찬 화살과 같아서 그의 부모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습니다. 자녀들이 많은 부모들은 수치를 당치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반면에 자녀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 태의 문을 닫으셨기 때문으로 알았습니다. 창세기 30장 22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라고 표현한 것에서 보듯 자녀를 출산케 하는 태의 문은 하나님이 열고 닫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삼손의 어머니의 태도 하나님이 여셨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태를 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나온 모든 어머니들의 태도 하나님이 여신 줄로 믿습니다. 그냥 우리의 노력으로, 우연히 나온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보다 우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부모들도 자녀들을 하나님이 내리신 기업과 상급으로 알아 자녀들을 볼 때마다 감사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의 자녀들로 키워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야 후에 우리가 자녀들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할 것입니다.
둘째, 자녀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보내실 때에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보내셨겠나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삼손의 부모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서 삼손이라는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계시하면서 5절에 보면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삼손이 이 땅에 태어나는 목적에 대해서 예시해주시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삼손을 이 땅에 보내는 목적이지만 하나님이 무슨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우리 자녀들을 보내셨는가... 속으로 깊이 생각해보는 심정으로 5절을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삼손과 같이 장차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예시를 받은 인물들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야곱도 그랬고, 사무엘도 그랬고, 세례요한도 그랬고, 우리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마리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인물들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평범한 우리 자녀들에게 그런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별로 우리 아이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위대한 인물들만 뜻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평범한 우리 자녀는 아무 의미 없이 막 보내주셨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이것은 상당한 불신앙입니다. 마리아는 평범하지 않았습니까? 마노아는 평범하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다 평범한 한 가정이요, 한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요점은 삼손이 이 세상에 보내질 때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는데 우리 자녀 한 아이, 한 아이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하신 뜻을 우리 자녀들이 이루며 살아갈 때 우리 자녀도 행복하고, 우리 사회와 교회가 행복해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냥 이 땅에서 평안하게 먹고 살기만을 바라는 그런 생각으로만 우리 자녀들을 키우면 소망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키워야 성공적인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오늘날 우리가 해야만 하는 아주 절실한 질문을 한 가지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 12절을 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마노아가 하나님께 드린 이 질문은 이 시대 모든 부모님들이 집에다 써 붙이고 매일의 기도 때마다 하나님께 물어야 할 질문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 부모들은 이 질문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요?
오늘날 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자녀들을 잘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책들을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들을 사서 읽어보면 사회학적인 접근, 심리학적인 조건, 교육학적인 조건.... 이런 것들을 어려운 단어를 섞어가면서 나열해 놓는단 말이죠. 그런데 이런 책들을 사서 거기에 무슨 자녀교육에 대한 해답이 있는가 하고 들여다보는데 사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한 통계에 의하면 자녀교육 전문가는 자녀교육에 대해서 이리저리 가르치러 다닌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녀교육은 빵점짜리 부모였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부상담 전문가들은 부부 상담하러 다닌다면서 자기 부부관계는 전혀 돌보지 않아 정작 이혼을 했다든지, 아니면 이혼 직전까지 몰려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차라리 밭에서 일하는 가난한 시골 촌부가 1등 교육 전문가가 아니냔 말이죠.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어떻게 자녀를 키워야 할까? 이 질문은 인간에게 해야 할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 할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노아가 이렇게 물으니 하나님게서 답을 주시는 것을 봅니다.
저는 구태의연하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도하라, 말씀을 가르쳐라... 신앙교육을 똑바로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 키워라.... 등등 판에 박힌 많은 말들을 쏟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녀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는 이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녀를 위해 묻고, 상담하고, 깊이 생각해보는 가운데 우리 부모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키워 가신다는 이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아이 중에서 운동을 하는 둘째 아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 엄마가 술, 담배 조심할 것에 대해서 얼마나 경고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군에 같다오고 난 지금 대학교 3학년까지 술, 담배를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혹시라도 담배를 피우면서 철저하게 담배냄새를 없애고 들어오는지는 몰라도...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 아이가 그래요. 학교에 가 보니까 자기 스스로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는 아이 가운데 너무나도 많은 아이들이 술과 담배를 한데요. 심지어는 수요일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아이도 담배를 태운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수요예배를 참석할 정도면 보통 열심인 아이가 아니죠. 그런데 담배를 태우는 모습을 보고는 우리 아이가 놀랐어요. 이런 이야기들을 집에 와서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집에서 신앙의 모범생이 반드시 밖에서 모범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까지 다 지켜보고, 통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가르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기도하게 하시며, 말씀하게 하시며, 예배하게 하시며, 신앙으로 자라도록 지도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같이 한 번 따라 합시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이런 질문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우리 부모님들의 입에서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올 때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항도교회,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회와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