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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누가복음 01:57-66/ 내일에 대한 기대 [주일낮]
  • 조회 수: 660, 2014.06.04 14:55:58
  • 세례 요한이 출생하던 날에 이웃과 친족들이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너무나 늙어 자식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임신을 하게 하시고 마침내 아들을 자연분만을 통해서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이 노부부에게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늦둥이를 낳아도 기쁜데 인생의 황혼에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래서 이웃과 친족들이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57-58)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공동체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감격해 하고 함께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없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2:15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세례요한이 태어남을 인하여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인해서도 함께 즐거워했겠지만 그들이 정말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긍휼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레사벳에게 베푸신 크신 긍휼하심 때문에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웃에게 베푸신 크신 긍휼하심 때문에 함께 기뻐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지 않으시고 우리의 행한 대로 심판하셨다면 지금 여기 멀쩡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눈이 범죄할 때 마다 눈을 뽑으시고, 발이 범죄할 때 마다 발목을 비트시고 생각으로 범죄할 때마다 우리의 머리털을 하나씩 뽑으셨다면 과연 몇 개의 머리털이 남아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다면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의 유기적인 생명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것이 교회 안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교회 안에 예배를 드리는 자는 많은데 꼭 도서관에 자기의 공부를 하기 위해 각각 앉아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도서관에 가 보세요. 조금 늦게 가면 자리가 없어요. 그런데 거기 앉아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은 공무원 시험 준비하느라 바쁘고, 어떤 사람은 고시공부 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어떤 학생은 잠을 자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 공간에 함께 앉아 있지만 생각이 다릅니다. 거기 앉아 있는 이유가 다릅니다. 한 지체가 아닙니다. 서로 경쟁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렇게 되면 안 되겠지요. 교회는 한 몸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 기쁨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수태하지 못할 때 마음 아파했던 사람들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을 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을 낳았을 때 기뻐했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고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까? 함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며 기뻐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다른 형제의 고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십시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를 바라보며 간절히 간구해 보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응답되어 임신을 하게 되었다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며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 "(59-63) 이제 아기가 태어 난지 8일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태어 난지 8일이 되면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아이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모든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기의 이름을 사가랴 라고 부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강력하게 요한으로 하자고 주장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당시의 풍습을 거스리는 행위입니다. 당시의 전통은 친족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족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요한으로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은 전통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61절) 며 반박했습니다. 친족 중 아무도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없는데 어떻게 요한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하지만 엘리사벳은 자기의 주장을 꺽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그 아이의 이름은 요한으로 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아버지 사가랴에게 물어 보기로 했습니다.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위에 '그 이름은 요한이라"라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에 이어서 아버지마저 동일하게 '요한'이라 한 것입니다. 어떻게 두 사람의 대답이 똑같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때때로 사람의 전통이나 관습을 거스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들의 관습에 의하면 친족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어야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관습과 전통이 아닌 요한으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통도 중요합니다. 관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 전통과 관습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수백년동안 지켜온 전통과 관습을 거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전통보다도 하나님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전통과 관습을 거스리시면서까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통은 좋은 것이나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통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64절) 사가랴가 "그 이름은 요한이다"라고 쓰는 순간 일 년 가까이 벙어리로 지내던 그의 혀가 풀렸습니다. 곧 입이 열려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의 순종 앞에 하나님의 보상이 뒤따랐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곧 바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는 것입니다. 일 년 동안 벙어리로 지낸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하루만 말하지 않아도 답답해서 못견딜 것 같잖아요. 그런데 거의 일 년을 벙어리로 지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왜 그의 입이 닫히고 혀가 묶임을 당했었나요? 불신앙 때문입니다.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20절)


    사가랴의 불신앙이 그의 입을 닫게 만든 것처럼 불신앙은 오늘도 하늘의 문을 닫고 관계를 묶습니다. 자유롭지 못하도록 우리를 결박합니다. 아담을 보세요, 그의 불순종과 불신앙이 자유를 가져다 줄 것 같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날부터 묶임을 당했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순종은 우리를 묶는 것 같지만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말씀의 순종은 우리를 많은 묶임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용서하라!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십일조를 드려라! 손해되는 것 같지만 물질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무엇엔가 묶여 있고 닫혀 있는 분이 계십니까? 말씀 앞에 순종하여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그 말씀 앞에 순종하여 보십시오.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에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65절) 이 일로 인하여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갖을 수도 없고 나을 수도 없는 사가랴와 엘리사뱃이 아이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말씀 앞에 순종하자 곧 바로 그 현장에서 일 년 여 동안 벙어리 되었던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어져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생각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소문에 소문을 타고 온 유대 산중에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안겨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거룩한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들로 거룩한 두려움을 맛본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나의 가정에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거룩한 두려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야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으로 그들을 끌어 들여야 합니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6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행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앞으로의 우리의 인생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는 비교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또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족히 비교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내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일을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회에,. 가정에, 우리의 자녀들에게 행하실 일들이 많음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행하실 놀라운 일들이 많음을 알기에 우리는 내일을 소망하며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아직도 더 많은 약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습니까? 살아갈 용기마저 잃어버리셨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더 많은 약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의 어두운 그늘을 헤쳐 나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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