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라는 사람은 "은혜를 감사로써 받은 사람은 그 빚의 처음 1회분을 갚는 셈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세월이 흐르면 흐지부지 되어 언제인지 모르게 원수지간으로 변하는 것을 우리의 주위에서 쉽게 발견하는 것들입니다. 이이솝 우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슴 한 마리가 사냥꾼에게 몰리고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피하다가 위태롭게 되자, 잎이 우거진 포도덩쿨을 발견하고 거기 숨었습니다. "그저 들키지만 마소서." 하고 사슴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숨어 있었더니 사냥꾼은 너무 급히 쫓아온 바람에 그냥 거기를 지나쳤습니다. 사슴은 `이제 살았나보다. 설마 또 쫓아오지 않겠지.' 하고는 마음을 턱 놓고 마침 배가 고픈지라 포도 잎을 덩굴을 끊어가며 뜯어먹기 시작 했습니다. 금방 그 소리가 사냥꾼의 귀에 들렸습니다. 휙 뒤를 돌아보니 사슴이 포도 잎을 먹은 후라 그 모습이 쉽게 들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라. 네 놈이 거기 있었구나. 이젠 더 내빼지 못하리라." 사냥꾼은 그 자리에서 활의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았습니다. 살은 사슴 목에 깊이 박혔습니다. "포도 덩쿨은 나를 감추어 주었는데, 나는 그 은혜를 잊고서 잎을 뜯어 먹은 죄로 벌이 내렸구나." 사슴이 탄식하면서 쓰러졌다는 이야기 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2장 1-10절까지를 읽고 제목을 7절 말씀에 있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이라는 데서 힌트를 받아 '지극히 풍성한 은혜'로 정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지극히 풍성한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셨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합니까?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의지하여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가만히 내버려두면 허물과 죄로 죽을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바로 알고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먼저 은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8절과 9절에 보면 이 은혜라는 말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은혜란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선물을 받는데 대가가 필요합니까? 대가가 필요치 않습니다. 대가를 주고받으면 그건 선물이 아니죠. 로마서 4장 4절부터 8절 말씀에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지만 일을 하지 않고도 경건치 못한 자를 의롭다 여기시는 자를 믿는 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에는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운동을 하는데 부산공동어시장 사장님이 양 손에 커다란 종이가방을 몇 개나 들고 옵니다. 들고 와서는 그 종이가방을 하나씩 운동하고 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데 그 종이가방에 보니까 커다란 고급 보온병이 두 개 포장되어 들어있었습니다. 그걸 받고 참 수지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명절 전에 우리 온유에게 큰 상자를 하나 주는데 보니까 햄이 가득 담긴 선물세트였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준 것이 없는데 그 분이 두 번이나 우리에게 선물을 주었으니까 제 마음 속에는 언젠가는 이 은혜를 꼭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은혜란 이런 것이죠. 대가 없이 무엇인가를 받는 것.... 이 은혜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거죠. 4절에 보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단 말이죠. 작은 선물을 받아도 기쁘고 수지맞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죽을 생명을 건져주었다면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죽음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왜 죽은 상태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도 죽은 것은 아니잖아요? 이걸 먼저 생각해 봐야 하는데 오늘 본문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1. 본래 우리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진노의 자녀라고 설명합니다. 1절에서 3절에 다 나오고 있으니까 한 번 같이 읽어보죠.
(1) 이 세상 풍속을 좇은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은 마귀가 지배합니다. 그래서 세상 풍속은 타락을 조장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풍속을 쫓으면 점점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옛날에는 풍속이라고 하고 요즘은 트렌드, 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나라 풍속들... 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풍속들입니다. 큰 바윗돌을 향하여 절을 한다든지 큰 둥구나무에 막을 만들고 서낭당이라 하여 거기에다 빌었고, 물가로 가서 용왕이 있다하여 거기에다 절을 했고, 집안에는 성주단지를 모시고, 무슨 일이 있으면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으며, 사람이 죽으면 묘를 정할 때에 좌청룡 우백호를 따지는 풍수지리설 같은 풍속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젊은 사람들은 이런 풍습을 따르지는 않지만 유행에 민감합니다. 이런 풍습, 이런 유행.... 다 마귀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이러한 풍속들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풍습과 유행도 신앙을 방해하고, 삶을 병들게 하는 것이면 과감하게 집어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품습, 관습, 유행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 따라 사는 것입니다.
(2)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을 따랐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들입니다. 마귀가 어디서 역사합니까?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틈탈 곳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불순종하는 무리들, 육체의 욕심으로 가득한 자들, 욕하는 자들, 원망하는 자들, 불평하는 자들.... 이런 무리들 가운데 마귀가 역사하고 악한 영들이 틈탄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틈타니 거기서 나오는 모든 말, 모든 행동, 모든 결과들이 죄된 것들이고 타락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들 때문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일 수밖에 없고, 죽어 마땅한 죄인들,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는 모든 짓들이 죄를 쌓고, 그 죄의 결과는 사망인데....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당연할 줄 여기고 더욱 더욱 죄만 짓고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녀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진노의 자녀... 무서운 말이죠. 죽을죄를 쌓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를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이걸 어떻게 알겠어요?
요즘 사람들이 먹는 음식 얼마나 신경을 씁니까? 제 아내와 딸 사이에서 먹는 것 가지고 늘 갈등이 있습니다. 딸은 인스탄트 식품을 자꾸 먹으려고 하고, 엄마는 딸의 입이 인스탄트 맛에 길들여지기 전에 된장, 김치... 이런 유익한 전통음식을 많이 먹이려고 하고.... 딸이 옳습니까, 엄마가 옳습니까? 인스탄트 음식을 계속 먹이면 몸에 독이 쌓인다고 합니다. 고기만 자꾸 먹이면 사람이 난폭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음식을 마음대로 먹으면 아이를 망치고,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엄마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음식만 그렇습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 결과로 죄를 쌓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대단히 충격적이죠.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보고 그럽니다. 도대체 그 죄 값을 어떻게 다 받으려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질상 마귀에 매여 있고, 마귀가 주도하는 세상풍속, 유행... 이런 것들을 따라가다 보니 살아가는 그 자체가 죄를 산더미처럼 쌓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처럼 죄가 쌓여있다고 하죠. 바로 이게 하나님 없이 살아간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 예수 믿기 전의 우리를 되돌아보시고, 지금 우리가 예수 믿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셔서 우리가 지금 얼마나 변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변한 것이 이렇게 복인 줄 우리가 이 성경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게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죠.
이렇듯 쌓이는 죄로 말미암아 본질상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 없는 우리였지만 4절 말씀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분노를 우리에게 다 쏟아 붙지 않으시고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죄인 삼아 그 아들에게 분노를 다 쏟아 부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절규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받으셨던 그 진노의 잔은 바로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할 잔인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단 말입니다. 주님이시라고 그 잔을 즐겨 받았겠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하여 주옵소서!” 얼마나 그 진노의 잔이 두려웠기에 주님마저 피하고 싶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듯 진노의 자녀였는데 그 진노를 아들에게 다 쏟으시고는 대신 우리를 의의 자녀, 빛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게 더할 나위 없는 넘치는 은혜란 말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다 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가 계씬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고, 오늘 본문 8-9절에서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자 7절에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우리로 하여금 이 풍성한 은혜를 세대, 세대마다 나타내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 풍성하신 은혜는 받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쳐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이 풍성하신 은혜는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믿는 우리에게로 넘쳐흐르게 되고, 그 다음에 이 더하여 넘치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하여 다시 흘러가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의 흐름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흐르도록 물꼬를 터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은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주지 못하는 사람, 생활 모습에서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므로 이 은혜가 흐르지 못하게 가로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만 은혜 받으면 그만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만 들어보면 은혜를 받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교회 안팤으로 사람들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 같은 행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그 은혜를 이웃에게 흘러 갈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받은바 은혜를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서 흘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흘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말과 행동은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서 이웃에게로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이를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나만의 것이 아니기에 우리의 이웃들에게로 계속해서 흘러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은혜를 물 흐르듯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흘러가게 하는 이 이 역할이 바로 은혜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은혜도 나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흐르지 않으면 그 은혜는 썩어서 고약한 냄새만 풍길 뿐입니다. 그러나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넘치는 이 은혜는 그야말로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어 이 은혜가 흐르는 곳에 생명이 넘쳐흘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성도들 간에는 은혜의 시내가 되게 하고, 이 성도들이 만들어가는 은혜의 시내들이 모여서 은혜의 강을 이루고, 은혜의 바다를 이루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항도교회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