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청결하고 아름답게 하는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외모가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혹은 “의복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을 외모에 신경 쓰는 것만큼 하지 않습니다. 먼저 보이는 것이 외모이지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17)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면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데 더 비중을 두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은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길이 무엇이며,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허락된 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것은...?
청결한 마음이라는 것은 "흩어지지 않는 하나의 마음이며, 나뉘어 지지 않은 요동치 않는 마음이며 정직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청결한 마음은 숨은 동기나 자아의 이익을 품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동시에 모든 일에 참되고 개방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24:3에서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은 자"라고 합니다. 마음이 청결할 때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즉 손이 깨끗하게 되거나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는 것은 다 청결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의 은사임을 로마서 12장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같은 마음이나 겸손에 처하는 마음'도 청결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순수한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순순한 동기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자들의 마음이 낮은 데 처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아가서 야고보는 청결한 마음은 두 마음을 품은 자와는 관계없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긋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두마음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어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약1:7,8) 바람에 밀려 요동하게 되는 원인은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은 동기가 순수하고 믿음으로 사는 마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보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있게 되며,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마6:21)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청결한 마음이 복된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외 맏음과 사랑과 화평을 좆으라"고 부탁합니다.
마음의 청결을 유지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질문 드리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더러운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 15, 16) 하였습니다.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하여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씻는 습관을 폐하라고 하시거나 무익하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마음을 정결케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위생을 생각하여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 것만큼 마음의 청결을 위해 애쓴다면 정말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죄가 마음을 더럽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입니까? 죄라고 하면 법률을 어기거나 도덕적 규범을 어긴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죄라는 단어는 과녁을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삶의 목표를 빗나간 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지음 받았고 하나님만 섬기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이 우선이 되어야 하고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규례에서는 혼합된 것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레위기 19장 19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발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하였습니다. 이 규례의 영적인 뜻은 하나님을 향해 두 마음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영혼을 파멸케 하는 추악한 죄입니다.
마음을 청결케 하는 길은?
마음이라는 영어를 성경에서는 영, 영혼, 정신, 양심이라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거듭난 영혼의 상태를 의미하는가 하면 양심이나 성품 또는 생각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혼을 부패하게 하고 더럽히는 죄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청결케 할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수양이나 선향이 다 쓸데없습니다. 마음이 청결케 되는 방법은 사람이 고안해 낼 수 없습니다. 그 해결책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1. 그것은 유일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 길이 밝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 19절에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가 그 영혼을 청결케 하여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씻음 받고 의롭게 된 자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이 다시 더러워지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떠나간다면 가룟 유다의 영혼처럼 되고 말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그의 영혼이 더러워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양심, 성품,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마음이 더러워지면 믿음의 열정이 식고 기도할 담력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을 예방하거나 대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2, 성경 말씀을 잘 깨달아야 됩니다. 진리의 말씀 안에서 맑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 성경을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비과학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가운데서 우리의 하나님을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고 말씀합니다.
3,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과 실패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순수해 집니다. 오랜 질병을 앓고 난 다음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해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실패한 다음에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해진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은 고난을 통해서 순수해집니다. 고난과 시련의 역경, 질병은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4.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마음과 생각이 청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도록 주신 대책은 이처럼 세 가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영혼이 청결하게 됩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을 예방하고 더러워진 마음을 청결케 하기 위해 물과 같이 씻어 청결케 하는 말씀을 주셨고, 불과 같이 태워 청결케 하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마음을 청결케 하려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대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릴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하였습니다. 여기에 “볼 것이요”라고 번역된 원어는 ‘보다’는 뜻과 ‘알다’는 뜻이 있습니다. 천국은 언제나 하나님을 뵙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뵐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불행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절망이 시작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살면서 하나님을 뵙는 동안에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들이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그 마음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된 연고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신론자가 되고 우상숭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자연계의 경이로운 현상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부패한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청결한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나타나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그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이런 사실을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체험으로 말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화로운신 모습을 완전히 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고는 눈이 멀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하여 치료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장님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영광의 주님을 보고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육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장차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그가 계신 그대로 뵙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