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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갈라디아 03:19-29/ 율법과 믿음 [새벽]
  • 조회 수: 607, 2014.09.24 22:20:28
  •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모순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만을 주시던가 아니면 율법만을 주시던가 할 것이지 상반된 두 가지를 주셨다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이며 둘 중 한 가지는 폐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밝힘으로 이 둘은 결코 상반되거나 모순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강조합니다. 

      1.율법은 약속의 보조 역할을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며 또 율법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율법으로 의를 주시려고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면 왜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의를 얻는 약속을 주셨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21절에서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언급하므로 율법은 결코 의를 주시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율법이 복음의 약속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을 22, 23절에서 논증하고 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는데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했다. 율법의 직능은 모든 인류를 죄 아래 가두는 일이다.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이 죄인들인데 이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율법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아니고서는 죄를 깨달을 수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처럼 율법으로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둔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죄  인인 모든 인간은 그 죄로 율법의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어 아무런 소망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후사가 되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이라고 풀고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는 롬 5 : 12절의 말씀을 거울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율법이며 율법의 직능은 바로 이 같은 목적을 이루는데 있다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중보적 위치 

      20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직의 언급은 비록 짧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중보의 직분을 이루심으로 우리들로 율법에서도 얻을 수 없는 의를 믿음으로 얻게 하신 것인가? 첫째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값을 하나님께 갚아 드림으로 중보자가 되셨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넘겨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하셨기 때문에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시게 된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주시는 일에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인 역할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 같은 중보자적인 사역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규정하므로 소망이 없음을 보여 주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고서는 구원에 이를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놓은 것이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존재로 필요했으며 우리는 이 몽학 선생의 인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더 좋은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로 옷 입는 믿음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도 되고 그의 의를 소유했다는 뜻도 된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세례는 단순한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세례로 영적 세례, 즉 성령 세례를 말한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표식이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뤄진다. 이 세례에 대해서 롬 6 : 1 - 5절에 이르러 상세히 말씀해 주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고 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자가 되어 그의 생명을 받을 수 있고 그의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것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29절에서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내리고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를 자니라”고 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실 때, 이삭으로부터 시작하여 번성할 이스라엘 민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다만 표면적인 혈통만을 주장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표면적 약속이 아니라 이면적, 즉 영적 약속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그가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이을 자격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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