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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모데전서 01:12-17/ 사도바울의 소명의식 [주일낮]
  • 조회 수: 343, 2014.10.08 10:26:46
  • 경제학자 막스 베버는 서구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된 이면에는 기독교적 직업윤리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적 직업윤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인데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 직업으로 불러내셨다는 이 기독교적 직업윤리가 서구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튼튼히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직업에 대한 귀천을 따지는 동양의 직업윤리와는 달리 서구사회에서는 일찍부터 직업에 대한 귀천이 없었고 모든 직업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직업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귀하고 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직업윤리의 차이들이 우리나라 개화기 때에 여러 가지 재미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땅에다가 테니스장을 만들어 놓고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치고 있는데 조선의 고고한 선비들은 그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고 합니다. “저런 힘들고 천한 것은 아랫것들에게나 시킬 일이지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 이런 의미지요. 오늘날 너도 나도 헬스니, 에어로빅이니, 수영이니.... 하면서 지식층들이 더 운동에 매달리고 있는 현실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운동하는 것도 천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왕들은 거의 운동부족으로 말미암아 비만, 당뇨... 이런 것들로 일찍 요절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된 직분을 얼마나 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도적 직분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합니다. 그것도 자기를 충성되게 여겨서 직분을 주셨다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주님이 자신을 충성되게 보신 것을 얼마나 감격해하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잘 압니다. 내가 이 일을 맡을 자격이 없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주님이 자기를 충성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그가 한 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전에는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고백합니다. 누구를 비방하였습니까? 하나님을 비방하였고, 주님을 비방하였습니다. 누구를 박해했습니까? 교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교회를 잔멸하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고 성도들을 폭행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주님이 싫다, 밉다 아니하시고 충성되게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는데..... 이게 참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분에 대한 이런 사도 바울의 의식이 그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자세로 직분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첫째, 그는 겸손한 자세로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 12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나의 나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가 「나의 나 됨」이 나에게서 출발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거나, 열등감에 빠지게 합니다. 둘 다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직분을 수행할 때 우리는 나의 나 됨을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바울이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를 알고 있을 때에는 선한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지혜와 학문이 최고인줄 알았고, 바리새인의 교훈이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게 되었을 때 바울은 자기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1등 교인이 너무 많습니다. 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만나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전에 그는 비방자로, 박해자로, 폭행자로 살았으나 이렇게 사는 것이 자기 딴에는 하나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보니 이전에 행하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구나.... 이렇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1등으로 살지 말고 3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등은 하나님이고, 2등은 교회이고, 3등이 자기 자신이라고 고백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1등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교회는 언제나 2등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언제나 3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위를 인정치 않고 2등을 할려거나, 1등을 할려고 하면 교만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사람과 비교를 하면 자기가 남보다 좀 선할 수 있고, 깨끗할 수 있고,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 누구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의 출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으며,  능력의 출처, 권위의 출처, 복음의 출처, 일군됨의 출처....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충성되게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충성 되이 여겨서 직분을 주셨는데 충성스럽게 직분을 감당하지 않으면 주님을 배반한 자가 됩니다. 옛날 강도사 때 제가 담임목사님께 고집을 피워서 돈을 많이 써서 전도행사를 치른 적이 있는데 결과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딴엔 야단 맞을까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목사님이 야단을 치시지 않고 따로 시간을 내서 옷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그러면서 열심히 잘 했다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께 감동했습니다. 나의 열심을 알아주시는구나.... 이렇게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데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배신자다.... 하는 생각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었습니다. 제 아내가 늦게 들어온다고 타박할 때에도 주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월요일은 담임 목사님이 교육을 하시기 때문에 목사님 보다 일찍 나가서 강의준비하고, 출석 체크 하고.... 교육 끝날 때까지 사무실 자리를 지켜야 했고, 화요일과 목요일은 오전과 밤 시간에 양육교육, 수요일은 오전, 저녁 시간에 예배를 두 번 드려야 했고, 금요일은 밤마다 돌아다니면서 구역 관리를 했고, 토요일은 밤늦게까지 주일준비를 하면서 늦게 까지 교회에 있었고, 주일은 주일대로 밤 9시는 되야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정해진 시간 외에 짬을 내서 심방도 하고, 교회 잡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내를 도우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어려울 형편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를 알아주는 목사님을 위해서, 나에게 목사직을 주신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뛰었습니다.


       “충성 되이 여기셨다”는 것은 주님이 그의 열심 있는 그 마음을 알아주었다.... 이런 뜻입니다. 과거에 비방자로, 폭행자로, 핍박자로 살았지만 주님이 과거 묻지 않고 충성 되이 여기신 것을 생각해 볼 때 바울은 배신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진심, 자기의 충성을 알아주는 주님이시기에 바울은 결혼도 포기하고, 그렇게 비방 받고, 매 맞고,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충성되게 직분을 감당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도 충성되이 여기셔서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권사로, 교사로 새워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셨기에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직분에 대해서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담고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시는 주님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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