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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디모데후서 01:01-08/ 복음과 고난 [새벽]
  • 조회 수: 920, 2014.10.08 11:08:58
  • 8절을 보시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이고 기쁜 소식인데 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까?  복음이 말 그대로 기쁘고 좋은 소식이라면 사람들이 환영하고 좋아하고 그래서 복음 전하는 자를 잘 대접하게 될 것인데 왜 복음을 전하는데 고난을 함께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복음 안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는지를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사도가 로마의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으로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서신을 보낸 후  얼마 후에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6절에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처음 전할 때에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삼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많은 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서신쯤에는 그러한 열매들이 도처에서 나오고 교회들이 더욱 부흥하고 믿는 자들이 많아지고 하는 일들을 기대하게 됩니다만 그러나 디모데후서 전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무언가 쓸쓸하고 외로워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늘에 소망이 작아졌다는 말이 아니라 그럼으로 오히려 하늘에 대한 소망이 더욱 뚜렷하여 지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 어두움의 세력에 갇혀서 어두움을 사랑하고 살기 때문에 복음의 빛이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일 낮에 사도행전에서 바울사도의 복음 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보다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이 더 많고 강경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처음에 듣고서 좋아했는데 그래서 바울을 따랐는데 나중에 바울을 배신하고 대적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디모데 후서에서만 살펴보겠습니다. 15-18절입니다.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18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버렸다고 합니다. 거의 다 바울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버린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자가 부겔로와 허모게네라는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버렸지만 그러나 그 중에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하고 감옥에 있어도 부지런히 찾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주 드물고 대부분 바울을 버린 것입니다.


    2:17절입니다.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이들은 바울의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자들입니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짐과 같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적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처음에 복음을 들었던 자들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버리고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외부에서 온 세력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자들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4:9-11절입니다.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데마는 바울과 동역하다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떠난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바울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누가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볼 때 바울 사도가 자기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지만 그러나 처음에 좋다고 따르던 자들이 많이 떠나 가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럴까요? 도대체 복음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처음에는 따르다가 나중에 배반하여 떠나버리는 것입니까?


    복음이란 자기를 부정하게 만드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기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좋아 보입니다. 나의 행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거절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공짜라는데 손해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더 깊이 들어 가보니 이전에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모든 것들을 다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러다가는 망하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는 살지 못하겠다고 떠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함께 공부하는 목사님들의 대부분이 가장 심한 반대가 아내로부터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렇게 목회해가지고 처자식 먹여 살리겠는가 하는 반대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목회에 대한 비전과 야망이 있었는데 복음이란 것을 듣고 나서는 죽어야 된다고 하니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성공을 위하여 지금 고생을 견디자고 하면 참겠는데 아무리 보아도 장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겨우 밥만 먹고 살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사모가 만약 그곳에 공부하러 가면 이혼하고 가라고 하여서 결국 도중에 돌아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복음이 좋습니까? 처음에는 조금 의아해 하다가 조금씩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기에 십일조의 부담도 주일성수라는 부담도 없어서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예수님만으로 감사하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예수님만 함께 하신다면 세상에서 망해도, 부자가 되지 못하여도, 자녀가 공부를 못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니 그런 것을 싫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좋지만 세상의 것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바울사도가 편지를 보내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따라오다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배반하고 떠나는데 디모데는 신실하게 복음의 일군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애정이 각별한 것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부터 보겠습니다. 
     

    1:1-2절 인사말입니다. 바울의 사도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디모데 전서에서 성도를 가족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그리고 있기에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배반하고 떠나는 중에 디모데에게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며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1:3-5절입니다. 그리고 밤낮 간구하면서 디모데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은 디모데의 믿음이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디모데의 눈물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아들 같은 사람을 보고 싶어서 빨리 오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디모데에게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인하여 감사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디모데의 외조모와 어머니에게 있더니 너도 그러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거짓 없는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참 믿음이 있고 거짓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위선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든지 위선적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연보를 하거나 봉사를 하여도 누가 보던지 아니 보던지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디모데에게는 이러한 위선적인 모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6-7절입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안수를 받을 때의 받은 은사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은사를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복음을 전하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란 반드시 핍박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의 증거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끄러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가 복음의 사도가 되어서 그렇게 많은 능력을 행하면서도 지금은 쇠사슬에 메어서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여서 기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메여도 복음의 말씀은 메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능력이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이 복종을 하고 감히 대적하지도 못하면 능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이러한 것을 인하여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복음을 싫어하기에 예수님을 배척하듯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바울사도도 역시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복음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세상 사람들이 다 환영하고 좋아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핍박하고 배척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도 세상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7-20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바울과 디모데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복음으로 핍박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은 좋지만 핍박을 싫다고 합니다. 고난은 싫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복음을 따르다가 나중에 얼마든지 배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 좋다고 따른 것은 무엇입니까?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의 삶이 당연하다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기뻐함은 오직 복음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고난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는 증거도 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이 디모데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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