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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베드로전서 01:09-12/ 믿음의 결국 [주일낮]
  • 조회 수: 479, 2014.10.10 12:35:23
  • 오늘은 1장 9절 말씀의 한 표현을 인용하여 ‘믿음의 결국’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믿음의 결국은 무엇인가? 믿음의 결론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목적이 무엇인가? 이런 생각에서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흔히 ‘왜 믿는가?’ 하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가끔 자신에게 스스로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진짜 우리는 왜 믿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 때 믿음을 한 번 가져보라고 합니다. 병이 들었을 때, 사업이 망했을 때, 우울할 때 믿음을 가져보라고 합니다. 이럴 때 믿음이란 뭔가 힘이 되기 위해, 아니면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죠. 한 때 박근혜 대통령께서 장신대에 입학하여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신앙에 입문하기 위하여 영적인 방황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부모 모두를 총격으로 잃어버린 엄청난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죠. 사람들은 이렇게 어렵고, 힘들 때 믿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건강믿음, 재정믿음, 사업믿음, 출세믿음.... 이런 잘못된 믿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로마서 10장 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잘못 믿고 있다는 거죠.


    물론 힘들고 어려울 때 믿음을 가지면 힘이 되고, 위안이 되죠. 그러나 믿음을 이렇게만 이해하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하게 됩니다. 믿음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어주죠. 믿는 나 자신을 바꾸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해서 우리 주변의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믿는다고 해서 내가 사는 환경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내 안에 들어가서 바로 나 자신을 바꿈으로 환경을 이기고,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베드로서신을 받은 성도들이 믿는다고 해서 실제 환경이 달라졌습니까? 아니죠. 그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 환경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믿음의 사람이 되니까 산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산 소망... 이 소망은 4절에 말씀하는대로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또 그 유업이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4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산 소망이 바로 믿음이 되며, 이 믿음은 하늘에 관한 것이지, 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믿음이 땅에 관한 것이라면 성도들이 믿음 때문에 고향을 버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타지에 나와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이런 고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9절 말씀에 믿음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정의를 해 놓았죠. 9절 말씀을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이라...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믿음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믿음에 대한 이런 정의는 성경 여러 곳에서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베드로는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이 이 구원에 대하여 예언한 바가 있다고 말씀하는데... 우선 이 말씀은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은 신약성경에서 믿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는지도 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믿음은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오는가’ 하는 것부터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라고 말씀하면서 사도바울은 믿음이 시작되는 첫 지점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말씀의 씨가 떨어지는 4가지 종류의 땅이 있는데 그 중에 오직 하나의 땅만 씨를 제대로 받아드려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대상자로 치면 4명 중 한 명 꼴이죠. 그것도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전도대상자 중 한 사람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이 택함을 받은 자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믿어야지... 이렇게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택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이 선물이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전도만 할 뿐이고 믿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사도요한도 아주 논리적으로 잘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믿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5장 1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를 믿는 자라고 하였고, 같은 장 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하시면서 13절에는 이 생명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면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가 “믿음의 결국, 곧 구원을 얻음이라”는 말씀은 영생을 얻는 것임을 사도 요한이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에 대한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에서부터 예언되고, 연구되고, 부지런히 살핀 것이라고 오늘 본문 1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를 예언하였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이는 성경 최초에 메시야가 하실 일을 예언했다고 해서 원시복음이라 합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님을 가르칩니다. 구약성경에는 여자의 후손이란 없습니다. 전부 다 남자를 따라 성과 이름을 붙이거든요. 그런데 여자의 후손이란 말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여자의 자녀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죠. 이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를 깨부수는지, 마귀는 어떻게 예수님을 해하려는지... 하는 것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또 이사야 7장 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런 예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한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입니다. 그 외에 미가 선지자도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비록 작을지라도 네게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라고 하면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우리의 날을 바라보며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그냥 예언했습니까? 아니면 마음대로 떠들어댄 것입니까? 11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자기’란 구약의 선지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란 성령을 의미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예언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한 것이죠.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베드로사도는 이사야 선지자를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메시야를 예언한 선지자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메시야와 그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에 대해서 예언은 했으나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그런 형편입니다. 이런 일은 천사들도 몰랐던 일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는데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알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명확하게 드러났고, 이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듣고 알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수고한 모든 것은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바로 이 은혜의 시대에 우리만이 누리는 복이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12절에 말씀하고 계시죠. 마지막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자, 이제 아시겠죠. 우리 안에 들어오기까지 이 믿음의 결국, 구원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으며, 얼마나 값진 댓가를 치르게 되었는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 그리고 그 믿음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뿌려야 했던 많은 피, 생명들.... 이런 희생과 수고를 통해 믿음이 우리에게 전해진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을 등한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그동안 걸어온 믿음의 도리를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 말씀하시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미 얻은 구원을 시험과 환란, 고난 가운데서 마귀가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입니다. 믿으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구원을 위해 베드로서신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고향을 떠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등지고 타처로 이리저리 전전하는 나그네 인생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구원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도 이 구원의 가치를 등한히 여기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아버지 믿음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공헌했습니까? 많은 종들이 참수 당하고, 돌에 맞아 죽고, 사자 밥이 된 것도 구원의 가치가 귀한 것을 드러내지만 무엇보다도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뿌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야말로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세삼 알게 됩니다. 결코 우리가 그 가치를 지불할 수 없기에 택한 주의 자녀들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 곧 영생을 우리가 누리는데 조금 어렵다고, 조금 힘들다고 이 구원을 등한히 여겨 헌신짝처럼 버리면 장차 우리가 받을 주의 심판이 얼마나 두렵고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받은 구원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저희 믿음의 여정을 지켜주옵소서. 이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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