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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베드로전서 02:01-10/ 산돌이냐, 걸림돌이냐? [주일낮]
  • 조회 수: 526, 2014.11.01 15:31:31
  • 오늘 본문 4절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라는 말씀에서 ‘산돌이냐, 걸림돌이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산돌과 걸림돌은 서로 반대되는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산돌의 의미가 영어로는 LIVING STONE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을 영역하면 ‘살아있는 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돌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산 돌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 돌이 쓰임을 받으니까 살아있는 것이 되고, 쓰임 받지 않으면 죽은 돌이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산 돌이란 쓰임을 받는 돌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집을 짓다 보면 여러 돌들이 사용될 것이고, 그 중에 가장 좋은 돌은 머릿돌로 사용됩니다. 그 외에 쓰임새가 없는 돌은 폐기물이 되어 버려집니다. 7절에 보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표현되죠. 그렇게 버려집니다. 그렇게 버려지는 돌은 사실 골치 아프죠. 아무 데나 버려져 딩굴어 다니는데 이걸 방치해두면 어두운 밤길에 사람들이 걸어가다가 그 돌에 발에 걸려 넘어지죠. 이른바 8절에  “부딪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living stone의 반대말인 dead stone 대신에 stumbling ston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개념이 6-8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보시죠.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런데 왜 예수님을 산돌로 표현했을까요? 성경에서 예수님을 돌로 표현한 원리는 이 베드로전서 2장 말고도 성경 두 곳에서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 34절에 보면 뜨인 돌이 나옵니다. 이 뜨인 돌은 역사를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산돌이 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걸리는 돌이 된다 그랬죠. 이 다니엘 2장에 나오는 뜨인 돌이 바로 걸리는 돌이 되고,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진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걸려 넘어진다는 말은 심판 받아 멸망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21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빗대어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잘 가꾸어 종들에게 세 주고 떠난 후 열매 익을 때가 되어 그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었더니 어떤 종은 죽이고, 어떤 종은 돌로 치고... 이렇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들을 보내었는데 그 아들마저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 후에는 주인이 군사들을 보내어 이들을 다 멸하고 다른 종에게 세를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주인이 포도원을 세 준 종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 영적 공동체를 관리하도록 맡기셨는데 그들 스스로가 주인인 채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 끝에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시며 예수님 자신을 머릿돌로 표현했습니다. 물론 건축자들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하죠.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렸지만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을 머리로 한 교회를 새우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자신을 표현하시는데 사용한 머릿돌은 집에 사용되는 것으로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머릿돌로 하는 집의 수많은 벽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에베소서 2장 20-22절에서 말씀하기를 “...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예수님을 산돌, 그것도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표현하면서 오늘 본문 4-4절에...... 함께 읽어볼까요?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산돌과 같이.... 산돌은 아니지만 예수님처럼 산돌과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데 한 몫을 해라.... 그리고 그 신령한 집에서 하나님이 흠향할만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라... 이렇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오늘 본문 9절과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는 왜 이 시점에서 이 산 돌을 말씀하겠습니까? 지금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너무 크면 그 고난에 가리어져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자신이 고난을 받는지도 잊어버립니다. 이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보배로운 산 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귀하기에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예수님은 교회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머릿돌이 되지만 우리에게는 보배로운 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돌이 다이아몬드입니까? 우리 주님은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보배로운 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왜?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귀한 분이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순종하면 우리의 삶이 변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택하신 족속으로, 거룩한 나라로,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예수님이 산돌이 되는 성도들에게는 이런 변화의 축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9절입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그런데 고난이 너무 크면 예수 믿었던 것을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예수님을 믿었는데 마귀가 시험을 주고 그 결과로 고난에 빠지니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도 너무 많고, 예수 믿는다고 뭐 되는 것도 별로 없네...” 이런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예수님은 산 돌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어버립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예수님이 산 돌이 되어야 하지,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성가신지... 주일날 어디 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불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보배로운 산 돌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 버릴 것을 완전히 버려야 됩니다. 1절과 같이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둘째, 2절에서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신령한 젖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것을 비운 다음에는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하지, 그대로 두면 또 위험해집니다. 누가 순진과 순수를 잘 설명했습니다. 순진은 비워진 상태라면 순수란 깨끗한 것으로 채워진 상태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것은 좋은 것으로 가득 차서 위험하지 않지만 순진한 것은 단지 비워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 또 들어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절에서처럼 악독, 모든 기만, 시기, 비방하는 말들과 같은 것을 비우고, 2절에서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마귀의 모든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3절처럼... 마지막으로 3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온갖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말하자면 나쁜 것을 다 비우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주의 인자하심, 자비하심, 풍성하심, 능력있으심... 이런 주님을 경험하게 되니, 경험하게 되면 될수록 주님이 저에게, 여러분에게 점점 더 보배로운 산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이 보배로운 산 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더욱 더 주님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산 돌이 되기까지 주님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에게 남라다 순간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더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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