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신약 요한복음 02:01-11/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생긴 일 [주일낮]
  • 조회 수: 492, 2016.01.30 22:31:08
  •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은 예수님의 공적 생애에 있어서 처음 행한 기적입니다. 그러면 갈릴리 가나란 어떤 지역입니까? 지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릴리 나사셋, 갈릴리 가나... 모르겠어요. 갈릴리가 프로빈스 정도 되나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사렛이나 가나나 보통 그렇고 그런 시골지역일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이렇게 말한 걸 보면 나사렛이나 가나나.... 오늘날로 치면 별 볼일 없는 지역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공적생애의 첫 기적을 이런 자그마한 시골에서 터트린데 대해서는 조금 인간적으로 불만이죠. 기왕이면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이런 기적을 행하셨더라면 참 좋았을 뻔 했습니다. 전도의 효과로 보나 예수님의 명성으로 보나 훨씬 났죠. 그런데 왜 예수님은 공생애의 첫 기적을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작은 시골에서 행하셨습니까?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왕처럼 화려하고 비단과 금은보석으로 치장된 왕궁의 침실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마굿간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이 아니라 병든 자, 천대, 멸시받는 자... 이런 자들부터 만나셨습니다. 이런 소외된 곳, 소외된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이고, 이러한 필요에 맞게 예수님은 나타나셨고, 만나주셨고,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 만나기를 소원하십니까? 갈망합니까? 지금 이 시간, 현재가 예수님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까? 그렇다면 죄를 회개하고 거룩함을 이루어가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정확한 때에, 필요한 때에 여러분에게 나타나시고, 여러분을 만나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주님의 기적이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또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과 그의 모친 마리아의 모습을 잠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어째서 마리아가 이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잔치집이 아마도 예수님의 육신의 가정과 아주 가까운 친척이어서 마리아가 이 잔치를 서빙하는 위치에 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이 잔치집에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2장 4절에 보니...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 말씀을 읽고 우리는 조금 이상해집니다. 이게 아들이 어머니에게 할 말이 아니거든요. 만약 여러분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뭔가를 이야기할 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러면 기가 찰 노릇이거든요. 왜 예수님은 그의 모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했을까요? 저는 이렇게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처음으로 행한 기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엄격하게 구분하려고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머니... 지금까지는 제가 사적으로 어머니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공적으로 메시아요, 유대인의 왕입니다...” 뭐 이런 구분 말입니다. 아니면 아들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님처럼 효자인 아들에게서 이런 무례한 말은 상상할 수도 없는 거거든요. 여기서 “여자여...” 라는 말은 아들로서 어머니를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서, 왕으로서 그의 백성 중 한 여인을 호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건 예수님으로서도 결코 쉽지 않는 결정입니다. 아무리 공적인 것이라지만 아들과 어머니로서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준엄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사적인 관계로 얽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런 사적인 관계에 얽히고 섥혀 엉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되지 않고 인간적인 다툼의 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받드는데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부모, 자식의 관계뿐만 아니라 지연, 학연... 이런 사적인 관계들에 굉장히 약합니다. 이런 사적인 관계들이 정계, 관계, 제계, 교육계... 거기다가 이제는 심지어 종교에까지 침투하여 사회를 부패시키고 있죠. 오늘날 교회의 분쟁과 다툼은 진리냐, 비진리냐, 참이냐, 거짓이냐,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이런 것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분규의 중심에 내 가족이냐, 아니면 나하고 친한 사람이냐... 또는 내가 아는 사람이냐... 이런 걸로 결정한다는 겁니다. 사실 내 남편이 어떤 문제에 얽혀있다면 아내나 자식들은 자연히 남편 쪽으로 따라 움직입니다. 제가 이전 교회에서 굉장히 괜찮은 집사님 한 분과 같이 사역을 했는데 이 집사님의 아내가 잘못된 이단의 길로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아내를 설득하고, 책망하고 하면서 아내는 이단 교회로, 이 집사님은 교회로... 이렇게 한 1년을 힘들게 생활하더니 결국은 남편이 아내를 따라 갔습니다. 아내가 변하지 않을 바에야 자신이 마음을 바꾸는 게 가정을 지키는 일이다... 여기도 하나님 부르고, 거기도 하나님 부르는데 부부 간에 이렇게 다툴 필요가 있냐는 거죠. 이런 마음을 품고 결국은 아내를 따라 갔습니다. 사적인 관계를 극복하고 진리에 굳게 선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있거든요. 자 마태복음 10장을 한 번 펴서 34절부터 한 번 읽어봅시다. 같이 읽어볼까요?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다소 어렵고 난해한 느낌이 들지만요.... 쉽게 표현하면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는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 간에도 양보할 수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불화가 일어나죠. 그래서 34절에 검을 주로 왔다고 하였고, 35절에 불화하게 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어도 쉽게 표현하자면 가족 간에도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따른다고 할 때 평소에는 잘 나가다 이 진리의 문제가 가족관계에 부딪히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이 바로 마태복음 10장 37절에 나오는 바대로... 37절 같이 읽어볼까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져야 할 십자가죠, 38절에 표현한 말씀처럼요....

     

    제가 교회를 섬겨 보니까 이 사적인 관계를 극복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는 부임할 때부터 양대 진영으로 대립이 되어 있는 그런 교회를 섬겼습니다. 처음 부임해서 많은 분들이 밥 사주고, 목사가 어디 간다고 하면 뭐 돈으로 후원하고.... 이런 분위기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이런 게 좋다기 보다는 너무너무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쪽 사람들 만나면 저쪽 사람들이 신경 쓰이고, 저쪽 사람들 만나면 이쪽 사람들이 신경 쓰이고... 이게 뭐 즐거운 마음으로 밥 먹는 것이 아니라 앉아 있는 것이 가시방석입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이런 저런 목회적 충고들을 하거든요. 그래서 연말마다 목회적으로 뭘 결정하려면 이 사람 걸리고, 저사람 걸리고... 그래서 너무너무 힘들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특별히 밥 사주고 하면서 교역자들을 잘 섬기는 분들 가운데서 결정적인 때 목사가 자신에게 섭섭하게 했다고 해서 목사를 힘들게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기 바기오한인교회는 그런 분이 한 사람도 없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그렇게도 목사님에게 잘 했는데도 목사님이 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교회 일을 결정했다.... 그러면 밥 한 그릇 사줘야 해요. 나를 염두에 두고 얼마나 결정하기가 어려웠을까? 얼마나 긴긴 밤을 새우면서 고민했을까? 그러니 좀 섭섭한 마음을 가졌더라도 밥 한 그릇 사시면서 목사님을 위로해드린다면 마음이 훨씬 편해질 것입니다. 사실 그런 목사님이 제대로 된 목사이거든요.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일에 사심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청을 완전히 물리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시되 사람의 필요를 결단코 외면치 않으신 분이시고 마리아는 그걸 발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 잔치집의 하인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5절에 보니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여러분... 여러분이 뭔가를 놓고 절실하게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단코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기대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자, 이제 순종하는 하인들의 믿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기적을 일으키려면 우리가 예수님께 협조해야 합니다. 그건 바로 순종이죠.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7절과 8절... 같이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여기서 하인들이 예수님께 순종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물을 항아리에 채운 것이고, 둘째, 그 항아리에 채운 물을 다시 퍼서 연회장에게 갖다 준 것입니다. 어찌 보면 물을 항아리에 채우는 것은 하인들이 뭣 모르고 했을 수 있겠지만 그 담은 물을 다시 퍼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요구입니다. 인간적으로 따지자면 정말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항아리에 퍼담은 물을 다시 주전자인지,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포도주를 담는 그릇에 다시 담는 것도 쓸데 없고, 바보 같은 짓이며, 또 그것을 가져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것은 하인들로 봐서는 경을 칠 일입니다. 그런데 하인들이 순종했단 말이죠. 그건 기적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것보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그 사실이 사실은 제게 더 기적처럼 보입니다. 어느 누가 그 불합리하고, 바보 같은 명령에 순종한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하인들의 순종 그 자체가 바로 기적이라는 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저와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기로 결정한 이 사실이 기적이며, 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사실이라고 믿는 이것이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는 이 사실 자체가 기적 중에 상 기적입니다. 우리가 기왕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사실이며, 그 말씀을 믿는다면, 순종에까지 나아갑시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이 도박에 손을 못 끊는 이유는 본전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 망할 때까지 도박에 목숨 걸죠. 너무나도 불합리한 일인데 사람들이 악마의 유혹에 못 이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또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전 제산 날리고 망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사기 당하고 난 뒤 하는 하소연을 들어보면 정말 바보 같은 소리인데 그 소리에 속아서 사기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절대로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정말 꼼꼼히 따져야 할 일들은 그냥 넘어가다가 이렇게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니 저리니 하며 얼마나 따지는지... 이렇게 따지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행하시는 기적을 막고,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밋밋하고 맛없는 맹물이 예수님을 통하여 맛있는 포도주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삶이 황홀해집니다. 자 연회장이 잔지의 주인인 신랑을 불러 한 말을 한 번 봅시다. 10절이네요. 같이 읽어봅시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 변화된 삶은 인생의 처음과 끝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뭐 좋게 봐서 4,50대까지는 그런대로 재미있게 살아왔다 칩시다. 이런 재미가 60대에도, 70대에도 계속되리라 보십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 빠진 인간의 삶은 갈수록 못한 것입니다. 사실 비참해지고 허무해지죠. 힘은 딸리고, 병은 찾아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건강보조식품들을 먹고 있는 자신을 보노라면 슬퍼지고, 허무해지는 거죠. 인간적인 삶은 처음보다 나중이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기쁨이 넘치고, 황홀해지는 인생의 비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 밋밋한 나의 삶이 포도주처럼 달콤한 삶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허그’ 라는 책을 쓴 닠 부이치치... 이 사람은 호주 출신이죠. 선천적으로 날 때부터 양팔과 양 다리 없이 태어났지만 이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어 포도주 같이 달콤한 삶을 살아가고 있죠. 송명희 시인 같은 분... 완전 지체장애를 가진 불행한 분이죠. 이 분도 예수님 안에서 황홀한 인생의 삶을 사십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귀하면...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이런 주옥 같은 시를 썼죠. 바로 밋밋한 맹물이 달콤한 포도주로 변화된 삶의 한 예입니다. 이런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만약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그런 인생을 사시는 분들이라면 갈릴리 가나의 신혼부부 가족처럼 지금 예수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겨운 삶, 재미없는 삶, 허무한 삶, 밋밋한 삶들이 포도주처럼 달콤하고, 감사가 넘치는 그런 삶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댓글 0 ...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3490
1948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398
1947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293
1946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125
1945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246
1944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11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