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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사도행전 09:36-43/ 다비다의 신앙과 선포하는 믿음 [사도행전]
  • 조회 수: 1023, 2016.03.22 18:13:51
  • 욥바라는 항구도시에 다비다라는 예수님의 여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주었으며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구제에 힘을 썼던 다비다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다비다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의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었다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비다의 됨됨이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참고가 되는 것은 3 가지입니다.

    1. 여제자..... 아무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있고, 특별한 헌신이 있는 사람을 제자라 칭합니다. 다비다는 여제자였습니다. 다비다라는 인물은 본문 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자 누가는 다비다를 가리켜 여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는 많은 여인들이 등장 합니다. 그러나 여제자라고 불린 여인은 다비다 외에는 없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왜 다비다를 가리켜 여제자라고 했을까요. 그가 믿음으로 교회를 극진히 잘 섬겼기 때문에 이런 타이틀을 준 것입니다.

    2. 선행을 많이 행했다고 합니다. 고아들과 과부들을 사랑했습니다. 다비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 했습니다. 당시에 고아들과 과부들은 소외받은 계층이었으며 불이익을 당하고, 권리가 상실 당하고, 비참한 대우를 받았던 연약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 사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다 받쳐서 헌신했습니다.

    3.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습니다. 평소에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그를 애도하며 베드로 앞에서 그가 평소에 어떻게 그들을 도왔는지에 대해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이 그냥 죽어서는 안 된다고 베드로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비다의 됨됨이 외에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것은 선포하는 믿음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37절을 보면 제자들이 다비다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입니다. 그 당시 사람이 죽으면 장례 절차로 시체를 씻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비다의 시체를 다락에 놓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장례식을 위한 것이라면 절대로 시체를 다락에 놓을 리가 없습니다. 찾아오는 조문객들을 위해서라도 1층에 시신을 놓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다비다의 시체를 다락에 누였을까요? 열왕기상 17장17절 이하에 보면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안고 다락으로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열왕기하 4장17절 이하에 보면 이번에는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 선지자가 죽은 아이를 살려내는데, 그때 아이의 어머니가 아들의 시체를 엘리사 선지자가 종종 사용하던 다락에 누이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려냅니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죽은 아이를 다락에서 살려냅니다. 욥바에 있던 제자들이 다비다의 시체를 다락에 누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엘리야가 과부의 간청을 듣고 다락에서 죽은 아이를 살려냈던 것처럼, 엘리사가 여인의 간청을 듣고 다락에서 죽은 아이를 살려냈던 것처럼, 욥바의 제자들도 죽은 다비다를 하나님이 살려줄 것을 심정으로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비다의 시체를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욥바의 성도들이 죽은 성도들은 무조건 씻어 다락에 누였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성령께서 욥바의 성도들에게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감동을 주셨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지금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욥바의 성도들에게 주신 감동을 주신다면 과연 우리들도 욥바의 성도들처럼 순종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신앙의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성적이고 경험적이고 상식적인 선 안에서만 예수님께 순종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명령이 언제나 비이성적이고 초경험적이고 초과학적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때로 예수님의 명령은 비이성적이고 초경험적이고 초과학적입니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명령을 하시기도 합니다.

     미우라 아야코 여사가 쓴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p.113-117)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이또오 선생은 야무구찌 현의 보우후라는 곳에서 목사로 있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의 전도가 꿈이어서 자비량으로 중국행을 결심했다. 그 소문을 들은 의사인 어떤 신자가 중국까지의 표를 사주었다. 또한 다른 신도들이 2원, 3원씩 헌금을 해 주어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도 50원이라는 돈이 남았다. 1938년 당시 선생의 체재비가 월 30원이었으므로 50원이 있으면 당분간은 걱정이 없겠다며 마음 놓고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출발 전날 선생은 교회에 49원의 가불이 있다는 기억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 돈은 선생 자신이 쓴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신자 중에 매우 가난한 신자가 있어 보다 못해 선생의 이름으로 교회에서 빌린 돈이었다. 그 돈을 선생은 먼저 변제했다. 50원 중에서 49원을 갚았으므로 수중에 남은 것은 1원뿐이었다. 선생은 매우 곤란해졌다. 그러나 중국으로의 출발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1원을 주머니에 넣고 보우후 역으로 떠났다. 역에는 많은 교회 신자들과 친지들이 전송 차 나와 있었다. 그 사람들은 설마 선생이 1원밖에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마음은 편했다. 그런데 전송인 중의 몇 사람이 선생 옆으로 다가와서 살며시 봉투를 내밀었다. 선생은 놀랐다. 선생의 생각으로는 헌금을 받을 곳은 모두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열세 사람이 헌금 봉투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선생은 보우후 역을 떠났다. 기차 속에서 세어보니 헌금 총액은 30원이었다.

    이윽고 기차는 시모노세끼에 도착했다. 거기에서도 아는 사람이 전송 차 나와 역시 헌금을 주었다. 15원이었다. 선생은 감사하며 규우슈우로 건너갔다. 아직 해저 터널이 뚫리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큐우슈우에 기항하자 친구 두 사람이 전송을 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거기에서도 헌금을 주었다. 선생은 배 안에서 두 사람이 준 봉투를 열었다. 그 순간 선생은 너무나 놀라 호흡이 멎어버리는 듯했다. 이 두 사람이 준 헌금은 2원씩 합계 4원이었다. 곧 30원, 15원, 4원, 합계 49원이었다.

    선생은 배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선생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교회에서 빌리고 변제한 금액은 49원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 49원을 1전의 과부족도 없이 그대로 내리신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중국 전도를 떠나는 선생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축복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신호이자 응답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중국 전도에서 어떤 곤란이 밀려오더라도 항상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격려의 손길이기도 했다.

    기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길에는 반드시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1원 밖에 없어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떠날 때가 있습니다.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나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무덤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은 시체를 다락방에 누이고 베드로를 불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상식적이고 초경험적이고 초과학적인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순종하면 굶을 수도 있고, 미쳤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고, 핍박을 당할 수도 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순종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순종하면 우리의 삶이 놀라운 간증이 됩니다.

    욥바 성도들의 청함을 받은 베드로가 다락에 누인 다비다의 시체 앞에 섰습니다. 40절을 보면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하여 선포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 순간 다비다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습니다. 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다비다를 살릴 수 있을까 라고 묻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죽은 다비다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베드로의 믿음의 선포를 통해서 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선포하지 않았다면 죽은 다비다는 살아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18절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향해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바울이 선포하자 귀신이 즉시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어떤 유대인들이 바울을 흉내 내 악귀 들린 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만큼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선포했는지, 그리고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마다 얼마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은 예수의 이름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이름,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이름에 이 놀라운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선포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고침 받고, 귀신이 떠나간다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은 다릅니다. 40절에 보면 기도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는 모릅니다. 다비다를 살리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를 물어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했는지도 모릅니다. 둘 다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했을 때 주님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비다가 살아났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했을 때 다비다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선포의 믿음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고침 받고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여러분에게는 산을 향해 문제를 향해 불가능을 향해 선포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했던 적은 언제입니까?

    우리 안에는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선포했는데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선포했는데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선포했는데 귀신이 떠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선포했는데 산이 그대로 있으면 어떻게 하지?’ 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했지만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병이 낫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도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것 저런 것 계산하고 생각하다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함으로 승리하는 성도의 권세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용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유대인들조차도,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조차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했는데, 정작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순종해야 할 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단돈 1원 밖에 없어도 길을 떠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까?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어도 사람들을 자리에 앉게 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까? 썩는 냄새가 나도 무덤의 돌을 굴려 놓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까? 죽은 다비다의 시체를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를 찾아가라고 말씀하시는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비다가 살아난 일로 인해 욥바에 있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욥바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욥바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의 믿음, 선포의 믿음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순종의 믿음, 선포의 믿음을 회복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선포하는 믿음을 통해 이 부산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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