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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사도행전 21:07-14/ 사도 바울의 결단 [사도행전]
  • 조회 수: 614, 2016.03.22 18:46:51
  • 사도 바울의 결단(사도행전 21장 7-14)

     

    몇 년 전에 인터콥이라는 선교 단체에서 예루살렘 평화대행진이라는 선교 프로젝트를 가지고 팔레스틴 지역에 단기선교훈련생들을 많이 파송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틴은 여행 위험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외교부에서는 인터콥 선교단체에게 단기선교 훈련생들을 파송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인터콥 선교단체에서는 선교란 위험하다고 안 하고, 안전하다고 해야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외교부의 경고를 듣고도 단기선교훈련생들을 파송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려고 하니까 그런지 그 해에 김선일 학생이 탈레반에게 피랍되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샘물교회에서 파송된 단기선교훈련생들 23명 전원이 또 피랍되고 하면서 인터콥 선교단체의 이야기가 시중에 알려졌습니다. 외교부에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 여행위험지역이라고 단기선교훈련생들을 파송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다가 이번에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다.... 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들의 의견도 많이 갈리어졌습니다. 국가의 권고를 들어야 했다. 국가가 경고해도 선교는 선교니까 마땅히 보내야 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입니까? 오늘 본문도 이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 번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다는 경고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21장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성령의 감동받은 사람들이 미래의 내용들을 알고 거기에 가면 어려움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또 아가보도 만류했습니다. 21장10절을 보니까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 자 여기서 두루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의 미래의 내용을 알고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가서는 안 된다고 예언합니다. 또 선지자 아가보라는 사람도 바울이 수족이 결박된 채로 이방인에게 넘겨지리라..... 예언을 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성령의 감동을 받아가지고 바울의 미래에 대해서 예견을 합니다. 성령이 예언하게 해 주었기에 거기에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성령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바울이 그 위험이 도사리는 예루살렘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바울은 이런 예언을 듣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바울이 가는 것을 만류하자 바울은 이들을 책망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자 예언한 사람들과 이 예언을 듣고 바울을 만류한 사람들이 옳을까요, 아님 바울이 옳을까요?

    저는 여기서 질문을 한 가지 드려보고 싶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보여주시다면 무엇 때문에 보여주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피하라고 보여주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200여년 전에 우리나라에 선교하러 들어와서 목베어 죽임을 당한 선교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미래를 보여주시지 않았을까요?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미래를 보여주시려고 했다면 그것은 그런 미래를 위해 준비하라는 것이죠. 각오를 다지고, 기도를 많이 하고, 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미래를 보여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심지어 교인들도 자신에게 닥칠 미래가 어떤 것이가를 알아내기 위해 능력의 종들을 찾습니다. 그러면 예언을 받지요. 오늘날도 미래의 예언이라는 것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꼭 필요하다면 주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이라면 그것은 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을 듣고 당면한 미래를 말씀으로, 기도로 무장하라..... 이런 메시지를 위해 예언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인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미래의 일들을 피하게 하기 위해 예언을 주시겠습니까? 만약 이런 목적으로 예언을 주신다면 하나님 아닌 그 어떤 힘에 의해서 미래가 움직인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언을 듣고 미래를 피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예레미야 32장 31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래를 보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래를 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주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미래를 위해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잘 준비하여 하나님의 일을 더 아름답게 나타내기 위해 내가 협력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여러분에게 미래를 예언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아닐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미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미래가 나의 생명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생명을 요구한다면 그 미래가 그만큼 나에게 값어치가 있고, 중요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래가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기에 하나님은 나의 생명까지 요구하시는 것일까? 내 생명으로 사야 하는 그 미래는 과연 하나님께 어떤 가치가 있을까? 그 어떤 가치가 있기에 하나님은 내 생명과 그 미래를 바꾸시려고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 두렵다는 생각 보다는 엄숙하고,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요.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이렇게 바울은 당당하게 미래를 받아들입니다.

    2. 미래를 받아드리되 항상 옳은 길, 바른 길을 가리라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거칠고 험한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이 길이 쉽냐, 어렵냐, 무슨 고초가 기다리고 있느냐,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집니다. 반면 바울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 바른 길인가를 찾고 그 길로 걸어갔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둘째, 우리가 바른 길을 한번 걸어가면 우리 뒤에 따라오는 사람 가운데 그 길을 걸어갈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의 부흥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선구자적인 사람이 바른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갑니다.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먼저 기도하는 길을 걸어갑니다. 한 사람이 먼저 전도하는 길을 갑니다. 한 사람이 먼저 헌신하는 길을 갑니다. 그러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갑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합니다. 전도합니다. 헌신합니다. 이것을 바로 부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우리가 길 닦는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당장 보이는 성공의 길이 아니라 바른길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 번째 길을 잘 걸었던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뒤에 두 명이 되고, 열 명이 되고, 100명이 되고.... 이렇게 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교회의 다른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만약 내가 생각하는 그 길이 바른 길이라면, 옳은 길이라면 그 길을 내가 먼저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길을 뚫고 나가는, 옳은 길을 찾아가는 거룩한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위험한 일을 당할 때의 최고의 준비는 기도입니다. 21장5절을 보십시오.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위험한 길을 걸어가리라는 것을 모두가 다 알았습니다. 그다음에 그들이 준비했던 것은 기도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어렵고 험난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할 것이 아니라 준비하면 됩니다. 험난한 길을 갈 때의 최고의 준비는 기도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는 길이 험난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 가운데 승리하는, 정말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준비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먼 길 떠나는 사람, 위험한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무장하고 나아가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느 곳을 가든지 기도하는 모습으로 서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한 손길로 보호해 주십니다. 담대하게 그 길 걸어가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험할 때의 최고의 준비는 기도입니다. 기도로 모든 위험한 상황을 이기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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