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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시편 120:1-7/ 거짓된 입술에서 건지소서! [시편]
  • 조회 수: 650, 2016.11.03 19:43:17
  • 시편 120-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동일한 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편들이 각 절기마다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만든 노래집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성전순례시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에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자들에 의해 불려지던 노래로서 원래는 바벨론 포로 귀환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가 이후 절기 때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오는 백성들이 부르는 순례시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봅니다. 시편 120편은 시작하는 시편으로서,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평화를 구하면서 시온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한 순례자의 상황을 묘사하는 기도시입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분위기상 52편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다윗이라고 대체로 추정됩니다. 에돔사람 도엑이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숨은 사실을 사울에게 밀고하여 발생한 고난으로 이해됩니다. 


    1절은 과거의 고난 때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음을 상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믿음이 있다. 믿음의 담력은 한 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에 의해 확신도 강해지는 것이다. 다윗은 과거로부터 풍부한 기도응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 중에서도 여유가 있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2절은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를 가진 대적들에게서 보호해달라고 하는 시인의 간구로서 여기에서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는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대적의 비방과 욕설을 의미합니다. 거짓된 입술은 지속적으로 믿음을 흔들고 의욕을 꺾습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말에 내가 휘말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다른 사람이 그러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그렇게 충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거짓된 혀에 노출될 때 중심을 잡기 힘듭니다. 우리는 얼마나 남의 말에 상처를 잘 받는지요. 얼마나 남의 말에 감정이 흔들립니까? 많은 분들이 사소한 말 한 마디 때문에 시험에 빠지고, 영적으로 침체되고,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립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과 관련해서 잡다하게 들려오는 쓰레기 같은 말들로부터 자기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자제력이 필요합니다.


    3절은 이렇게 말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기를 원하는 표현입니다. 말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자들은 반드시 그에 상응한 댓가를 받게 되리라는 선언인데, 그 댓가는 4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장사의 날카로운 살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하고도 신속한 징벌을 의미하며, 로뎀나무는 그 뿌리가 불을 오래 간직하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 나그네들에게는 좋은 연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로뎀나무 숯불은 꺼지지 않는 불로서 지속적이고도 고통스러운 형벌을 의미한다고 보며 이것은 마치 지옥불을 연상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별에 대해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악한 자들, 악의 열매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벌은 반드시 신속하게, 그리고 한 번 받은 형벌은 더 이상 돌이킬 여지가 없도록 지속적이고도 영원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절에서 7절 까지는 이방인들가 함께 거하는 시인의 괴로운 처지를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메섹은 노아의 아들, 야벳의 아들의 후예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거주했던 이방 족속을 가리키고,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 게달의 후예들로서 수리아와 아라비아 지역에 살았던 이방족속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이방지역에 피신하여 살았을 당시의 괴로움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다윗이 이방 지역에 피신한 것은 그래도 다윗에게 호의를 보였던 이방인 지역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곳이 다윗에게 평안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치관이 달랐고, 신앙관이 달랐고, 문화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평화를 이야기하나 저들은 그를 비웃고, 말마다 싸우려고 듭니다. 물론 다윗이 그들의 삶에 맞추어주고, 이방인처럼 산다면 그들도 좋아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하므로 신앙인에게 오는 위험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들 가운데서 신앙을 지킨다는 그 자체가 고통이고, 둘째로는 본의든, 타의든 이방인의 문화에 동화되어가고 결국은 신앙을 잊어버리든, 아니면 마이너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문화에 우리가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교인들 안에서 사는 것이 힘들 때도 있으나 이방인 가운데 사는 것은 신앙을 지킨다고 할찌라도 고통 그 자체요, 대부분의 경우는 신앙을 잃어버리든, 포기하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84편에서 시인은 바벨론 포로하에서 이방문화를 경험한 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성도 간의 교통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 시민교회는 많은 부분에서 장점이 있으나 성도간의 교통이 부족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마치 남남처럼 교회에 왔다가 가고는 합니다. 이렇게 해가지고서는 신앙이 성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2 시간 정도 예배드리고, 나머지는 성도들 아닌 불신자들과 시간을 보내니 어느 삶이 더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성도의 교통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성도들 간에 아름다운 교통이 이루어져서 교회가 부흥하고, 개인적으로는 신앙이 자라는 우리 시민교회 성도의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자유롭게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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