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삿13:2-14)
  • 조회 수: 151, 2013.01.31 07:47:54
  •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본래 우리가 지키는 어린이 주일은 지금부터 150여년 전인 1856년 북미 메사추셋州 첼市에 있는 제일 유니버샬 교회의 G. H. 레오날드 목사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레오날드 목사는 어린이들의 믿음을 굳게하기 위해서 그 부모가 어린이를 하나님께 드리는 뜻으로 매년 6월 둘째 주일을 특별히 정해서 예배를 드리곤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퍼져서 꽃주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꽃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가정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며 키워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 날은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어린이의 행복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정한 날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행사는 사회적으로도 성대하게 치루어지고, 교회에서도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은 3·1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192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울 천도교의 소년회를 중심으로,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방정환(方定煥),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동이 되어, 5월 l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기념 행사를 치렀습니다.
    1927년 5월의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고, 1939년 일제의 억압으로 한동안 중단하다가, 1946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습니다.
    1957년에는 한국 동화작가 협회가 만든 어린이 헌장을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을 선포하였습니다.
    정부는 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5037호)을 공포하여 어린이날을 공휴일로 정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1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찾아 나오는 것을 금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오히려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그 어린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빌2:3),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마18:3-4)
    어린이 주일, 주님도 어린이를 귀히 여기셨지만 우리 교회도 예나 지금이나 소중히 다루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 주일은 엄격히 말하면 어린이의 명절도 되지만, 사실 어른된 우리들이 경고를 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기운 센 장수 삼손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의 부모 마노아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다 늙어서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받은 아들이 삼손입니다.
    아버지라기 보다는 늙은 할아버지인 마노아에게 아내를 통하여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사자의 전한 소식을 듣고, 아내를 나무라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 준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의 사람 마노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예고"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는 차원을 넘어 마치 아들을 얻은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고민"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
    오늘을 사는 부모된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아니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부모들이 가지게 될 "고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마노아가 고민하는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의 문제를 하나님의 대답에서 찾아 보고져 합니다.

    1. 자식은 누구인가?
    시편 127: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내게 주신 여호와의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곧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낳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시면 자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태의 문을 "닫으시면" 자식을 낳을 수 없고, 하나님이 태의 문을 "열어 주실 때" 자식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야곱에게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창세기 30:1-24)
    언니 레아는 야곱을 통해서 아들 넷을 낳았지만, 동생 라헬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라헬이 언니를 투기하여 남편 야곱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투정을 부립니다.
    이때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세월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시어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여시므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어 살면 때가 되면 아이를 생산하는 것같지만 사실은 함께 산다고 다 자녀를 아들, 딸 마음대로 낳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태를 열어야 임신하게 되고, 하나님이 아들과 딸을 적당히 허락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어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제도도, 가정의 제도도 하나님이 친히 주셨습니다.
    그 가정을 통해 부부의 관계, 부모 자식의 관계, 형제 자매의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가정은 하나님을 중심 해서 있는 최초의 작은 집단입니다.
    이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곧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전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성결은 필수 조건입니다.
    부부간의 성결, 부모 자식간의 성결, 형제 자매간의 성결, 곧 가족 구성원간의 성결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모는 신앙인의 본보기가 되어, 생활하는 삶을 통해 신앙교육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생명이요,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요,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결코 내 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 내 뜻대로 기를 수 없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도, 내 아들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맡겨 주신 기업을 내가 관리를 잘 못하면 이익은커녕 손해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부모를 보게 됩니다.
    맡겨 주신 기업.... 내가 관리를 잘 해야 이익을 남겨 그 기업으로 인한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실제로 자식을 잘 길러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이 긴요하게 소용되며(시127:4)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 "잘 하였다" 칭찬 받는 이들도 보게 됩니다(마25:21).

    2. 기도로 기르라
    본문 8절에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마노아의 믿음에 감탄할 만한 대목입니다.
    "전일"에 아내를 통하여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할아버지 격인 마노아가 의심 없이 그 말씀을 믿고 받아 드립니다.
    더 나아가 아직 생기지도 않은-"전일"에 약속- 아들의 교육과 양육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믿음입니다.
    과연 나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는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아이를 낳는 것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데, 임신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기뻐하며, 축하합니다.
    태교다 뭐다 해서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동안 아이를 통해서 기뻐하고, 좋아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고 아이 때문에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저 인간 어디가서 안 죽나" 하고 저주까지도 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애를 썼지만 어떻게 기를까 고민하지 않고 그냥 방목한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노아 부부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우리 아이를 어떻게 기를까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노아는 기도로 길렀습니다.
    마노아의 기도를 분석해 봅시다.
    (1)어떻게 기르며(양육 문제)
    본문 12절에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라고 기도합니다.
    "이 아이"가 누구입니까?
    본문 8절에 보면 "그 낳을 아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요, 모범적인 부모의 모습이요, 마음 자세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낳을 아이"가 아니라 "낳은 아이"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진정 자식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 본 일이 있는가.... 문제가 생겨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는 기도를 말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생명, 그 생명의 양육을 위해 마노아처럼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한번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자식의 양육을 위해 교육보험을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험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물어 보는 기도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그 보험료는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패륜아의 길을 걷는 아들을 위한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가 "성 어거스틴"을 길러 냅니다.
    끊임없는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 그 모습을 묵상하면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하는 찬송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2)어떻게 행할 것(삶의 본)
    본문 12절에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가정을 먼저 이루게 하시고, 그 가정 속에 "자식"을 주셨습니까?
    이는 주어진 생명에 대한 신앙교육이 "가르침"만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경외, 하나님 찬양, 하나님 예배,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교육은 보고 듣고 따라 배우는 것입니다.
    부모가 걸어가는 신앙의 삶을 보고 듣고 따라 배웁니다.
    다시 말해서 삶을 통하여, 함께 하는 체험을 통하여 배우고 익히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 "아이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생각해 봅시다.
    애기가 태어나 말을 배우고, 얼마지 않아 대화를 하게 되고, 생활에 불편이 없게끔 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려고 시간과 노력을 다해 해 봐도 미국인 애기만큼 빨리 배우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신앙생활도 가르치고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신앙생활을 보고 듣고 따라 배우고 익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정을 먼저 이루게 하시고, 그 가정을 통해 "자식"을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2:12절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엘리 대제사장의 집을 잘 압니다. 그는 대제사장입니다.
    어찌해서 그에게 "불량자"란 아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더욱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아들"이 있을 수 있는가.... 말입니다.
    대제사장의 집 아들들이 말입니다.
    사무엘상 2:29절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엘리는 이미 대제사장의 자격을 잃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끊어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자식을 하나님 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부모에게서 무슨 신앙을 본받겠는가.... 보고 듣고 따라 배우는 것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일 뿐입니다(삼상2:17).
    결국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하나님 신앙"을 삶을 통해 본을 보여 보고 듣고 따라 익히게 하지 못한 엘리 대제사장의 가정은 부모에게서부터 실패의 내리막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 뒤를 따르는 그 자식들의 최후도 패망밖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3. 말씀으로 기르라
    본문 13-14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를 기도한 마노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곧 기도의 응답이요, 물음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맡기시고, "내 몰라라" 방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실은 창조자요 소유자이신 하나님이 "그 생명"에 관해서 제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를 아시고, 그의 필요를 아시고, 그의 요구를 알고 계십니다.
    부모라고 자식을 잘 압니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 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1)들려주신 말씀
    본문 13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라고 했습니다.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를 기도한 마노아에게 들려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삼가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살라 하십니다(민6:1-8)
    하나님이 들려 주신 말씀, 오늘날에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러야 합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하십니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문설주에도 기록하여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2)어려서부터
    시편 71:17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 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어려서 받은 교훈이 자신의 한 평생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듣던 재미있는 그 이야기, 그것이 재미만이 아니었고, 진한 감동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무릎 위에 앉아서 듣던 재미있는 이야기.... 그것이 오늘의 어머니가 읽어 주는 동화책 이야기가 아니라 어머님의 은혜 체험이 있고, 진한 감동과 눈물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라!
    히브리서 11:23-26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의(출6:20) 무릎 위에서 젖떼기까지 자랐습니다.
    그 동안에 어머님이 들려주신 말씀, 보여 주신 신앙생활....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를 노래하며 바로의 아들의 지위를 버리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자청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림 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난받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히 여겼습니다.
    왜? "상 주시는 이" 곧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경우를 보라 !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입니다(삼상1:12).
    어머니 한나의 무릎 위에서 젖떼기까지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어머님의 들려주시는 말씀, 어머님이 보여 주시는 신앙생활의 본을 보고 듣고 따라 배우고 익히고 자랐습니다.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 법입니다. 
    어머니에게서 기도하는 삶을 보고 익힌 사무엘의 삶입니다.
    그가 어머님의 곁을 떠난다 해서 그의 삶이 변하겠는가.... 불신앙의 삶이 판을 치는 엘리 대제사장 곁에서도 그의 삶은 변치 않고 기도하는 삶이 이어졌습니다(삼상3:3).
    잠언 22: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어려서 배우고 익힌 삶은 시간이나, 환경의 변화에도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보고 듣고 따라 익힌 사무엘의 신앙생활이기에 환경이 달라져도, 삶의 방식이 달라져도 바뀌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의 등불이 되어 기울어져 가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로 세웠습니다.

    디모데를 보라!
    딤후 3:14-15절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합니다.
    누구에게서 배운 것도 알았습니다.
    외조모 로이스가 어머니 유니게에게, 어머니 유니게가 아들 디모데에게 무릎에 안고 기도로, 말씀으로 가르치고 길렀습니다,

    4.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르라
    본문 5절에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구별하여 헌신한 사람을 말합니다.
    자원하여(민6:2), 부모의 서원으로(삼상1:11), 하나님의 명령으로(본문5절) 나실인이 됩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 헌신하는 경우와(행18:18) 한 평생을 바쳐 헌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삼상1:11)
    하나님이 주신 선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을 위한 사람, 하나님께 자신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하나님께 속한 사람
    어차피 우리 인생은 둘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였나? 아니면 사탄에게 속하였나? 그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요, 하나님의 자녀이요,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

    (2)하나님을 위한 사람
    크든 작든 하나님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내버려두고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 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우선주의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위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적어도 자신의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마16:24) .

    (3)하나님께 헌신한 사람
    나실인과 같이 자신을 특별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운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한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며, 결국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롬14:8).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빌1:20).

    이런 하나님께 바치운 자, 하나님을 위하는 자, 하나님께 속한 자로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부모에게 주어진 책임이요 의무입니다.

    이 5월에 맞이하는 가정의 달, 우리 다시 한번 짚어 봅시다.
    장영수씨 한국일보 칼럼에 4가지 형태의 부모를 말했는데
    ① 밀모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식을 팍팍 밀어주는 부모.
    ② 뛰모 : 자녀와 함께 예습하고, 과외 공부,학교에 따라 다니는 부모.
    ③ 지모 : 공부하는 자녀 옆에서 뜨개질하면서 지켜주는 부모.
    ④ 주모 : 자녀가 공부하든 말든 주무시는 부모.

    부모가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자식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기도의 자식이 망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성경 말씀 들으며 자란 아이가 망하는 법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자식은 기도로, 말씀으로 기릅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릅시다.
    하나님의 소유를 나의 잘못으로 사탄에게 빼앗기는 잘못을 범하지 맙시다.
    "잘 했다" 칭찬 듣는 관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자식의 탓으로 돌리지 맙시다.
    "게 걸음"을 걸으며 자식을 향해 부모의 권위를 휘두려며 "똑바로" 걸으라고 하지 맙시다.
    "똑바로" 걸어라 호통치기 전에 "똑바로" 걷는 모습을 보여 줍시다.
    그리하면 절로 보고 듣고 따라 익혀서 "똑바로" 걷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맙시다!
    어찌할 바를 몰라 갑갑하고 답답할 때 『우리 아이 어떻게 기를까?』 하나님께 기도 드립시다.
    그리하면 언제나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늘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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