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룻 1: 15-18)
  • 조회 수: 255, 2013.01.31 21:46:43
  •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유다 베들레험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그는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모압은 이스라엘과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모압은 이스라엘과는 먼 친척의 나라였으나 종교가 달랐다.
     
    여러분!
    종교가달랐다는 것은 섬기는 신(神)이 달랐다는 것이다.
    서로 섬기는 신이 달랐으니, 삶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은 중요하지 않은지 관점이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한 형제일지라도 종교가 다르면 외적인 연합은
    될 수 있을지라도 내적인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없다.
     
    오죽했으면 엘리멜렉이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섬기는 신이 다른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겠는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것은 그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모압 지방에서 엘리멜렉이 죽고 만다.
    그의 아내 나오미는 그래도 어렵게 두 아들을 맡아기르다가
    거기에서 모압 여인을 택하여 결혼을 시킨다.
     
    그렇게 십년쯤 살았는데 그 두 아들마저 죽고 만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동그나미 남았다.
     
    당시 사회에서 홀로 된 여인은 살길이 막막했다.
    더욱이 친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방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두렵고 답답할 수밖에 없다.
     
    나오미는 재혼기에도 너무 나이가 들었다.
    그러던 차에 유다 땅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 대해 생각하던 나오미는 안되겠
    던지 두 며느리에게 "각각 너희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한다.
     
    다시말하면 두 며느리에게 재혼하여 평안하게 살라고
    권고한 것이다.
    여기에서 두 며느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는 그들이 비록 모압 여인이었으나 유다 집안에 시집을
    왔으니 유다의 풍습을 따르며 사는 것이다
    남편은 죽었어도 시어머니는 살아 있으니,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시어머니 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시어머니로 대표되는 유다인들과의 관계요,
    유다인들의 삶의 방식과의 관계요, 유다인들이 믿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이다.
     그것은 신의(信義)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또 하나는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맞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오미의 두 며느리 이름은 각각 오르바와 룻이었다.
    나로미가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은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배려해서이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마저 고통스런 삶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두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나오미에게는 분명
    고통스런  일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이익보다 며느리들의 이익을 앞세웠다.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권면에, 오르바는 실리를 좇아
    친정으로 돌아갔고, 룻은 의리를 좇아 시어머니를 따랐다.
     
    만일 여러분이 나오미의 며느리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여러분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며 살겠는가,아니면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겠는가?
     
    그 "해야만 하는 일"이 사회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들은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고 "해야만 하는 일 "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어한다.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 큰 간격이 있는 것이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내가 "해야만 하는 일" 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일치 될 때 나는 가장 편안하고 만족한 삶을 살수 있다.
    예전에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일"보다 앞세웠다.
     
    그런데 요즈음 세대들은 "해야만 하는 일"을 거추장스럽게 여겨 던져 버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자 한다.
     
    친정으로 돌아간 오르바가 그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알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성경은 더 이상 오르바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르바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러나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른 룻은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험으로 온 룻은 생계를 위해 보리와 밀을 거두는 밭에 가서 이삭을 줍다가 밭주인인 보아스의 눈에 띄게 된다.
     
    당시에 밭을 가지고 추수하는 사람들은 생계가 막막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보리와 밀을 완전히 베지 아니하고 밭 모퉁이의 일부를 남겨 놓았으며, 떨어진 이삭을 그대로 두었었다. (레 19: 9)
     
    가난한 자들은 그 떨어진 이삭을 줍거나 베지 않고 남겨 놓은 밭 모퉁이의 곡식을 따다가 생계를 유지했다.
    보아스는 에리멜렉의 친족이요, 결국 친족의 의무로 자식이 없는 룻과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기업을 잇게 해준다.
     
    여러분!
    보아스가 룻에게서 낳은 아들이 오벳이었는데 , 그 오벳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였다.
    이 때문 모압여인 룻의 이름은 다윗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고 , 그것은 곧 메시아인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 1: 5, 6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 오벳은 이새를 낳고 ,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어떻게 메시아의 족보에 오를 만큼 믿음의 여인이 되었을까?
     
    세상 풍속을 따라 자기가 원하던 것을 하며 살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나님을 원수같이 여기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배척하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것은 룻이 세상풍속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유다땅에 흉년이 든 것과,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모압지방에 간것과,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은것과, 나오미의 두 아들이 모압여인과 결혼한 것과 ,나오미가 유다로 돌아가려 했을 때 룻이 시어머니를 따른 ,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그 모든 과정에는 결국 룻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하나님은 룻의 신앙과 사랑을 쓰셨고  룻의 신앙과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게획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룻에게 복을 주셨다.
     
    룻의 신앙과 사랑이 바로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사랑이 되기를 간구한다.
     
    룻은 어떤 신앙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을까?
     
    (1)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룻은 우상을 섬기던 이방 여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유다인에게 시집을 왔다.
    여인이 하나님을 믿는 집안에 시집을 왔다고 하여 이전에 자기가 믿던 신앙을 버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개종(改宗)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존재와 인격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는 결단이 없으면 여간해서 개종을 할수 없다.
    그런데 룻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했다.
    룻이 그렇게 할수 있었던 것은 , 룻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룻은 마음이 청결했다.
    예수님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것이라."고 했다.(마 5: 8)
    룻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과 생명을 의탁했다.
     
    룻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 가 된 것이다.
    룻이 유다인에게 시집와서 제일 귀한 것을 얻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룻이 그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거절했고, 우상을 섬기는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도 거절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모세와 바울도 이와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는 자기 밭에 이삭을 주우러 온 룻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다.(룻 2 : 12)
     
    여러분!
     
    세상 풍속보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때 복을 받는다.
    "오직 하나님"- 이 믿음으로 살 때 우리의 삶의 상황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영원한 축복으로 인도해준다.
     
    (2)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세속적인 흔한말로 하면 , 남편이 죽고 없을뿐만 아니라. 자식도 없는 이상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든지 시어머니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수 있었다.
    그러나 룻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는 각오는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사랑을 나타낸다.
    룻인들 어디 시어머니가 모두 마음에 들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가볍게 행동하지 않았다.
    "죽는 일 이외에는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는 룻의 마음은 끝까지 신의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여러분!
     
    이 사랑, 이 신의가 복 받는 길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풍성함"과 "마음의 욕구"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
    풍성함은 자칫 잘못하면 공허함을 가져오고 자신을 무료하게 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며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된다.
    욕구는 더 많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감정과 욕구에 충실하기 위해 신의없이 살다보면 불쾌한 기분과 죽은 껍데기만 남는다.
    룻은 시어머니를 버리지 아니했고 , 추수하는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다가 시어머니를 공양했다.
    이 소문이 보아스의 귀에까지 들렸다.
    보아스가 후에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연유에는 룻에 대한 이러한 소문이 큰 몫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굳게 믿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신의를 굳게 지킨 룻을 하나님께서 영원한 복으로 보응해 주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여러분 !
    세속적 실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속적 실리는 허무한 것이요 지나가는 것이다.
    참된 실리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의와 사람에 대한 신의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영원한 실리를 얻는 길이다.
     
    변함없는 신앙과 변함없는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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