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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中路)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그 백성들과 동행하시면서 말씀도 하고 책망도 하고 위로도 하시던 그 교제를 그만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철회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이 얼마나 심각한 비극인지 알지 못합니다. 당장은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공급은 계속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도움이 되어 주시고 계속 내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공급이라는 것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계속됩니다. 성경에 보면 산상수훈 가운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햇빛과 비를 의인과 불의한 사람에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보편은총' 또는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누구에게나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이 계속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매우 무서운 비극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출애굽기 33장 4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그들은 슬퍼하기 시작했습니다. 참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자격이었던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
그 중보기도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가나안까지 이 백성을 이끌고 가려면 그렇게 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그리하셔야 제가 다시 힘을 얻어 제 여정을 마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의 중보기도 내용을 세밀하게 보자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함께할 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22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 이 길은 저 홀로 가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길 아닙니까? 함께할 자를 보내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지만 진실한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단절, 인간 소외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굴과 얼굴이 만나지 못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마치 얼굴 없는 사람들처럼 사람 사이의 진정한 만남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모세의 생애를 연구해 보면 모세는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모세는 인간에 대한 실망을 경험했으면서도 인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려면 동역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함께 갈 자를 보내달라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동안 모세의 동역자이자 형제인 아론은 산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백성들을 충동질해서 우상숭배의 범죄를 하도록 유도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모세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모세는 여전히 인생은 홀로 살 수 없다 생각하고 함께할 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인생길에 반려자가 필요합니다.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 진실한 믿음의 이웃들, 형제 자매들을 만나 그들을 통해 위로받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위로를 느낍니다. 그들을 통해 격려 받으면서 하나님의 격려를 느낍니다.
둘째로, 은총의 표정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13절). 그리고 좀 더 담대하게 이런 요청도 합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절).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반석위에 섰으라"(21절)고 하셨습니다. "내가 지나갈테니까 너는 반석에 들어가 숨어 있으라. 내가 지나간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마"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의 편린(片鱗)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영광 전체를 계시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영광 앞에 설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 전체를 계시하는 것을 유보하셨습니다. 다만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 곁에 지나간다는 표를 보여 주마. 나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마" 라는 뜻의 기도 응답만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실 모세는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나쁜 동기가 아니라 좋은 동기로, 시험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정말 좋은 동기로 하나님이 계신가 시험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시험하는 것은 허용하십니다. 예컨대 말라기서에서 "한번 십일조를 드리면서 내가 축복하나 안 하나 시험해 보라"(3:10 참조)고 하셨습니다.
인생길에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가나안까지 도달하는 동안 그 백성을 인도하시겠다는 약속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중간중간에 확인시켜 주시지 않으면 쉽게 시험에 들 것이기에 모세는 "내가 주의 은총 받은 사람이라는 징표를 보여 달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속한 기도 응답
모세가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받았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실하게 회개했습니다. 참회했습니다. 이 중요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33장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숭배하고 그 잠시를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께 시선을 떼고 방황했던 범죄에 대해 그들은 진심으로 슬퍼하며 참회했습니다.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않은 것은 단장하는 것이 죄라서가 아니라 외부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진노케 했던 비참한 마음 상태를 바라보며 그들은 진정으로 경건한 참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5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목이 뻣뻣하다는 것입니다. 목이 뻣뻣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시기가 곤란합니다. 목이 부들부들해야 하나님께서 끌고 다니기 좋고 일 시키시기 좋은데, 목이 곧으며 쓰실 수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경배하기 위해서는 자세를 낮추어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회개하여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회개하며 엎드립니다. 이 회개가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과연 어떤 응답을 받았습니까? 그날 모세가 중보기도하여 응답받은 내용의 정체가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친히 가겠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편견으로 오해하게 되는 원인의 하나는 지나치게 경직된 신학적 교리, 소위 잘못된 도그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한 공부를 할 때 마치 하나님이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인간을 다루시는 것처럼, 그리고 한 번 계획하면 요지부동으로 우리를 그리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으로 상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같이 안 가겠다고 말씀하셨다가도 백성들이 참회하며 회개하면서 기도했더니 그 뜻을 바꾸어 같이 가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융통성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역사와 인생에 대한 큰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고착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주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우리 삶에 간섭하시고 사랑과 긍휼로 우리 삶에 다가 오시사 우리와 더불어 교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울며 호소할 때 마음도 바꾸시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에 기도의 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생각을 달리하시고 우리에게 제2의 기회도 주시고 색다른 인생의 선택도 하게 하십니다. 이토록 부드러우신 하나님, 이런 인격적인 하나님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시오 당신의 하나님이신 것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친히 같이 가리라."
그런데 함께할 자를 보내 달라는 기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기도만은 하나님이 제3의 인물을 보내 주시는 쪽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제가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이랬을 것 같았습니다. "바꿔 봤자 인생은 다 마찬가지다. 그냥 아론과 여호수아와 같이 가라."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경험하면 종종 "한번 바꿔봤으면 좋겠다. 새로운 사람과 일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봐꿔 봤자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함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려운 상황 속에 주께서 개입하시면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장악하시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 "내가 너로 편케 하겠다."
모세에게 응답으로 주신 하나님의 첫째 약속과 두 번째 약속 이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주께서 나와 더불어 같이 하신다는 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임재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이란 것은 단순히 활동의 중단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새로운 창조'(recreation)입니다. 또한 '새로워지는 것'(refreshment)입니다. 새로이 충전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이런 열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라도 해본 사람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깊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전혀 없다면 아직도 가짜일지 모릅니다. 참된 신앙인의 마음속에는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기 원하십니까? 저는 무엇보다 모세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 임재의 회복을 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아가기를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당당하게 투명하게 순전하게 사십시오.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든지 간에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기뻐하고 평안하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증언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친히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편하게 하리라. 내가 너에게 안식을 주리라." 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안식과 임재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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