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복의 길 (룻 2 : 11 - 23)
  • 조회 수: 223, 2013.02.01 07:38:29
  • 룻기 2장 11절에서 23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축복의 길』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룻이라고 하는 모압 여인을 이 세상에서 아주 복된 길, 모든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만한 복된 길을 걸어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걸어간 그 "축복의 길" 을 본문이 가르쳐 주는대로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1. 믿음의 축복(11절)


    본문은 모압 여인 룻이라고 하는 여자가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평생 "축복의 길" 을 살아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룻이 걸어간 이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안 믿으면 모르지만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는 복을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건강도 복이고, 지식도 복이고, 재간도, 재물도 복입니다. 그리고 가정도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입니다. 이런 복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 필요하고 좋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귀한 복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는 세상의 것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우리들에게는 믿음이 가장 근본적인 복이기 때문에 믿음을 큰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룻은 바로 이런 믿음의 축복, 바로 그 길을 걸어간 사람입니다. 여기 보면 그 믿음의 복에 대해서 세 가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11절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항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기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이 룻이라고 하는 모압여인에 대한 여러가지 소문을 다 들어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남편 죽은 일, 남편이 죽은 뒤 시어머니를 잘 모신 일, 그 다음에는 자기 부모와 고국을 떠나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일들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오늘 본문의 앞장인 1장에 있기 때문에 읽지는 않고 설명만 드리겠습니다.


    첫째, 붙잡는 믿음


    보아스가 룻에 관해서 들은 소문이 세 가지인데 첫째는 붙잡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베들레헴에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던 어느 해 전 재산을 다 팔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그곳에 가서 사는 동안 두 아들이 결혼하게 되고 한 10년간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안에 어려운 사정이 겹쳐드는데 먼저 호주인 엘리멜렉이 죽었고,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잇달아 죽자 세 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0여 년이 지난 후에 모압 땅에 아주 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 곳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고향 땅으로 돌아 옵니다. 고향 땅에 돌아와 보았자 땅 한 평 없는 알거지 신세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아무리 평안을 찾아 다녀도 이 세상에서 참 평안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또 그 다음에는 그곳에 가보나 이곳에 있으나 별것이 없고 하나님을 잘 믿어야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어미니가 이제는 하나님의 보호받을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두 과부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으로 떠나갑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시어머니 생각에 두 며느리가 불쌍해 보였던지 너희 친정과 너희 민족에게로 돌아가고, 너희 부모에게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나를 따라와 봐야 아무 득이 없고, 소망이 없으니 너희 형제에게 돌아가서 새로운 길을 찾아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시어머니의 강권에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못 견디는 척하고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작은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붙잡고 "어머니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난 어미니를 좇아 가겠습니다." 이렇게 시어머니를 꼭 붙잡고 따라왔던 것은 그녀의 믿음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룻이 붙잡았던 이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분명히 시어머니의 형편을 보면 고생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님께 돌아가면 재혼의 희망도 있고 훨씬 고생을 덜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하는 것이 비록 고생이 된다 할지라도 시어머니를 버릴 수는 없다 생각하고 한사코 약속의 땅을 찾아 왔으니 이것은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희망이 없는 오늘의 평안보다는 비록 힘든 고생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의 땅을 찾아가는 것이 보다 나은 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믿으며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의 길이란 현재의 만족을 찾거나 현재의 평안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는 고생스럽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참 소망의 길을 찾아 살아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바라보고 현재의 고생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붙잡고 가는 믿음, 이것이 바로 룻이 걸어간 믿음이요, 룻이 가졌던 믿음이요, 이것이 바로 축복의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가져야 할 믿음은 붙잡는 믿음이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둘째, 개종한 믿음


    다음에는 개종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돌아가야 될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 나이에 다시 시집갈 수도 없지 않느냐? 또 내가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언제까지 기다리겠느냐, 그러니 다 친정으로 돌아가고 너희 신에게로 돌아가(15절 참고)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역사적인 배경은 우리로서는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에는 나름대로의 결혼법이 있었는데 이것을 '수혼법' 이라고 합니다. 형제가 여럿이 있을 때 맏형이 장가 갔다가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 듭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낳으면 첫아들로는 형의 대를 이어주고 둘째부터는 자기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결혼법대로 한다면 두 아들이 다 죽어서 대를 이을 수가 없고 또 이제 아들을 낳을 수 없으니 일찌감치 나를 포기하고 동족에게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때에 오르바는 그 말이 그럴듯해서 돌아갑니다. 그러나 룻은 내가 다시 시집을 못가고 결혼을 못해도 좋으니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도 섬기며 어머니를 따라 유대나라로 가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 이상에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보압 땅으로 다시 돌아가서 내 조상의 신 그모스를 섬기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나 죽으나, 또 시집을 못가도 좋으니 하나님만 섬기고 살겠다는 것이 바로 룻의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모스' 우상에게서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이 말씀의 교훈은 우리가 이왕 하나님을 몰랐다면 몰라도 이젠 하나님을 알았고 예수를 믿은 바에는 이런 역경 저런 어려움이 달쳐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저버리고는 못산다는 이것이 바로 룻과 같이 모압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난 개종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고 믿기 시작했기 때문에 역경과 고난을 무릅쓰고 끝까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살아가는 길에 희망과 축복이 있다고 하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결사적인 믿음


    다음에는 결사적인 믿음입니다. 그 내용은 "어머니 저는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어머니 내가 죽기 전에 돌아가란 말씀 하지 마십시오. 나는 죽어도 어머니와 함께 죽고, 또 죽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에서 하나님을 믿다가 죽겠습니다." 라는 뜻의 내용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룻은 죽는다, 죽는다는 말을 몇 번씩 거듭하는데 이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어머니와 살고, 또 죽기를 각오하고 믿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사적인 삶의 자세요, 결사적인 믿음의 자세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이러고도 살아야 되는가! 자살하는 것이 죄만 아니라면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죽을 용기 가지고 한번 살아 보십시오. 자살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룻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사적인 믿음으로 그 환경을 이겨 냈습니다. 일이 되나 안되나 여러분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뭔가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룻은 결사적인 믿음의 자세를 갖고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룻이 승리하였고 복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이런 축복의 길로 인도한 것임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2. 상급의 축복(12-16절)


    다음에는 상급의 축복입니다. 상급의 축복은 12절에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보아스가 베들레헴에 사는 룻이라고 하는 여자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우연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룻이 바로 자기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기 시집인 고향 땅에 돌아왔는데 그곳이 베들레헴 이었습니다. 자기로서는 생소한 곳이지요. 돌아와 본들 땅 한 평 있습니까? 그날부터 이삭을 주어다 먹고 살았습니다. 이삭 주우러 들에 나가서 줍다 보니 그곳이 보아스의 밭인데 자기의 먼 친척입니다. 그러나 아직 얼굴을 한번도 본 일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그 밭 주인 보아스가 일꾼들이 일하는 곳에 나왔다가 이삭을 줍는 룻을 보고 물었습니다. 일꾼들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온 룻이라고 대답하자 룻을 불러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네가 이렇게 시모님에게 잘했고 또 하나님의 날개밑에 보호 받으러 왔는데 네가 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응을 하시고 온전한 상급을 주시길 원하노라 하고 축복했더니 그것이 룻기 4장에 가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진 상급이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결혼의 상급


    룻이라고 하는 모압 여자는 한 번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어 과부된 여자입니다. 또다시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리라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또 자기 시어머니가 돌아가라고 할 때 한사코 따라 왔지만 결혼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예측도 못하고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삭 줍던 밭의 주인인 보아스라고 하는 남자가 나중에는 자기를 아내로 맞아 줍니다. 맞아 주게 된 동기는 유대 나라 법에 의해서입니다. '기업 무를 자' 라고 하는 것이 룻기에 자주 나오는데 이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를 들어서 형이 망해서 땅을 다 팔았어요. 살 길이 없어요. 그럴때에는 동생이 형의 판 땅 값을 전부 지불하고 그 땅을 물러 줍니다. 그리하여 형의 이름으로 다시 이어 주는 것인데 이것을 기업 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 형제가 있으면 형제가 해야 되고 친 형제가 없으면 삼촌이 해야 되고 삼촌이 없으면 사촌이 하고 사촌이 없으면 오촌이 합니다. 그렇게 하고 아주 먼 친척으로 가서라도 물러줘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먼 친척되는 보아스 밖에 그 집안엔 없었습니다. 그때에 보아스가 거창한 손해가 나지만 다 물러주고 그 다음에는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는 동안에 기업을 찾아서 죽을 때 까지 그 기업을 누리도록 해 주겠다고 다짐한대로 그 기업을 다 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며느리를 아내로 맞이하여 결혼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룻에게 장가들었습니다. 아직도 장가 간 일이 없는 보아스 아닙니까? 그런데 너무 좋은 총각이고 또한 사람도 좋고 베들레헴에서 알아주는 부호요 갑부입니다. 전혀 생각밖에 좋은 사람과 룻이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누구나가 탐을 낼만한 사람에게 결혼한 것이지요.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짝을 지어 주었고,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주신 결혼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명예의 상급


    두번째로는 명예의 상급입니다. 보아스가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에게 기억을 찾아서 물러가지고 모두 이어준 다음에 그 성읍에 사는 장로들과 백성들이 모인 앞에서 참 훌륭한 친척이라고 칭송을 받을 때에 그가 하는 말이 룻을 나의 아내로 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더 훌륭하게 돋보였습니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이 "네 집에 시집가는 이 룻이 우리 이스라엘의 조상, 열두 아들을 낳고 열두지파의 어머니가 되는 레아와 라헬과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온 백성이 하나같이 축복을 해줍니다. 그 백성의 조상이요, 할머니가 되는 레아와 라헬과 같은 그런 여인이 되라고 하는 축복은 여자의 명예로서는 최고의 명예입니다.

    이런 명예의 축복을 받는가 하면 아브라함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창세기 몇장 밖에 없지만 룻기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룻에 관한 것뿐입니다. 그를 위해 책이 하나 씌여져 성경에 들어가는 명예, 이런 명에가 어디 있습니까? 결혼의 축복과 명예를 축복으로 함께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고 두고 룻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습니까? 그래서 이 룻기는 우리가 룻을 존경할만한 여자라 생각하고 자녀들에게 타일러 주는 좋은 교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룻과 같이 아름다운 명에를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가는 사람은 실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족보의 상급


    다음에는 족보의 상급입니다. 백성들과 장로들이 보아스가 룻에게 장가를 들 때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베레스라고 하는 아들을 낳은 것처럼 바로 이 여자를 통해서 그렇게 훌륭한 자손 보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축복을 했더니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서 오벳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을 키워서 장가 보냈더니 그 아들이 이새를 놓고 또 손자를 보았는데 그 손자가 바로 다윗 왕입니다. 그러니까 룻이 낳은 그 아들이 바로 다윗 왕의 친할아버지인 것입니다.

    모압 여자로는 엄두도 못낼 이스라엘 왕의 족보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족보에서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방인으로 만민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가 하면 우리는 본래 아담·하와의 원죄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엡2:3)" 태어난 우리가 아닙니까? 즉 모압 여인처럼 우리도 예수 믿고 예수를 만나 예수의 족보, 하나님의 족보, 천국의 족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족보의 축복은 귀중한 것입니다.


    3. 효도의 축복(17-23절)


    부모님이 안계시면 효도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살아 계셔야 효도를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처럼, 즉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것처럼 큰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싶어도 모실 수가 없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남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부모님 모시고 효도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목사님 말도 마세요. 부모님들이 얼마나 주책을 부리는데 모시고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요?" 아마 속으로 이러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주책을 부리면 얼마나 부리겠습니까? 내가 어렸을 때 주책 부리는 것처럼 그 이상의 주책을 부리겠습니까? 내 부모가 나를 낳아 기르던 때는 부모님 무릎에다 대소변을 누지 않나, 밥 먹는 옆에서 제 볼일을 보질 않나!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가 더럽다 안 하시며 다 치워주시고 심지어 변을 봐도 색깔이 좋으면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내 무릎에다 대소변을 보던가요, 아니면 밥상 옆에서 제 볼일을 보던가요? 여러분이 어렸을 때에 주책을 부린 그 생각은 하나도 기억하지 않고 부모님이 나이가 좀 드시면 염려스러워서 한 소리를 또 하시는 것인데 잔소리가 많다고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생각하고 불효를 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도한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인 것입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자녀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처럼 생각하면 정말 큰 축복을 받을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6장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공경하는 효도


    그러면 룻이 어떻게 효도했나 봅시다. 2장 17, 18절을 보면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라는 말씀에서 공경하는 효도를 보게 됩니다. 아마 본문을 보고서 어떤 이들은 "우리는 시어머니한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아주 따끈한 밥, 아주 좋은 것을 정성껏 준비하고 또 맛있는 반찬을 차려 잘 드리는데요. 시어머니를 저 룻처럼 얻어다가 먹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보다 내가 얼마나 효도를 잘하고 있습니까"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상황이 다른 이야기 입니다. 다 먹고 남는데 못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며느리 되는 룻은 이삭을 주워서 겨우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을 먹으면 내일 먹을 것은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던 보아스가 그래서 떡을 점심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룻은 시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걸 다 먹지 못하고 꾸려 가지고 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음식을 준 사람에게 보통의 결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달리 생각하면 더 달라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먹고, 일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배가 고픈데 실컷 먹고 싶지 않겠습니까? 젊은 여자가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다보니 얼마나 시장했겠습니까?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에게 돌아와서 "나는 점심을 많이 먹어서 안 먹어도 됩니다. 어머니가 많이 드십시오" 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자식이 부모님께 공경하는 효도입니다. 우리가 먹고 남을 때 그 다음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 먹고라도 공경하는 것 이것이 부모님께 대한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공경하는 효도, 내가 못 입고라도 어머님께 먼저 옷 한 벌이라도 해 드리는 효도, 내가 못먹고라도 어머님께 먼저 대접할 줄 아는 효도, 이것이 정말 축복받을 만한 효도입니다.


    둘째, 보고하는 효도


    두번째는 보고하는 효도입니다. 19절을 봅니다.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여기 보면 그날 하루 종일 며느리 룻이 되어진 일을 다 말씀드렸던것입니다. 시어머니는 하루 종일 손자가 있습니까, 손녀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남편이 있습니까? 시어머니는 이 며느리가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돌아와서 "어머니는 몰라도 돼요. 기도나 하고 계셔요." 만약에 이렇게 했다고 하면 세상에 떡 한 조각 얻어다 준 것이 효도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그렇게 궁금하게 기다리는 시어머니께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다 말씀드리니 얼마나 시어머니가 좋아하실 것입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어머니는 아들 며느리 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서도 "아, 내 아들이 지금 사업하는데 큰 위기로구나. 오늘 내일이 고비인 것 같다." 그렇게 안타까와 하면서 뭔가 속 시원히 알지 못하여 괴로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아들이 돌아오면 "얘, 무슨 일이 있냐? 어떻게 됐냐?" 이렇게 물으실 때에 제대로 된 자식 같으면 "네 어머니 기도해 주세요. 오늘 내일이 고비인데 지금 상황이 이런 저런 상황입니다. 정말 잠이 제대로 오질 않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옷을 갈아 입고 밤에 교회 나와서 밤새도록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요. 이런 때의 기도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아들 같으면, "어머니는 몰라도 돼요. 그저 기도만 하세요!" 라고 할 것입니다. 그저 기도만 하라니, 무얼 알아야 기도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럴 때엔 어머니께 다 보고해서 알려드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머니가 걱정도 같이 하게 되고 함께 기도 하시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버지 어머니께 내 사정을 잘 아뢰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참여하게 할 때에 부모님이 큰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렇게 보고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동거하는 효도


    다음에는 동거하는 효도입니다. 23절에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그런데 요즘은 핵가족 시대가 되어서 맏아들도 장가들면 따로 나가고, 둘째 아들도 장가 들면 따로 나가고, 셋째 아들도 따로 나가고 결국 막내하고 살다가 막내마저 장가들면 할 수 없이 두 내외만 남아 따로 살게 됩니다. 이럴 때 자식들이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우리 부모님은 참 현대인이야" 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참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입니다. 부모님이 따라 살고 싶어서 살림을 따로 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살면 아들 며느리가 불편할까봐 나가 살라고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나이 많으신 아버지 어머니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고 싶지 않고 손자 손녀와 함께 살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나이가 들면 얼마나 적적하고 외로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룻을 보십시오. 이삭을 주워다 먹을망정, 밥은 못해먹고 죽을 쑤어 먹을망정, 고생을 해도 같이 하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동거의 효도입니다. 즉 모시고 사는 효도입니다. 룻이 바로 이런 효도를 하고 엄청난 축복과 상급을 받은 것입니다. 룻이 받은 축복만 탐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가졌던 믿음, 그가 행했던 효도는 바로 우리가 바로 가져야 할 믿음이요, 효도입니다.


    결론적으로 룻은 이렇게 축복의 길을 살다 간 여인입니다. 우상의 나라 모압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생활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결국 '믿음' 이라는 최고의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상급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어미니를 모시고 효도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우리도 룻과 같은 축복의 길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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