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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창세기 4:1-15/ 예배가 일생을 결정짓습니다. [주일낮]
  • 조회 수: 923, 2013.02.02 16:49:01
  • 각 사람마다 성공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배워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는 대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자식은 가르쳐야 한다고 믿고, 많이 배워야 세상에서 남보다 앞서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노력을 통해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들은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구호를 하루에도 수십 번 외치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쉬지 않고 열심히 뛰어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이는 인간관계가 성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의 성공 비결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결국 '공부 잘하자', '열심히 노력하자', '인간관계 잘 이용하자' 등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공의 출발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창 4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으로 갈라지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으로 갈라지게 만듭니까? 바로 '예배'였습니다. 결국 예배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백성과 버림받는 백성의 판가름이 났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도 어디서 갈라지냐 하면 바로 예배에서 갈라집니다. 하나님의 인정함과 열납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예배에서 인생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 하나님이 축복하는 교회, 하나님이 역사하는 나라가 되는 비결도 모두 이 예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의 예배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똑같이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예배하고 난 다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쳤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예배하고 난 다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급기야는 예배하고 난 다음에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사람을...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돌로 쳐 죽이는 무서운 죄악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배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삶에서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실패한 자는 생활에서도 실패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당을 짓고... 이런 것은 다 실패한 예배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인이라는 이름, 직분의 타이틀을 가졌다고 참 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원래 멋진 이름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내가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얻게 하신 아들이라는 의미가 그 이름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쫓겨난 후에 상실감, 외로움을 느꼈기에 아들로 말미암아 큰 위안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인은 성장하면서 부모에게 위안을 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기대하고, 소망하고, 의지할 자녀가 되지 못했기에 자식도 필요가 없구나... 허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아들을 낳고서는 허무를 뜻하는 아벨이라 이름을 짓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나 허무했으면 아들 이름을 '허무하다'는 뜻을 가진 아벨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인생은 허무하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저주받은 삶은 참으로 허무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름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름만으로 보면 가인은 멋지죠. 신앙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무엇 때문에 살인자가 되었습니까? 예배의 실패자 됨으로, 예배의 실패자가 됨으로.....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한 번은 두 형제가 한 날 한 시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하기를 마쳤을 때는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이 드린 제사는 기쁘게 받아주셨지만 가인이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것에 대한 증거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드린 제물과 아벨의 드린 제물이 겉으로 보기에는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린 결과로써 얻은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나.... 바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제사의 제물, 방법, 제사하는 자의 마음과 그 자세... 이런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 제사하는 자의 태도,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제사의 법과 형식은 같을지라도 제사하는 자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될 수도 있고, 거부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 이렇게 다 같이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에서 어떤 사람의 것은 받으시지만 어떤 사람의 것은 받지 않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처럼 어떤 사람은 곡식을 드리고, 어떤 사람은 양을 드리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헌금을 많이 바치고 어떤 이는 적게 바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예배를 판단하셔서 받거나 받지 않으시거나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어떤 상태로 예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음을 알았을 때 그가 진실한 신앙인이었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제사에서 무엇이 부족했나?' '나의 제물에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 '내가 제사하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이러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먼저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전혀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항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몹시 상하였고,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이런 가인의 모습을 볼 때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내가 이렇게 예배하는 것을 통해 장남다운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아니라 목사이니까, 장로이니까, 교인이니까 예배를 드린다....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니까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히 11:4)"고 말씀합니다. 가인은 믿음이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의무와 형식에 치우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예배였습니다. 예배를 드림으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받고자 하는 마음만 앞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니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형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해서 죽여 버렸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사람을 죽이다니 이 무슨 희한한 일입니까? 예배의 실패자가 되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예배자가 되려면 예배에 나를 제물로 드리십시오. 참된 예배는 나 자신이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나를 찾는 것이 예배가 아니고 내가 죽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기가 무섭게 펄펄 살아서 큰소리치고, 나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이나 하고... 그런다면 그건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진실한 예배는 그 예배를 통해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낮아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면 내 생명까지도 바치겠다고 하는 이런 마음의 자세를 다지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가인이 예배를 망치고 나니 가정도 망친 주범이 되어버렸습니다. 동생을 죽였습니다. 가정을 비탄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만족을 쫓아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항상 최초, 1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습니다. 기계, 음악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이 가인의 집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성공 인생이었으나 그들은 죽이고, 죽이는 비극의 현장 속에서 불쌍하게 살아가는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1등이 되고, 최고가 되면 성공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인 같은 인생, 그의 아들 라멕 같은 인생을 누가 성공인생이라 하겠습니까?

     

    제 아내가 군 휴가 나온 둘째 아들보고 읽으라고 사준 책을 잠시 보았어요. 책 제목이 비러먹을지언정 지옥에는 가지마라... 라는 제목입니다. 이 분이 믿다가 낙심해서 있던 중 지옥환상을 경험한 후에 정신을 차려 예수를 잘 믿고 장로가 된 후 책을 썼습니다. 조금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지옥만은 가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뼈저리게 와 닿는 그런 책입니다. 믿음 없고, 예배에 실패하고 나면 세상에서의 일등이 무슨 소용입니까? 누가 그럽디다. 잘난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진 아들은 내 아들... 아들은 사춘기가 되면 남남이 되고 군대에 가면 손님 장가가면 사돈이 된다. 아들을 낳으면 1촌, 대학에 가면 4촌, 군대 다녀오면 8촌, 장가가면 사돈의 8촌, 애 낳으면 동포, 이민가면 해외동포....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면 아들은 큰 도둑, 며느리는 좀 도둑..... 다 믿음 없이 키우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우리 교회 자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퇴근 후에 꼭 들려서 인사를 하고, 집안을 살피고 간답니다. 며느리는 하루에 꼭 한 번씩 병든 시아버지 운동시켜드리기 위해 집에 온답니다. 누군지는 말 안 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자녀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하는 것은 찰라 입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성공입니까? 무엇을 위한 성공입니까? 성공하려면 지난 주일에 제가 잠간 언급한 바 있는 정문현 회장.... 이런 사람처럼 성공해야 의미가 있지, 내 한 몸이나 이 땅에서 큰 소리치고, 자랑하며 잘 살자고 성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봐야 10년, 20년이면 끝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만 성공자로 남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 항도교회가. 우리 항도가족 모두가 예배의 성공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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