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완성으로서의 부활(마 22:23∼33)
  • 조회 수: 331, 2013.05.28 22:01:54
  •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의 새 희망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사두개파 사람들과 가진 논쟁 설화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사두개파 사람들과 논쟁입니다.

    먼저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말로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이 세금 논쟁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실패하자 사두개파 사람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아마도 사두개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패배를 보고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본래 종교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에서 정 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부활 문제입니다. 부활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인정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의 교리를 가지고 예수께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본래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같은 집안의 형제 미망인에 대해서 형제가 결혼하는(Levirate marriage) 관습이 있었습니다. 실제상으로 얼마나 이행되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만일 한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그 미망인과 결혼해서 형제를 위해 자식을 낳아 줄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출생된 자식들은 법적으로 죽은 형제의 자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만일 그 남자가 그 미망인과 결혼하기를 거부한다면 이 두 사람은 장로들에게로 나아가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를 저주했고, 그때 그 남자는 결혼을 거절한 자의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 결혼 관습의 경우를 인용하여 예수께 질문을 했습니다. 물론 예수를 모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의 질문 내용은 한 가정의 일곱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 차례로 모두 결혼하였다가 죽었다는 전제를 내세우며, "부활 때에 일곱 번이나 결혼한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입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하나의 원칙을 정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원칙으로 정하신 내용은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부활에 대한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지상의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오류, 시한의 영역 안에서 영원을 생각하는 오류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답변하신 근본 요지는 부활의 때는 지상의 관점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의 차원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때에는 장가가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결혼의 필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세계는 현세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롭게 되는 세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가 현세의 연장이 아니고 현세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면, 그 다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다름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부활을 희망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우리의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부활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대한 부활 문제를 어디에서 탐구해야 하는가? 죽음과 부활이 본래 무엇인가를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혹은 과거나 미래에서 탐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이 현세와 다른 부활, 그리고 부활이 현세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부활은 현세 차원이 아닌 영원의 차원에 속한 것이므로 현세의 시간·공간·자연의 법칙을 초월합니다. 현세는 시한상의 물리적 관계라는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세계에서는 이것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면할 수 없고,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 세계에서는 죽음도 초월하고 현세의 시한상의 제한도 초월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현세의 시한상의 제한을 초월해서 나타나셨습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다른 복음에서와는 달리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문이 닫혔을 때 나타나셨다는 것을 두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부활이 현세의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부활은 과학적인 증명이 아니라 새 창조가 무엇임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다른 부활은 사멸할 수밖에 없는 이 현세의 삶으로 다시 돌아옴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들어감(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을 말합니다. 영원한 삶으로 들어 간다는 것은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 것"(고전 15:54)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여 사멸할 이 삶 전체에 그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멸할 삶 전체에 그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은 변화(고전 15:52)와 변용(transfiguration 빌 3:21)을 말합니다. 이 변화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치유와 화해와 완성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때에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마지막 순간뿐만 아니라, 그의 전 역사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지상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디오필름에 담겨져서 영원의 하늘 속에 보존되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부활은 우리에게 그리 기쁜 소식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삶은 거의 모두가 실수와 병·눈물·한숨·탄식의 경험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들이 부활의 때에 다시 재현된다면 부활은 기쁨과 찬양, 축제의 시간이 아닌 수치와 후회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활을 희망하며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는 전 역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었고 올바르게 회복되었으며, 치유되었고, 완성된 삶의 역사로서 발견입니다. 그러므로 이 현세에서 심한 장애인으로 살던 삶이나, 일찍 죽은 어린아이의 삶도 부활의 때에서는 치유되고 완성된 삶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그때가 기쁨과 은혜·충만·영광의 때가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활은 새 창조입니다. 부활이 새 창조라 함은 완전히 옛것과의 단절에서 다른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며, 사멸할 이 삶이 영원한 삶으로서의 새 창조, 곧 우리의 삶이 신적인 삶 속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에서 새 창조입니다.

    부활의 목적과 중심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에 있기 때문에 부활의 때는 이 현세에서의 삶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장가가는 것, 시집가는 것과 같은 일이 필요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습니다. 결혼은 불완전함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 인간의 삶은 죽음에 의해 폐기(vernichtung)되지 않고 변형됩니다. 죽음은 "인격 전체의 끝이거나 폐기"가 아닙니다. 죽음은 한 인간의 삶의 형태와 삶의 변형 곧 인간 전체의 변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삶에서 불멸의 삶으로 변화되며 제한된 현 존재(Dasein)에서 시간적 제한과 공간적 제한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영(soul)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영의 내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인간은 인간의 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몸과 영혼과 과거와 미래, 사회적인 관계와 자연적인 관계를 가진 전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실현됩니다. 이 하나님의 영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며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은 그의 영의 현존 속에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뜻에서 죽음은 인격 전체의 폐기가 아니고 인간의 삶의 형태의 변형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의 의미며 목적 그 자체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부활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이 이 현실의 삶으로 끝난다면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참여할 그 부활의 생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되고, 현실에서 고난이 있지만 소망의 인내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의혹과 갈등이 많은 이 현세에서 진정 찬란한 친교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미움과 증오, 불신을 넘어서서 진정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물과 한숨이 있는 이 현세에서 희망과 찬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유형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며 떨지 아니하고 담대히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불의와 위협에 직면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히 정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죽은 자들의 장례식만을 치르는 장의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죽음의 관문을 뚫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부활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죽음으로 인해 폐기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삶으로 변형됩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후의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사후 세계를 믿는 것은 기독교적 부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 불멸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룩한 친교 가운데 있는 삶은 결코 폐기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완성되고 변형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지난 한때 부활을 현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산 사람에게 허락되는 보상으로 이해했습니다. 거기서 오는 신의 갈등·모순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삶의 완성의 시간입니다.

    끝으로 부활에 대한 비유적 표상 하나를 말씀드림으로 저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한 알의 밀알은 그 자체로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땅에 심겨지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어느 시점에 가서 다 말라 죽게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질 때 땅 속에서 썩게 되고 새 생명으로 배태되면서 싹이 돋아나고 줄기가 생기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씨의 형태는 없어졌지만 그것이 소멸된 것이 아니고 변형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표상에서 부활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부활은 현세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 부활은 완전히 소멸된 후 새로운 것의 창조가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 부활은 우리의 삶의 의미며 목적입니다.

    ◎ 부활은 삶의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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