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주를 보았다 (요20:1~18)
  • 조회 수: 312, 2013.04.12 12:21:27
  • 올해는 부활절이 3월 31일입니다.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달라지는데 그 날짜는 유대인의 유월절인 니산월(유대력의 1월) 14일경의 주일을 부활절로 정하여 지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셨고 그 후 3일 만에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해마다 바뀌기 때문에(음력과 같이) 부활절 역시 해마다 달라, 3월 21일부터 4월 25일 어간에 부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문 기자가 기사를 쓸 때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5W 1H라고 하는 육하원칙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라고 하는 6가지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 이후에 있었던 일들에 관한 내용인데 마치 신문 기사를 보듯 육하원칙에 의해 너무도 분명하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습니까? 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예루살렘 근처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을 누가 목격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목격했고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가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의 돌문은 열려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목격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목격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향품을 넣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갔을 때 처음으로 돌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았고 이를 제자들에게 알림으로써 제자들도 가서 직접 확인했으며 더 나아가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보도된 기사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 1: 열린 돌무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몇 가지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열린 돌무덤입니다. 예수님이 살던 팔레스틴 지방의 무덤은 주로 바위를 파서 만든 굴과 같이 돌무덤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은 둥글고 수 천 킬로그램에 달하는 돌문에 의해 막혀 있습니다. 보통 이 돌문은 땅에 파인 홈에 의해 고정이 되어 있는 상태고 만일 이 돌문을 옮기려면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힘을 모아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거운 돌문이 어떻게 옮겨졌을까요? 새벽에 찾아간 여인들이 옮겼습니까? 그들은 옮길 만한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옮겼습니까? 오늘 본문의 정황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이 옮겼다면 돌문이 옮겨졌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달려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뿔뿔이 도망갔던 그들이 군병들이 지키고 있는 현장으로 찾아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누가 돌문을 열었습니까?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가기 위해 열었습니까? 이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가고 부활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릴 것을 대비해 현장에 무장한 군병들은 배치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시신을 옮겨 놓고 오해 받을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돌문이 옮겨졌을까? 오직 한 가지만이 예측 가능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증거 2: 예수님의 시신을 둘러쌌던 세마포

     

    둘째 부활의 증거는 예수님의 시신을 둘러싸인 세마포의 모습입니다. 당일의 사건 경위는 이렇습니다. 부활의 아침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마리아는 즉시 그 사실을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알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보통 요한으로 봅니다. 마리아가 왜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렸는가? 그것은 증거를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모세의 법에 따르면 여자들은 증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증거가 확정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명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증인을 세우기 위해서 제자들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무덤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달음질은 같이했지만,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무덤에 도착한 요한은 몸을 구푸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으므로 무덤 안이 어두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밝은 색깔의 세마포만 볼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이 밝기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요한은 세마포를 보면서 그 세마포 안에 예수님의 시신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신을 세마포에서 빼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마포가 있었기에 비록 무덤 문은 열렸지만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베드로가 도착했습니다. 그때는 해가 떠올라 무덤 안에도 어느 정도 빛이 비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요한과 달리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무덤 속에 들어가 예수님 몸을 쌓았던 세마포를 보았고 머리를 쌌던 수건이 딴 곳에 개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보았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았던 세마포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쌓았던 세마포가 고치 모양으로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나라마다 장례법이 다 달랐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썩지 않게 했고 로마나 그리스에서는 주로 화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의 장례법은 먼저 시신을 깨끗이 씻고 천으로 어깨에서 발가락까지 가지런히 둘러싼 다음 천으로 붙이고 그 천에 향료를 뿌리는 식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은 빠져나가고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던 세마포만 번데기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가 무엇을 보았습니까? 수건이 딴 곳에 개켜 있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수건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머리를 둘러쌌던 수건을 말합니다. 이 수건이 잘 개켜 있더라는 말입니다. 개켜 있다는 말은 둘둘 말려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라면 이 현장을 보았을 때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시신은 누군가 도적질해 간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뭔가 차분한 가운데 일사 분란하게 이뤄진 사건이라는 짐작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요한도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5절부터 8절 사이에 보았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5절에 요한이 보았다는 말은 이 말은 그저 단순히 흘겨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6절에 베드로가 들어가 보니 할 때 본다는 말은 자세히 살펴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8절에 나와 있는 "다른 제자가 보고 믿더라" 할 때 이 '보았다'는 말은 어떤 사실에 대해 납득이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한 가지 헛소문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해 갔다고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11절 이하를 보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이 군병들을 돈으로 매수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하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의 대적들이 꾸며낸 거짓 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당시 현장의 모습은 결코 누군가 시신을 훔쳐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면 언제 단단히 묶었던 시신을 쌌던 천을 걷어내면서 훔쳐 갔겠습니까? 그리고 언제 머리를 쌌던 수건을 정리하고 훔쳐가겠습니까? 이것만 봐도 시신을 훔쳐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 보고 그 현장의 상황을 말했을 때 비로소 요한도 들어가 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을 믿게 되었고 심증적으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증거 3: 목격자들

     

    셋째 증거는 목격자들입니다. 오늘 요한이 요한복음 20장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돌문이 옮겨진 것을 말했고 무덤 안의 현장에 정황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목격자가 없었다면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목격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바로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기자가 사건을 보도하듯 분명히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기자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며칠 전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했던 나사렛 예수, 많은 사람을 고치고 많은 이적을 행했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고 이를 친히 목격했다는 한 사람이 있어 만나 보았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 때가 언제입니까?"
    "예, 안식 후 첫날, 즉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입니다."
    "그때가 몇 시경입니까?"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은 알지 못하지만 해가 뜨기 전 아직 어둑어둑할 때였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그때 저는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예수님의 누우셨던 무덤을 찾았습니다. 저와 같이 갔던 몇 사람이 있었지만 제가 제일 먼저 도착했습니다. 저는 누가 돌문을 옮겨줄 것인가? 걱정하며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염려했던 돌문이 이미 옮겨져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보았을 때 저는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무덤 안을 살피지도 않은 채 재빨리 베드로와 요한에게 누가 주를 무덤에서 훔쳐 갔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와 그 사실을 보았습니다. 내 말대로 무덤 문을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시신도 사라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간 후 저는 계속 무덤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슬픈 나머지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왜 울고 있느냐"고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대답했죠? "누가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은 아주 부드러운 음성이었습니다. 매우 친근한 음성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 물음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낙심했고 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내가 찾았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환상을 잡아당길 수 있겠습니까? 제가 예수님을 잡아당기려 하자, 예수님은 나를 잡아당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네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을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제자들에게 와서 내가 주님을 본 것과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아침 첫 목격자였던 마리아의 증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분명하고 정확한 사건 보도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 마치 사건 현장을 그대로 보는 것과 같은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왜 무덤이 비어 있었는지 예수님의 부활 이외에 다른 길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본 것은 실제가 아닌, 예수님의 환영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절망 가운데 있다가,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보기 위해 새벽에 무덤을 찾아 갔는데,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착각하고 예수님의 환영을 보고 거짓말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비평주의 신학자 '어니스트 르낭' 은 기독교 신앙은 막달라 마리아가 환각 가운데 예수님을 보았다고 생각하면서 퍼뜨린 소문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요한은 마리아가 만난 예수님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 육신을 가진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고 그를 만졌습니다. 17절에 "나를 만지지 말라"는 말은 나를 잡아당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있다가 갑자기 예수님이 뚝 앞에 나타나 있으니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예수님을 잡아끌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무 잡아당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에는 더 깊은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붙잡고 땅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전의 육체를 가지셨던 예수님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귀하신 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후 5:16절에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일깨워 주신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깨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13절에서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감사와 사랑과 헌신의 전부였습니다. 일곱 귀신들렸던 자신의 생명을 건져 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현장까지 끝까지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가누지 못해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믿음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그의 죽어 가던 믿음이 살아났습니다. 잠자던 심령이 깨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의 이름도 불러 주십니다. 죽어 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깨어 주시고자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을 만나 그들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듯이 오늘 여러분들도 만나 주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좌절하고 낙심하고 실의에 빠진 여러분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오늘 이 아침 성령으로 여러분을 찾아와 주십니다.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다시 여러분의 믿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아침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 듣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삶이 변한다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삶이 완전히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마리아는 얼마나 슬퍼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넣기 위해 무덤을 찾았을 때 무덤 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낙심이 되었을까요?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었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한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네가 보고 들은 것을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제 마리아는 더는 슬픔에 잠겨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내가 주님을 만났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전에 제자들을 만나 주셨듯이 동일하게 성령으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마리아가 만났던 예수님을 동일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낙심이 변하여 소망이 됩니다. 의심이 변하여 확신이 됩니다. 이런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듣기 좋은 이야기일지라도 거짓은 영원한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상상의 세계로 빠져 갑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더는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영원히 기쁜 소식인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주를 보았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이르셨다"고 외치십시오.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혹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지 못하셨습니까?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여러분은 마리아와 같이 슬픔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 나를 만나 주십시오. 나에게 찾아와 주십시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내가 주를 보았다"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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