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을 영접하면(요한복음 1:1-14)
  • 조회 수: 166, 2013.11.05 19:23:03
  • 기쁜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91년도 이제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면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큰일들이 많았습니다. 걸프전쟁으로 인하여 세계가 초긴장 상태에 처했었습니다. 소련 연방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어젯밤 소련연방이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독립국가 연방을 선언했습니다. 우리 나라와 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게 된 것도 큰 역사 중에 하나였고 며칠 전 남북한 고위회담에서 화해와 협력을 하겠다는 조인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말할 것 없거니와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들인 것입니다. 사실 이 지구상에 한 나라가 둘로 갈라져 있는 것은 우리밖에 없는데 어서 속히 민족의 숙원인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전에는 멀리 있는 것만 같이 그저 막연하던 통일이 이제는 머지 않은 앞날에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된 것도 얼마나 큰 진전인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통일에 이르면 넘어야 할 높은 산이 있고 건너야 할 깊은 강이 있고 험한 가시밭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을 모두어 인내심을 가지고 나아가면 우리의 소원인 통일도 이루어지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세계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크고 기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복음 2장 10-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러분, 이보다 더 크고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곧 크리스마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까? 다른 사람 아닌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벌써 멸망하고 말았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소개한 말대로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인류에게 가장 크고 기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할 때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1.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지만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오신 참빛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무지와 죄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것은 육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의 길은 육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의지적인 수양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우리의 심령이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믿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 여러분이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것은 육신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장 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수양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셨습니까? 혹 어떤 분이 내게 와서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예배당에는 다니는  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그렇게 쉽겠어요?” 하고 대답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믿을 만합니다. 제 말은 믿을 수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이거 얼마나 쉽습니까? 너무 쉽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첫째 받는 축복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다 죽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영생 얻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영접하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영생 얻는 길은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영생 얻는 길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거리에 나가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오고 갑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참된 인생의 길을 택하고 걸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걸어가고 있으며 사실은 어디로 가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아니 찾으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가는 데까지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도덕은 문자 그대로 혼돈을 이루고 있습니다. 곳곳에 충돌과 전복으로 부상을 입은 심령, 죽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사이 ‘교통지옥’이란 말을 씁니다마는 오늘의 세상은 ‘인간지옥’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어두움과 혼돈 속에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참 생명의 길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새 생명을 주실 뿐더러 더 풍성하게 해 주십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삶의 무의미와 소외감입니다. 기계 문명과 물질 문명이 극도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점점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 지도 모르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경쟁이 심한 이 사회 현실에 부딪치며 무엇을 얻어 보려고, 무엇을 누려 보려고 하는 욕망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육신적인 생활은 날로 풍요해 가는데 영적인 생활은 점점 더 무의미와 소외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 문명한 현대 인간의 생활 특징입니다. 

     왜 이런 결과를 가져옵니까? 삶의 의미를 세상적인 것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외적인 생활이 풍요해지면 질수록 내적인 심령은 공허한 상태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옛날 솔로몬 왕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화려한 궁궐,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 찬란한 옷, 아름다운 여자로 더불어 즐기는 것에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으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도서에 말한 생의 결론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로다 이것이 나의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것에서 얻으려는 것은 언제나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할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잔이 차고 넘칩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사는 여인은 육신을 따라 살았었습니다. 헛된 것을 구하며 살았습니다. 이 남자 저 남자를 바꿔가며 살아 보았으나 거기도 만족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목이 말라서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참 만족한 생활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치며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들은 후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를 모시기 위해서 육신으로 자랑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사는 삶의 내용은 의미가 있고 풍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굶주린 우리에게 풍성함이 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2.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인간에게 귀한 것이 많이 있지만 가장 귀한 것은 자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본권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자유를 빼앗으려 할 때는 생명을 내걸고 싸웁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어떤 세력도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금년에 소련 연방이 변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당장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과 쓰고 살 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북한에 무엇이 문제입니까? 거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말할 자유가 없습니다. 믿을 자유가 없습니다. 주거의 자유가 없습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남북의 창’이란 TV프로그램을 통해서 북한의 모습을 단면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데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유가 이처럼 귀합니다. 

    패트릭 헨리의 말은 너무 유명합니다.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자유는 생명을 주고 바꾸리 만큼 소중합니다. 물론 정치적인 자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부자유가 인간 양심의 자유까지 빼앗지는 못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심령의 자유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됩니다. 몸은 자유롭지만 그 심령이 죄에게 속박을 당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죄의 종이 된 사람에게는 평화도 없습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돈이 많아도,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죄를 범하면 평화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를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움의 권세 밑에서 허덕이고 있는 심령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귀한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활의 귀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생긴 불안을 없애고 평안을 주시려고 죄의 포로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크고 흉악한 더러운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시고 마음속에 자유와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하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한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3. 새 사람이 됩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안 계십니다. 그러면 새 사람이 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했습니다. 새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생각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이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서 새 사람이 되었으면 아랫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을 더 생각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생각뿐만 아니라 지식에까지 새로워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옛 사상, 옛 습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미신에서부터 떠나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부터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 권면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면 옛 사람으로 살 때, 육에 속해 살 때의 일은 생각하기조차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면 새 사람의 생활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새 사람은 사랑을 따라 삽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는 사랑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이 된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주님을 영접해서 새 사람되지 아니하면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결심으로 노력으로 되지 않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사랑의 강권’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생활에 여러 가지 방해를 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랑에 의해 강권함을 받은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아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4절에 보면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희생과 수고가 따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겨운 일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사람은 기적을 따라 삽니다. 가령, 전투를 하는 경우 상식적으로 말하면 적의 병력이 천 명일 경우 아군은 2천 명 내지 삼천 명의 병력을 가지고야 공격해서 이길 승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역사를 통해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삼백 명의 군대를 기억합니다. 그들이 수가 많아서 미디안 사람을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온전히 헌신할 때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기적이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에서 자유를 얻고 새 사람이 된 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놀라운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 무엇 하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된 우리가 잘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잘못 살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갑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받았으면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져 귀한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주님 영접하므로 새 사람 되었으면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가, 아니 지식까지라도 새로워져 위엣 것을 승리하며 하루하루의 생활을 헌신하므로 승리하는 생활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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