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보기도의 명령(딤전 2:1-7)
  • 조회 수: 43, 2013.07.29 06:46:54
  • 금년 추석에도 어김없이 귀성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건교부 추정으로 2800만 명이 고향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답니다. 일시에 그 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하기 때문에 교통문제는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토록 전쟁과도 같은 고생을 하면서도 고향을 찾아가는가?'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많은 사람을 고향으로 잡아끄는 것일까?'

    오늘의 현대인의 삶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이 너무 분주합니다. 너무 치열합니다. 너무 각박합니다. 그래서 우리네 정신이 지치고 곤고합니다. 물질적으로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고, 삶의 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도 편리하지만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그것들로 채울 수 없는 허전함과 공허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이런 현대인의 심리 정신상태를 '정신적 고향상실증'이라 불렀습니다. 마치 부평초처럼 마음이 떠있습니다.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늘 불안합니다. 참된 안식도 없고 진정한 평안도 없습니다. 이런 정신적 고향상실증, 이것이 그토록 마음을 고향으로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일년에 한 번이라도 고향을 가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달려가 어머니 품에 안기면 그 동안 지친 우리네 마음이 위로를 받습니다. 따뜻한 어머니 손 한번 잡아보면 그 동안의 우리네 심신의 피로가 다 풀립니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투박한 된장찌개 한 그릇이 우리네 삶에 잃었던 활력을 되찾게 해 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땅의 고향보다 더 우리가 사모하고 돌아가야 할 곳을 말씀합니다. 바로 본향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장차 우리가 영원히 들어가 살 곳입니다. 그 본향에 가면 세상사에 시달리고 치열한 삶 속에서 빛 바랜 사진처럼 황폐해진 마음들이 참된 안식을 얻습니다. 영적 전쟁 속에서 죄와 싸우다 지쳐버린 심령들이 참된 평안을 얻습니다. 염려와 근심, 불안과 공포, 무거운 인생의 짐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귀성 길에 나선 사람들이 고향의 품을 그리워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이 영원한 본향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그 본향을 맛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고향의 어머니 품에 안기듯이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 심령을 하나님께로 옮겨다 줍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해 줍니다. 기도 안에서 지친 심령이 참된 쉼을 얻습니다. 상처받은 심령이 위로를 받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심령이 그 짐을 내려놓습니다. 갈길 몰라 방황하던 심령이 길을 찾게 되고 믿음과 소망을 되찾게 됩니다. 기도가 이 현대 삶에 지친 우리가 살길입니다. 기도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도록 지탱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를 잊지 마십시오. 

    명절만 되면 어머니의 마음은 분주합니다. 먼길을 달려오는 자식들을 맞을 준비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주무시지를 못합니다. 자식들 먹일 먹거리 장만하랴 아이들 싸서 보낼 보따리 마련하랴... 바쁘고 분주합니다. 그래도 신바람이 납니다. 자식들 만날 생각에. 준비가 얼추 되면 자식 만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보고 싶은 마음에 벌써 그 마음이 명절에 가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오늘도 기도의 현장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기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보시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도의 자리로 나오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세상사에 시달리고 분주함과 소란함, 그리고 각종 스트레스에 찌들려 있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사실을 깨달은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들에게 '기도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살전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명령했습니다. 우리를 기도의 현장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기에 기도는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명령을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기도의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 감옥에 투옥 중이던 바울이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제자요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당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고, 교역자로서 디모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공중 예배 시에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때 반드시 다함께 기도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대상

    오늘 본문의 기도 명령은 특별합니다. 한 마디로 중보기도의 명령입니다. 나와 우리가 아닌 남을 위한 기도를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기도를 하되 중보기도를 하라는 명령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중보기도 할 때 기도해야 할 대상 두 종류의 사람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사실 우리의 고민은 우리가 기도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의 폭이 너무도 좁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교인들, 기도부탁 받은 사람들,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한 마디로 기도 대상의 폭이 너무도 좁은 것입니다.

    우리가 중보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아무래도 우리의 관심의 영역 안에서 찾게 됩니다. 지금 남편 문제 때문에 고민인 사람은 남편 문제로 기도 시간 거의 대부분을 보내게 됩니다. 자식 문제로 고민인 사람은 자식 문제로 기도 시간 대부분을 보냅니다. 저 같은 목회자는 뭐니뭐니 해도 제가 목회하고 있는 이 상도중앙교회를 위해서 거의 대부분의 기도 시간을 보냅니다.

    물론 우리의 관심 영역 안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많은 시간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기도의 짐이요, 우리 기도의 분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관심의 영역 밖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관심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포기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관심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말고 그 관심의 영역 밖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관심의 영역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의 영역 밖에서 기도 대상을 찾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 대상을 위해서 그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명령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의 영역 밖에서 기도 대상을 찾기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관계를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와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밖에서 기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혈연, 지연, 학연, 또한 같은 교인이라는 관계의 범위를 넘어서야 합니다.

    둘째, 이해 타산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보기도할 때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되는 지 여부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에 관계없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공간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을 넘어서야 합니다. 상도동, 동작구, 서울, 한반도, 아시아... 저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 저 유럽에 사는 사람, 지역의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넷째, 시간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시간을 넘어서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의 후손들, 앞으로 이 땅에서 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신 불신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미 믿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 아니 앞으로도 믿지 않을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타종교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불교인들, 회교인들, 무속인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폭입니다. 

    둘째는 위정자들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 황제들, 높은 지위에 있던 자들은 대부분 박해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을 박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로마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약 250년간 로마 정부는 철저하게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 사이에 10번의 대 박해 사건이 일어나서 로마에 처참하게 순교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예배 드릴 때마다 황제를 위해서, 위정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벧전 2:17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말씀했습니다. 당시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기독교 박해자였습니다. 베드로도 결국의 네로의 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당시 자기들을 그토록 혹독하게 박해했던 황제, 그리고 그 박해로 자기가 순교를 당했던 황제 그를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호교론이라는 책에서 당시 교회가 황제를 위해 장수와 안정된 통치와 가정의 평안과 충실한 신하와 의로운 백성과 세계 평화를 기도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물론 터툴리안 당시도 박해가 있던 상황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주님의 말씀을 초대교회가 철저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본문의 중보기도 명령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원수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마음속으로 그를 축복하십시오. 결코 기도 안에서 그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면서 그를 피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중보기도의 이유

    그러면 왜 중보기도를 명령하실까요? 본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교회가 더 이상 박해 중에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초대교회가 무려 200년 넘게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지하교회를 이루고 예배드리면서도 그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카타콤이라는 지하 공동묘지에 숨어서 예배드리면서도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후 313년 드디어 황제 콘스탄틴이 밀란에서 칙령을 반포했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것입니다. 교회가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원수를 망하도록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수가 잘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 원수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 원수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가 부흥하도록 앞장서서 돕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원수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널리 널리 확장되는 가장 우선적인 도구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입니다. 차별이 없고, 조건이 없고, 제한이 없습니다.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했습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라고 되어있습니다.

    기독교가 편협하다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시는데 교회가 사람을 차별하고 구별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그래왔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 아닌 사람들이 차별을 당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신분 때문에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근대시대에는 피부색 때문에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편협함 때문에 교회 안팎에서 차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편협한 생각을 뛰어넘어 그 누구라도 구원받기 바라십니다. 우리가 중보기도할 때 편협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대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주님이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말씀하셨습니다. 히 7:25를 보면 주님은 "항상 살아서 중보기도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3-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기도 생활에 변화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변화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중보자로 사역을 시작하셔서 다시 말해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시작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맞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지금 주님의 중보기도의 지원을 계속 받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의 위대한 설교가 암브로우즈는 "예수님께서 중보기도하지 아니하시면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교제란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도 주님처럼 남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보기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중보기도는 진정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줍니다. 중보기도는 우리를 놀라운 기도의 세계로 안내해 줍니다.

    자 이제 우리가 중보기도에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이기적인 기도, 자기 중심적인 기도, 편협한 기도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중보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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