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고향은?(히11:13-16)
  • 조회 수: 43, 2013.08.04 16:06:06
  • 민족 고유의 명절을 앞두고 고향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향한 들뜬 마음을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도 여러분과 함께 고향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옆에 계신 분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고향이 어디라고 대답하셨어요? 내 고향은 천국이요, 하늘나라라고 하신 분 있으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고향에 대한 생각들이 똑같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의 차이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땅의 것들을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땅의 것만 생각하고 살면 살수록 자꾸만 좁아 집니다. 퇴보되어 갑니다. 사람이 좁아집니다. 그렇다가 결국은 자기 무덤을 준비하고 자기 무덤 속에 들어가고 맙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면 무덤 속에서 나올 수가 있고, 엄청난 것들을 생각하고, 느낄 수가 있으며, 엄청난 것들을 상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땅에 묶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묶여 있다는 것은 곧 죽음에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묶여 있던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고 죽음에서 자유케 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땅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땅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하늘의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이야기를 해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듣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주셨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참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도 아름다움을 보지만 우리만큼 감사의 마 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들이 저절로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주부 등산교실에서 포항에 있는 내연산에 갔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든 사람이 감탄을 합니다. 시지동에서 오신 한 분이 너무 감탄을 하길래 '참 아름답죠, 그 아름다운 산을 만드신 분이 누구인줄 아세요?' 라고 물어보았습니다.그러니까 '몰라요' 그러더라구요. 아주머니에게 다시 저 아름다움이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하시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절로 생겼지요.' 제가 뒤에 따라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고민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저절로 생겼는지, 저 자연이 저절로 생겼는지, 누가 만들어 주셨는지, 만드신 분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기도를 했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고향을 생각해도 육신의 고향을 생각합니다. 육신적인 고향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고향을 생각합니다. 사실은 고향이 나에게 준 큰 이득은 없지만 고향이 생각납니다. 늘 고향에 가기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가보아도 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향을 사모하면서 고향에 붙들려서 사는지.. 그것은 바로 죽음에 붙들려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붙들려 있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객지에 나와서 죽고 난 뒤 고향으로 묻히기 위해 돌아가는 장례행렬을 따라 그의 고 향에 함께 가 보았습니다. 고향사람들이 반겨주지 않습니다. 젊을 때에는 나가서 살다가 죽어 아무 쓸모없을 때에 와서 더럽히기만 한다고.... 심지어 다리가 있는 데 동네사람들이 다리를 막아서 못들어 오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차는 돌려 보내고 내려서 사람들이 들고 냇가로 간적이 있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물었더니 '이런 사람들은 우리 동네에 올 자격이 없습니다.' 왜 자신의 고향인데 그러는지 물었더니 고향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다리를 놓을 때 기부하라고 몇 번이나 연락을 했는데, 충분히 기부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푼도 기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다리를 건너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왜 죽어서라도 고향을 가려고 합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치 이 세상을 떠 나면 보장된 것이 없으니까 우리가 어떤 보장된 것들을 자꾸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갈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갈 것인지에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부터 이 세상 떠나서 무덤 속에서라도 영원히 살 것을 원하여 큰 무 덤을 만들고, 영원히 살려고 모든 것들을 준비시키고 심지어는 산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무덤으로 들어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피라미드 속에 들어가 보십시오. 이집트의 왕들이 아직까지 거기에 살아서 있는가요? 우리나라도 수없이 많은 왕릉이 있습니다. 최고의 보석들을 다 집어 넣고, 함께 데리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무덤 속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곧 땅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고향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고향만 생 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분파가 일어납니다. 우리고향, 우리 것, 대구는 워낙 대구 사람들이 많아서 다른 지역에서 오신 사람이 섞여 있어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서울만 가도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에 가서 그 교회 목사님이 경상도 목사님이면 교인의 80% 이상이 경상도 사람입니다. 교회 목사님이 충청도 분이시면 교인의 대부분이 충청도 사람입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어떻든 땅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 갑니다. 절대로 하늘나라를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수천만이 움직입니다. 좋은 목적과 좋은 동기를 가지고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이 아니라도 추석 명절을 가치있게 보낼 수 있지만, 그러나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꼭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무덤 때문에, 산소 때문에. 이것이 우리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한국의 풍습은 묘를 잘 가꾸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미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누리고, 유익을 위해서 이 땅을 주셨는데 우리는 계속 무덤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멀지 않아서 이 땅에 무덤으로 다 바뀌어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1년에 여의도만한 땅의 3배가 잠식되어져 간다고 합니다. 
    하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외치고 부르짓지만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외치고 부르짓는 그 사람들이 더 큰 무덤을 차지 하려고 합니다. 소리만 지르지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명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향을 주시는 의미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땅에 속한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육신의 고향은 과거에 붙들리게 합니다. 과거는 우리로 하여금 전진하지 못하게 합니다. 미신적인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일본사람들은 98%가 화장을 합니다. 우리의 몸은 흙에서 온 것입니다. 가장 빨리 흙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의 전통상 무덤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너무 붙들려 있습니다. 중국의 넓을 땅을 둘러보아도 무 덤이 없습니다. 조선족이 만들어 놓은 몇 군데 무덤이 있습니다. 그것도 정식으로 허가가 나지 않습니다. 비밀리에 만들어 놓은 것 외에 무덤이 없습니다. 
    땅에 붙들린 사람들, 육신의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 땅의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들은 하늘에 붙들린 자들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이 땅이 아니라 저 높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래 서 우리는 적어도 하늘을 생각하는 자답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 곧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이 것은 곧 육신에 붙들리지 말고 영에 붙들리라는 것입니다. 육신에 끌려 가지 말고, 습관과 전통을 쫓지 말고, 성령을 쫓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습을 쫓아 가면서 오히려 성령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쫓지 말고 하늘의 뜻을 좇으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고향을 떠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고향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고향 자체를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향에서 붙들려져 있는 그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합니다. 고향의 삶 은 곧 땅에 속한 삶이었습니다. 거기는 하나님을 떠난 삶이었습니다. 곧 우상을 섬기고 사람을 높이는 삶이었습니다. 그곳을 떠나서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삶을 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사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면 무덤밖에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면 복이 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을 높이고 우상을 섬기는 그 삶 중심에서 떠나서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땅에 속해 있으면 내 가족, 내 친척, 내 종족밖에 모릅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늘에 속하면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자매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서 떠날 때만에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 열심히 다녀 도 내 것만 알고, 내 가족만 알고, 내 친척, 내 고향사람만 뭉쳐지면 문제있는 신 앙인이 됩니다. 
    히브리서를 왜 썼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셨지만, 하나님의 뜻하시는 방법대로 나아가지 않고, 너무나 자기들 중심으로 붙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추구하고 있는 관습들, 너희들이 쫓고 있는 모든 것들이 참된 것이 아니 라고 얘기해 줍니다. 다만 예수님만이 참된 분이라고 말해줍니다. 
    히브리서 1장-8장까지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이야기합니다. 높임을 받으실 분은 다만 그분밖에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분을 믿으라.' 관습을 믿지 말고,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왔던 유교적인 전통, 미신의 전통을 쫓지 말고 주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가 다 네 형제요, 내 친척이요, 내 부모이다' 땅에 속해있으면 우리는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 늘에 속해 있으면 특정한 교회나 교파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우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우리는 우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에서도 우주적이고, 말하는 것에서도 우주적이며, 행동하는 것에 있어서도 우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을 바라보면 무덤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건 져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우리의 복으로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족속의 복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 일을 실제적으로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데로 큰 민족을 이룬다는 약속이 이루어 졌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서부터 나 온 씨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복받을 수 있는 길 이 열려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 예수님을 증거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릴 때, 모 든 사람들에게 계속 복을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땅에 붙들린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특별히 명절 때 우리는 무덤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는 무덤을 만들지 않도록 이 일을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지만 분명히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저는 아내에게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 내가 만약 먼저 가게 되면 빨리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취해 달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교회에서도 납골당을 만들려고 합니다. 앞서가는 서울의 소망교회는 이미 수양관에 납골당을 만들어서 교인들 중 30%가 화장에 동참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한줌의 흙으로 그냥 뿌려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서운 한 것도,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이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육은 분명히 성경에서 땅, 흙에서 왔다고 합니다. 반드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신앙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엉뚱한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에 붙들려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영 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렇게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살아온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다.' 아닙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깨달아집니다. 
    장례식을 하는 목적은 죽은 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고 죽음에 붙들려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장례식을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육신의 부활을 의식하여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것은 죽었던 이 육신이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늙고 병든 육신이 그대로 살아난다면 살아나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완전히 흙으로 변화되어서 새로 운 영과 새로운 형체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죽었던 무덤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에 만 계시지 않습니다. 온 우주에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국의 카톨릭만 그렇습니다. 한국 천주교인은 아주 유교적인 배경에 사로잡혀 있고 유교적으로 하는 모든 것들을 다 합니다. 그러니 잘못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뉴욕에서 성당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성당 안에 납골관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박스입니다. 그 안에 재 한줌 집어 넣고 접어 놓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허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음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이 허전하여 이렇게 라도 같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땅의 죽음, 육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 육신의 죽음에 붙들려져 있는지 쉽게 진단할 수가 있습니다. 육신에서 초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하늘 백성입니 다. 엄청난 복입니다. 아무렇게나 버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세상방법을 좇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예배를 많이 드립니다. 그런데 이 예배를 마치 제사하듯이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삶과 죽음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유교식으로 입관하기 때문에 드려야 한다거나, 발인하기 때문에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그렇게 드림으로 인해서 죽었던 시신에 무엇인가가 유익을 준다 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잘못된 미신적인 행위입니다.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산 제일교회가 모든 면에서 앞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간다는 것은 주님을 앞세워 간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로 깨닫게 해 주시고,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앞서가게 해주실 것입니다. 
    고향이 없어도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죽어서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진리를 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은 진리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고향에 대한 선언입니다. 죽음을 향한 고향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고향에 대한 선언입니다. 내가 만든 고향은 죽은 곳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고향은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고향을 언제나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태어난 고향에는 돈을 벌지 않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출세하지 않으면 못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망하면 고향을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고향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도 갈 수 있고, 출세를 못해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고향으로 가시겠습니까? 어느 고향을 사모 하시겠습니까? 
    하늘의 고향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육신의 고향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고향에 대해 사모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고향에 붙들려서 퇴보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고향으로 가면서 더 나은 하늘의 고향을 생각하시고, 사람들을 만나서 영원한 영적인 고향에 대해서 나누십시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가치있는 명 절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옆의 분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 고향이 어디십니까?',' 내 고향은 흙에서 온 곳도 있지만 더 확실한 고향이 있소. 영원히 갈 곳, 나의 어떤 노력으로가 아니라 정말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갈 수 있는 그 곳, 나는 그 고향이 있답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고향, 영원한 고향, 하나님이 주신 고향을 사모하면서 육신의 고향을 향해서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4 admin 71 2013.08.04
43 admin 86 2013.08.04
42 admin 89 2013.08.04
41 admin 49 2013.08.28
admin 43 2013.08.04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