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나은 본향을 찾는 순례자(히 11:13-16)
  • 조회 수: 85, 2013.08.04 16:10:08
  •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세웠네 /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 지라도 / 오늘을 이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 길 다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 빈 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이것은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또한 순례자의 기도며,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믿음으로 살았던 선진들의 신앙적 삶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가를 뒤좇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문으로 택한 히브리서 11장 13-16절 말씀은『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본향을 찾는 순례자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더 나은 본향을 찾는 순례자』라는 제목으로 1999년 추수감사절 아침에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입기 원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찾는 순례자는,

     

       외국인과 나그네로삽니다.

     

    본문 13절에 본향 찾는 순례자는『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외국인』이란 국적 없이 임시로 머무는 자를 지칭하는 말이요,『나그네』란 제한된 기한 동안 일시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착민에 반대되는 개념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들을 법적 보장이다. 사회적 보장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신분상의 제한을 받는 자들입니다. 더욱이 고대 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온갖 모욕과 경멸, 수치와 감금, 약탈과 추방 등의 갖은 서러움들이 가해졌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창세기 23장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나는… 나그네요 우거한 자』라고 합니다. 창세기 48장 9절에 보면 야곱도 자신의 삶은『나그네 길』이었다고 합니다. 시편 119편 54절에 보면 시편 기자도『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보면 베드로도『나그네 정신』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빌 3:20).

    분명히 기독신자는 어제나 오늘이 이 땅의 삶은 외국인이요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러나 최희준씨의 노래 가사처럼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길을 모르는 방랑객은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순례자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니다.

     

    본문 16절에『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더 나은 본향』이란 지상의 것에 대비시키는 비교급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세상 고향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고향을 말합니다.

     

    첫째, 그 위치가 하늘입니다.

    본문에『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란 높은 곳, 고상한 곳, 거룩한 곳,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그 위치부터가 세상 고향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생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두더지나 지렁이나 굼뱅이처럼 땅속을 헤집으며 땅속에서 사는 생물입니다. 그것들은 땅 위로 나오면 죽습니다.

    둘째는, 개미나 뱀처럼 땅 위를 기어다니며 사는 생물입니다. 그것들은 공중에 매달아 놓으면 죽고 맙니다.

    셋째는, 새나 날아다니는 곤충처럼 하늘을 날며 사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땅속에 묻어 놓으면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속하는 존재여야 할까요? 두더지나 지렁이처럼 땅속을 헤집고 다니며 빛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편 땅 위에 살긴 해도 개미나 뱀처럼 한 번도 일어서지 못한 채 땅 위를 기어 다니며 사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가치 있는 존재로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영원 지향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본래 바울은 유대 시민권과 로마 시민권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은 유한한 것이니 임시적인 것일 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준비한 곳입니다.

    본문 16절에『…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을 보면『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주님은『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서는『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장 1절을 보면『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했고,『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순례자들이 사모하는 더 나은 본향의 특성은, ① 하나님께서 만드신 곳입니다. ② 우리를 위해 만드신 곳입니다. ③ 그곳은 영원한 곳입니다. ④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⑤ 그곳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순례자들은 돌아갈 고향이 없는 실향민이 아닙니다. 더 좋은 본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본향 찾는 순례자의 행렬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는 사실상 순례자의 여로였습니다. 초기 박해 300년을 위시하여 1000년이 넘는 로마 카톨릭의 박해 아래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항쟁한 신앙 투사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의 걸음을 걸었습니다. 그 중에 17세기에 일어난 청교도 운동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청교도」란 퓨리탄(Puritan)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영국의 엘리자베드(Elizabeth) 여왕 때 로마 카톨릭 주의자들이 신교도들을 조롱하고 경멸하여 악평하면서 그들과 구별시키는 데 쓰여진 용어입니다.   또한 영국 국교회(성공회)주의자들로부터 분리주의자란 개념으로 사용된 이름입니다.   나중에 신교 중에서도 알미니안 주의를 반대하는 칼빈주의 교도들에게 쓰여진 이름입니다. 어떤 경우든「퓨리탄」은 거룩한 순례자들의 교회사적 이름이었습니다.

    퓨리탄 운동의 역사적 배경은 영국의 왕 헨리 8세(1509-1547)의 왕가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형수 캐더린(Catharin)과 결혼하여 메리(Mary)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그 후 그의 궁녀 앤 볼린(Ann-Boleyn)과 재혼하여 딸 엘리자베드(Elizabeth)를 낳았습니다. 실망한 헨리는 시모어(Jane Seymour)와 결혼하여 마침내 아들 에드워드(Edward)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6세 때 즉위한 에드워드는 7년간 왕위를 지키다가 16세 되던 때 죽었습니다(1547-1553). 그러나 이 7년간은 영국에서 신교 운동이 싹트게 된 좋은 계기였습니다. 이 때 그래머(Grammer) 감독의 공은 컸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죽은 후 헨리의 첫 딸인 메리가 왕이 되자 그는 로마 천주교 교황과 손을 잡고 수많은 신교 지도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피의 여왕 메리」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유명한 그래머 감독도 순교했으며, 또한 유명한 그래머 지도자 후퍼(Hooper:1495-155 5)는 교회 안의 성직자들이 제복 입는 것을 반대하다가 결국 메리 여왕에 의해 투옥되고 마침내 사형(화형)을 당했습니다. 이 때 많은 신교 지도자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수많은 영국의 신교 지도자들이 대륙으로 종교적 망명을 떠났는데 그 대부분이 제네바의 칼빈에게 와서 개혁 교리를 배웠습니다.

    메리 여왕이 죽은 후 헨리의 둘째 딸이었던 엘리자베드가 왕이 되어 오랫동안 집권하였습니다(1558-1603). 이 때 피난 갔던 영국의 신교 지도자들이 많이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드 여왕은 구교와 신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교회 수장령(왕권 신수설)을 부활시켰습니다. 이것이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입니다. 그것은 실상 신교 박회의 조짐이었습니다.

    이 때 캠브리지 대학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카트라이트(Tomas Cartwright:1535-16 03)가 엘리자베드 여왕의 종교의 정치화를 반대했습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 제복, 제단뿐 아니라, 성자 숭배, 신부 사죄권, 교회 내의 십자가상, 성례시 무릎 꿇는 것, 주일 바로 지키지 못한 것 등… 온갖 영국 교회의 부패에 강하게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자베드 여왕은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고 신교도들을 박해했습니다.

    엘리자베드 여왕이 죽자 왕손이 끊어진 영국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James 6)를 제임스 1세로 하여, 스코틀랜드와 영국이 통합되어 스튜아트(Stuart) 왕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도 교회 수장령(왕권 신수설) 신봉자로 신교도를 박해했습니다(1603-1625). 그가 죽은 후, 그 아들 찰스 1세(Charles 1)가 즉위했습니다. 그도 교회 수장령 신봉자로 수많은 신교도(청교도)를 박해했고, 청교도 박해 법령까지 제정했습니다. 이렇게 청교도박해 세월이 흐를 동안 영국 안에서 절대 다수의 청교도의회 의원이 생겨 의회를 장악하고, 전 영국에 평신도 운동(신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왕은 10년간이나 영국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국 국왕 군인(국교 군인)과 의회 군인(청교도)간에는 싸움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청교도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 때 청교도군을 승리로 이끈 자가 유명한 크롬웰(Cromwell:1559-1658)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5년간 영국의 대통령이 되어 공화 정치를 선포하므로 영국은 신앙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리쟈드(R. Cromwell)가 다시 왕이 되었으나 그의 불신앙과 무능으로 다시 찰스 2세가 왕이 되어 신교 박해가 또 다시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 퓨리탄 운동의 지도자들 중에는 존 밀톤(J. Milton), 존 번연(J. Bunyun), 존 오웬(J. Ow en)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청교도 운동의 물줄기를 하나님께서 미국땅으로 옮겼습니다. 그것이 제임스 1세가 영국을 통치하면서 청교도를 박해하고 있던 때인 1620년입니다.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신앙망명(종교 망명)을 떠났던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개척자가 되어 오늘 미국 건설의 조상이 되고 신교도 왕국이 된 것입니다. 위와 같은 청교도 운동의 한 국면에서 우리는 청교도 정신이나 저들의 신앙과 신학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1. 청교도 운동은 말씀에 대한 신실한 충성이었습니다.

    당시 합리주의자들은 성경보다 인간의 이성을 더 높였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성경보다 인간 감정을 더 중시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 자들은 성경보다 교회의식을 생명시하였습니다. 영국의 왕들은 성경보다 권력 신장을 우위권에 두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난국 속에서도 청교도들은 모든 사람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성경에 입각한 신앙과 교리와 예배와 생활을 생명시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은혜로 주어진 믿음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결코 구원은 인간의 노력 행위나 다른 어떤 종교 의식 행위에 있지 않다고 주장함으로 로마 카톨릭과 영국 국교에 도전하였습니다. 그것은 주일 성수와 엿새 동안은 부지런한 노동과 밝은 윤리 생활과 자녀들의 철두철미한 신앙 교육을 강조하였습니다.

     

    3. 정교 분리주의였습니다.

    청교도들은 로마 카톨릭의 종교 어용화나, 헨리 8세 메리 여왕, 제임스 1세, 찰스 1세, 찰스 2세로 이어지는 왕권 신수설(교회 수장령)은 종교를 정치 도구화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로마 카톨릭에서 떠나고, 영국 국교회주의에서 떠나고, 나중에는 영국 땅에서 떠났습니다.

     

    4. 청교도들은 설교를 생명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에서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듣는 방법은 교회 의식이 아니고 교회 예배중의 설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주석, 문서 운동을 통한 복음 전파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모두 위대한 설교가들이요, 작가들이었습니다.

     

    5. 신앙 자유를 향한 순례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신앙 자유, 예배 자유를 삶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대륙으로, 영국에서 미국 땅으로 신앙 망명길을 서슴지 않고 떠났습니다. 바로 그 길이 아브라함의 길이요, 모세와 그 백성의 길이요, 바벨론에서 시온을 향하던 이스라엘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기 백성을 새로운 세계인 미국 대륙으로 이륙시켜 성경에 기초한 첫 공화국을 수립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 미국땅에 펼친 대 축복의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청교도의 후예들은 저 아메리카 대륙에서 오늘의 요셉의 창고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좋은 본향을 찾는 순례자들의 후예입니다. 거룩한 순례자들의 후예입니다. 더 좋은 축복의 성을 향하는 순례자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의 삶의 철학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순례의 길에는 꿈이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감사와 찬송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나은 본향을 찾는 순례자들의 순례 여로 위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의 은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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