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이 표적이니라(눅 2:11-14)
  • 조회 수: 244, 2013.08.23 21:48:12
  •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올 성탄절은 여느 해와 그 감회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1천년대의 마지막 성탄절이기 때문이겠지요. 성탄절을 맞이하여 성도 여러분들의 심령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의 밤에 천사들은 들판에서 자기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구주 나심의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말씀은 정말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백 년 동안 억압당하면서 살았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후로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당시에도 로마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습니다. 그 험난한 역사의 시련기를 거치는 동안 유대인들을 지탱해 준 힘은 메시야 신앙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메시야가 오실 것이며, 그 메시야가 오시면 유대인들의 눈물은 멈추고 밝은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메시야,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메시야가,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목자들은 얼마나 흥분하고 놀랐겠습니까?  게다가 이 엄청난 소식이 왜 하필이면 보 잘 것 없는 자신들에게 전해졌는가 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소식은 고위층 사람들이 먼저 아는 게 보통입니다. 그리고 하찮은 목자 같은 사람들은 나중에 귀동냥으로 듣는 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자들이 먼저 듣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사람들이 와서 전해준 것이 아니라, 천사가 나타나서 말해 주니 목자들은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믿기 위해서는 표적이 필요했습니다. 몇 주전에 우리는 표적에 대하여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이 말은 <그것만 보면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드는 상징적인 것>을 말합니다. 지금 목자들에게도 표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표적이 필요한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과연 그 태어나신다는 분이 진정한 메시야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 이전에도 거짓 메시야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갈릴리 출신 <유다>라든지, <드다> 같은 자칭 메시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니다가 실패한 것을 목자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천사들이 전해준 말이 사실이며, 그 메시야는 진정한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해 줄 수 있는 표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본문은 표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들이 언급한 표적은 표적치고는 정말 이상한 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언급한 것은 표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강보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가 어떻게 메시야의 표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메시야는 백성을 구원할 분입니다. 남을 구원하려면 남보다 강해야 합니다. 남보다 부자이어야 합니다. 남보다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남보다 권력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남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인도자가 되고, 구원자가 됩니다. 이런 메시야의 자격과 조건을 갖추려면 굉장한 부잣집에서 태어나시거나, 왕궁에서 왕자로 탄생하시거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싶은 생각이 들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굿간이 뭡니까?  또 말구유는 무엇입니까? 구유는 짐승의 밥통입니다. 냄새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함의 상징입니다. 낮음의 상징입니다. 세상 천지 어디서도 아기를 마굿간에서 낳아서 말구유에 누인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아기를 메시야로 인정하겠습니까? 세상이 웃을 일이 아닙니까?  마치 이것은 얻어먹는 거지가 온 세상을 먹이겠다고 하는 것과 같고, 감옥에 갇힌 사람이 세상을 자유롭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분명히 구유에 누인 아기를 표적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엉뚱한 표적을 말씀하셨을까?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고, 성경 전체의 핵심이며, 성탄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알맹이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표적을 보이셨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높음과 화려함과 부함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음을 선언하시면서, 정반대로 낮음과 가난함과 희생함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자칭 메시야들이 많이 있었고, 사람들은 높은 사람, 배운 사람, 고귀한 사람을 보면 메시야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군림하고, 다스리고, 착취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높고 권력 많은 사람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그들은 그 권력으로 백성을 착취하고 죽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주전 약 160년경부터 헬라 제국의 지배로부터 백성을 건지고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한 마카비 가문에 기대를 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카비 가문은 권력을 장악한 후 권력 다툼에 여념이 없었고, 백성을 돌보기는커녕 자리 싸움에 바빴으며, 마지막에는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카비 가문은 메시야처럼 사람을 건져 구원하기는 커녕 유대 나라를 로마에 손에 넘겨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지식이 많은 학자와 율법에 통달한 서기관들에게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만, 서기관들은 그 율법적 지식으로 오히려 백성들을 무식하다고 비난하기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자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더 부자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 부함으로 백성들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실패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힘있고, 돈 있고, 배운 사람들을 보면 혹시나 메시야가 아닌가 하고 쳐다보았고, 그들이 유혹하면 가짜 메시야에게 속아넘어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권력이나 돈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귀한 사람이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부자가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높은 사람이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지식인이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높은 것으로 따진다면 로마 황제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겠지만, 그는 구원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식민지 백성을 학대하는 지배자일 뿐이었습니다. 지식으로 따진다면 로마 안에 위대한 학자들이 많았겠지만, 그들도 구원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기준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높은 모습이 아니라, 낮은 모습으로 세상을 구원합니다.영광 받고 지배하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고난받고 죽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부함으로써가 아니라, 가난하게 됨으로써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메시야관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고귀하다는 선입견, 메시야는 높은 분이라는 선입견, 메시야는 부자라는 선입견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메시야상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전혀 새로운 메시야의 표상이 바로 냄새나고 추한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야  말로 진정한 메시야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여리고성의 삭개오같은 세리를 구원하려고 했습니까?  아무도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낮아지셔서 자신이 세리처럼 되심으로 삭개오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저주하고 욕했습니다. 더러운 죄인의 집에서 함께 식사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욕지거리를 들어면서 묵묵히 삭개오와 마주앉아 식사하시던 그 자리는 또 하나의 말구유였습니다. 주님은 기꺼이 그 말구유에 누우셨고, 거기서 주님은 삭개오의 메시야가 되신 것입니다. 
            누가 창녀를 구원할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더러운 여인이 눈물로 당신의 말을 씻기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도록 허락하심으로써, 다시 말해 창녀의 손길을 기꺼이 받아 주심으로써, 창녀처럼 되심으로써, 그녀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눈물이 주님의 발등에 떨어지던 그 자리가 또 하나의 말구유였습니다. 주님은 기꺼이 거기에 누우셨고, 거기서 주님은 그녀의 메시야가 되신 것입니다. 
            누가 38년이나 앓고 있는 사람을 거들떠보았겠습니까?  누가 냄새나는 환자가 우글거리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산책하듯 거닐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오셔서 그 병자의 갈아입지 못한 더러운 옷깃을 쓰다듬으시고, 그 앙상하게 마른손을 잡아 주시며, 말을 잊을 정도로 말을 걸 사람이 없던 고독한 그에게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그 오랜 병으로 냄새나던 그 사람의 옆자리가 또 하나의 말구유였으며, 기꺼이 주님은 거기 누우셨고, 주님은 거기서 그 환자의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누가 십자가를 지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강도들 사이에서 죽고 싶어하겠습니까? 누가 벌거벗기우기를 원하겠습니까? 누가 신 포도주를 마시고 싶어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기꺼이 강도들 사이에서, 마치 오래 전부터 그 강도들이 당신의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사이좋게, 높이 달리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는 또 하나의 말구유였으며, 주님은 기꺼이 거기 누우셨으며, 거기서 주님은 강도의 메시야가 되셨고, 온 인류의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말구유는 베들레헴의 마굿간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구유에 누우심으로 자신이 진정한 메시야임을 밝히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온 세상 구석구석의 말구유들을 찾아가셔서 기꺼이 그 위에 누우십니다. 우리들의 울면서 탄식하는 그 고통받는 심령의 구유에 지금도 그 분이 누워 계심을 믿으십시오. 문을 닫을 위기를 넘기면서 간신히 견디고 있는 여러분의 기업과 가게라는 구유에도 누우셔서 여러분의 메시야가 되심을 믿으십시오. 죄악으로 인해 고민하면서 슬퍼할 때, 온갖 고독과 멸시 당한 수치심에 억울해 할 때, 갈 바를 몰라 방황할 때, 그 모든 말구유에 그 분이 기꺼이 낮아지셔서 여러분과 함께 누워 계심을 믿으십시오. 지금 냄새나는 천하고 추한 구유에 우리들만 누워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 지금, 구주께서 함께 누워서 우리의 메시야가 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구유에 누운 메시야는 없었습니다. 다 출신과 신분의 뛰어남을 자랑하면서 자칭 메시야가 되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메시야는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낮아지심으로써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강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시는 방법으로 진정한 메시야가 되셔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할 때, 우리가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낮아짐과 희생과 사랑이 있는 곳에만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구유에 누우심으로 메시야의 표적을 보이셨다면 오늘날 교회도 누유에 누움으로써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교회들이 구유에 누울 차례입니다. 우리도 고난의 현장에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신음하는 세상 사람들의 구유에 누워야 합니다. 우리도 나보다 약하고,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들 곁에, 그들의 말구유에 함께 누워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과연 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크리스챤 투데이>지의 편집장이면서 고정 칼럼니스트인 <필립 얀시>가 쓰신 베스트셀러인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한 토막 나옵니다. <한 창녀가 나를 찾아왔네. 집도 없고, 몸도 병든 데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두 살 먹은 딸아이 하나 먹여 살릴 수 없는 처지였지. 울먹이며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 딸, 겨우 두 살 밖에 되지 않은 딸을 변태성욕자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 왔다는 거야. 딸의 몸을 한 시간만 팔면 자기가 하룻밤 버는 것 보다 수입이 좋았다더군. 마약 사 먹을 돈을 대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거야. 차마 듣기도 끔찍한 이야기였네. 일단은 내게는 법적인 책임이 생겼지. 아동 학대 사례는 무조건 신고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그 여자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할는지 모르겠더군. 교회에 가서 도움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고 겨우 물어봤지. 그 때 그 여인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던 완전 충격의 표정. 평생 못 잊을 걸세. "교회요? 거긴 뭐하러 가요? 그렇지 않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거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거예요."  여러분, 이 이야기는 미국 시카고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교회, 병든 사람들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건강한 사람들만의 교회, 외로운 사람들을 멸시하는 외롭지 않은 사람들만의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부자들만의 교회, 못 배운 이들의 한을 더 깊게 만드는 배운 이들만의 교회, 그럴듯한 직장 하나 없어서 어렵게 사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고급 직종 종사자들만의 교회, 그래서 당신은 말구유에 누웠지만, 나는 고급 향수를 뿌린 침대에서 잤다고 뻐기는 사람들만의 교회, 냄새나는 말구유에 뒹굴면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그 말구유 냄새가 역겨우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쫓아내는 교회, 이런 교회는 더 이상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악의 말구유, 추하고 더러운 인생의 말구유에 오신 것을 잊어버린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의 표적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적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보여야 할 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 이 표적이 나타나고, 또 우리가 이 표적을 보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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