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찬식 제정(마태복음 26 : 26-30)
  • 조회 수: 128, 2012.12.22 16:17:52
  • 오늘 본문은 다른 복음서들에도 나오는 최후의 만찬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 최후의 만찬은 성찬식의 근원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이 전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은 결의를 통하여 집단적으로 뭔가 비장한 결심과 새로운 결단을 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늘 본문 30절에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이후 제자들은 [찬송을 부르고서, 감란산으로 갔다]고 전합니다. 뭔가 의기양양한 새 출발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새 기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된 그 밤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서 함께 피를 나눠 마신 다음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 합니다. 베드로만 그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나머지 모두도 그렇게 말했다고 마가14장 31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의는 불과 한나절도 안 되어 뒤집어집니다. 예수님은 참 불행한 분이십니다. 저는 주님이 집행하시는 이 성만찬의 장면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셨을까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와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친밀하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그런데 싫어하는 사람과 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 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즐겁지 않아 밥맛이 나지 않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펼치시면서 어떤 심정이셨을까....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다 아시죠. 누가 자기를 팔고, 누가 자기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며..... 다 아십니다. 그 어느 제자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십자가를 함께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백아절현의 지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아라는 말은 이름이고, 절현은 줄을 끊는다는 의미이며, 지음은 소리를 안다.... 이런 의미가 있죠. 춘추전국시대에 <백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백아>는 거문고의 명인이었는데 그에게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답니다. <종자기>는 거문고를 타지 못했으나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잘 듣는 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아>가 높은 산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옆에서 <좋다! 우뚝하기가 태산같구나!>하고 운을 떼었습니다. <백아>가 흐르는 물을 마음에 두고 거문고를 탈 때는 <좋다! 도도양양하기가 마치 큰 강물 같구나!> 하여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백아>의 생각을 다 헤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종자기>가 죽었습니다. <백아>는 친구가 죽자 세상이 텅 빈듯하여 거문고의 줄을 칼로 끊어버리고 거문고판은 도끼로 찍어서 활활 타는 아궁이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두 번 다시 거문고를 타지 않았습니다. 지음... 즉 내 말소리만을 듣고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을 다 헤아려주는 친구 라는 말이 바로 이 이야기에서 나왔습니다. 알이지, 소리음.... 이 지음이라는 말은 내 마음을 나와 똑같이 알아주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하면 예수님을 둘러싸고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께 백아절현의 지음과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이 말씀 안 하셔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죠. 얼마나 예수님이 외로우셨을까요. 조금 있으면 한 놈은 나를 팔고, 다른 놈들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 자들.... 그리고 큰소리치는 이 놈 베드로... 입만 살아가지고.....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런 제자들을 품고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펼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를 판다고, 자기를 버린다고, 자기를 배신한다고.... 쓴 말씀 한 마디 없이 이들을 다 사랑으로 품는 주님의 마음이 최후의 만찬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미우면 한 밥 상에 같이 하지 않죠. 그러나 가족은 미워도 한 밥상입니다. 우리 주님이 성찬을 하라고 하신 것은 주님이 제자들을 품은 것처럼 우리도 가족들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만찬의 의미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비록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 준 제자들의 모습은 형편없었지만 제자들이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눈을 뜨고 철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는 이 사건을 두고 평생 자책을 가지고 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자책은, 스스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피의 결의로 세운 새 언약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한 나약한 자신들에 대한 영적인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달아난 자신들의 처신과 자신이 스스로 고백한 약속을 뒤집어 버린데 대한 제자들의 자책과 부끄러움이 모두 회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그들은 가롯 유다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끝까지 주님에 대한 신심을 놓지 않았을 것으로 믿습니다.

     

    사실 주님이 잡히시던 그 밤에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명 영에 속한 자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죄를 대항하여 이기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한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육신이 있는 한 죄는 항상 기회를 타서 우리 삶이 자신의 기대와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합니다. 바울에게서 육신은 몸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로마서8장5절에서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육신이 신체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자신의 욕망이나 이기적인 자기애을 육신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함께했던 제자들은 아직은 나약한 육신을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욕망과 자기애를 넘어서지 못해 결국 그들은 주님을 배신했고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져 버렸고, 주님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초대교회 시절 그들의 살아생전의 성만찬은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신다는 의미 이상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그들의 삶이 성찬을 통해서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생명(blood)과 몸(body)을 먹고 마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체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들의 인격과 성품이 그리스도화 해가는 구체적인 실천이었으리라 ale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성만찬은 깊은 감격과 생명력을 주는 예배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예전의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다시 만났습니다.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마심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였습니다. 성만찬에서 주님을 만난 그들은 그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변화라는 역동적 신앙을 갖게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현장에는 그의 원하시는 대로 새롭게 소생한 무리들이 그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의 사건을 이 예전 속에서 실현했습니다. 그래서 성례전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말씀만 듣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 가운데서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나아갔습니다. 성만찬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실현되는 은혜의 예전입니다.

     

    따라서 성만찬의 결론은 우리의 거듭남에 있습니다.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삶이 주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날마다 지어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올려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육신을 입은 우리는 성만찬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나 육신을 입은 우리는 늘 넘어지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입니다. 이기고 승리하는 길은 내가 가는 길이 아니고, 내가 나를 맡기고 가는 길입니다. 맡김은 순종입니다. 오늘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으면서 우리 모두가 주 성령님의 이끄심에 온전하게 순종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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