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로다(눅 2:8-14)
  • 조회 수: 339, 2013.08.23 21:43:19
  •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예수님 탄생하실 즈음에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다 근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이 메시야 나타나실 때 이전에도 혹 메시야인가 해서 몰려갔던 일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나셨지만 혹 다른 이를 기다려야 될지 몰라서 딴 사람이 또 올 것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본문 12절 하반절에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말씀을 잘 헤아려 보면 이미부터 무엇인가 징조에 의해서 그 표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얘기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한 것 보니 강보에 싸여 누인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 인물이요 표적이라면 그 이전에 이러한 분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또 예표하여 징조로 보여주신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징조를 붙들고 이러한 징조의 표적 되는 실물이 언제 나타날 것인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바로 이 아이가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라고 설명한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2장 14절에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면 온 하늘과 온 땅이 모두 영광이 되며 혹은 평화로울 것쯤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만 이 본문을 두고서 더욱 그렇게 말씀들 하고 있습니다만 이 본문을 자세히 좀 정성을 가지고 읽어본다면 이 본문은 모든 이에게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다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이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에게 주 예수 탄생은 평화가 된다 라고 제한하고 있으니까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게 된다면 기뻐하심을 입지 못한 경우의 존재에게는 주 예수 탄생이 평화의 도구일 수는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을 간단하게 유추해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했으므로 하늘에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 가까이까지 왕래하는 사탄이랄지 악한 영들이랄지 이러한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예수 육신을 입어서 탄생하시는 것이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는 하나님께 하나의 영광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어떤 영들에게는 예수의 육신 탄생과 또 그의 탄생은 후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질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영들에게는 패망이요 실패가 되는 사실이라는 것을 이 한 절을 통해서 분명하게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시니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 하시니 이 표적이라고 설명을 하고 설명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관계는 징조를 통하여 그 예수를 기다리지 아니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대화는 있을 수가 없는 것으로 볼 때 이제 표적을 통해서 징조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으며 또 징조에 담긴 여러가지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면 표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더 듣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표적과 징조, 징조와 표적은 보태면 하나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림자와 실체는 보태면 하나가 되어야지 다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사야서 7장을 통해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보이신 그 일에 대해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이사야서 제 7장 1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고 처녀가 잉태한다는 말씀이 있고 그리고 처녀를 통해서 나는 그 아들은 너희와 임마누엘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이 나와 있으니 이 징조 때에 이미 표적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신 바 모든 능력과 나타내실 바 뜻을 이미 징조 때에 다 설명을 해 주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베푸신 이 사건과 그리고 또 처녀 잉태한 사건과 임마누엘에 대해서 이번에 생각을 해야 되겠는데 이번 성탄에 생각을 해야되겠는데 한꺼번에 다 말씀드릴 수 없어서 오늘 저녁에는 주께서 친히 징조로 보이신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주께서 친히 우리에게 징조를 보이셨으니 참 감사하고 참 다행한 일이라 여겨지시는지요? 
    그저 간접적으로 나타내셔도 고마울텐데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로 우리에게 나타내셨으니 이것이야말로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참 고마우시지 않나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과연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 보이신 일이 우리가 그렇게 환영할 만한 일인가? 그렇게 고맙게 여겨도 되는 것인가 이해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7장 1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우선 7장 1절과 2절을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왕과 백성이 자기들을 공격해 들어오는 외침자로 하여금 마음이 얼마나 흔들렸던지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더라." 그랬습니다.
    어느 나라 누구가요? 하나님이 택한 나라 유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운 왕 이 아하스 왕이 그 주변에 있는 큰 나라들이 공격을 해 들어온다 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얼마나 흔들렸던지 왕과 그 백성이 다 같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더라 그랬어요. 삼림이, 이 수풀이, 대밭 같은 그런 수풀이 바람에 같이 획 획 같이 흔들리는 것 같더라 이랬어요. 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한 가정에도 문제가 하나 생기면 온 가족이 흔들릴지라도 하나 둘 정도는 담대한 사람이 있어 가지고 "뭐 그까짓 것 가지고 그럽니까. 세상 살다보면 별일도 다 있는 것인데 그것 다 쓰러져도 일어날 날이 있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고…." 하면서 "염려 마시오. 내가 다 수습하겠소. 걱정마시오." 해서 누가 단단히 서주는 가족이 한 두사람 있으면 다른 가족들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넘어가다가도 바로 선 기둥이 있으면 거기에 기대서서 바로서고 하는데, 
    적어도 이 아하스 왕쯤은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굳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서 있어야 흔들리는 백성이 '아, 우리 왕이 목소리도 하나 흔들리지 않고 끄떡 하지 않는 것 보니까 아무 일 없는구나' 이렇게 안심을 하게 되고 안심을 하면 마음이 담대해지고 평화해 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기도 쉬울텐데 이 나라에는 어떻게 되었던지 1절과 2절에 보면 왕과 온 백성이 삼림이 한 덩이가 되어 가지고서 바람에 흔들흔들 흔들리는 것 같이 된 것을 하나님께서 발견하시고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사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해주셨는고 하면 3절부터 9절 사이를 살펴보면 "나 여호와가 너희의 적을 막아줄테니 아무 염려 말고 내가 너희를 지켜준다는 것을 믿기만 하라. 만일 믿지 못한다면 너희가 믿지 못함을 인하여 어려움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경고까지 조건부로 붙여 가지고서 "염려 말라. 내가 지켜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이제 막 앉아서 성경을 보시겠다고 열심히 보시는데 이사야서 7장 한 장이니까 집에 돌아가서 보시기로 하고 제가 미리 고생해서 읽어서 이렇게 알려드리는데 듣기도 바쁘신데 지금 다 읽어 되겠습니까. 
    자,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이어서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나님인 나에게 징조를 구해라. 높은 곳의 것이든지 낮은 곳의 것이든지 어떤 내용이든지 저 높은 하늘에 있는 별을 가지고 뭔가 보여보라 한다든지, 저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뭐 바다 뿌리를 한번 흔들어본다든지 하나님이 저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겠다는 그 말씀을 우리가 확실히 믿어도 되는 것인가를 증표를 네가 구해라." 하나님이 증거까지 보여주면서 마음에 안심을 시키려고 이 아하스에게 제안을 했던 겁니다. 
    왕과 온 백성이 삼림에 흔들리는 것처럼 모두 두려워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약속을 단단히 해주시고서 하신 말씀이 "무슨 징조든지 구해라. 세상에 평범하게 있지 않는 그런 징조를 구하라. 내가 어떤 것이든지 구하는대로 하늘에 있는 별을 쏟아 내리라면 쏟아 내리고, 바다에 있는 돌덩어리가 별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라 하면 올라가게 할 것이고 그쯤 되면 네가 믿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너희 백성들도 그쯤 되면 안심하지 않겠는가. 안심을 해야 내가 약속한대로 너희에게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니 내 징조를 구하라." 그랬어요.
    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와 그리고 또 그 왕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같은 제안까지 하셨습니다. 11절에 그토록 이제 했는데, 자꾸 제가 절 수를 대니까 안보고 안심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이제 10절부터 보시지요. 그 앞에는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라고 했고요. "믿으라. 네가 믿지 못하면 안 된다."라고 했고 10절에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게 또 무슨 일입니까? 아니 어른이 이래라 하면 예, 저래라 하면 예 하면 그것이 제일 사랑스러운데 하물며 이 형편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확실하게 해 주겠다고 그것을 보장으로 증표까지 보여주시겠다고 "너 뭐든지 구해봐라. 내가 아무렇게나 하면 그저 내게 있는 것 하나 보여주었다 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네 무엇이든지 구하라 이렇게 했더니 딱 치켜들고, 이런 때는 우리식으로 말해야 되겠지요. 대가리를 치켜들고, 참 무식한 소리입니다만 이런 경우에는 이 말밖에 안 나올 것 같아요. 
    딱 치켜 세워서 하는 말이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나이다." 자 징조를 구하라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데도 안 구하겠답니다. 그 이유를 이제 들어보니 그럴듯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나이다." 그랬어요. 아마 이 아하스 왕이 광야 이스라엘 때에 자기 그 조상들이 하나님을 시험하여 이것도 하라 저것도 하라 다투고 원망하고 돌질하려하고 했던 그것 때문에 다 망한 것을 아마 골 속에 박혀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는 지금 내 마음은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내가 하나님더러 내가 못 믿겠으니 징조를 내게 보여보시오 나는 그런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응수를 해버렸습니다.

    자, 기드온이 서출인데 저 본출도 못하는 군대장관을 시켜주겠다 라고 하니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당한 자격을 갖춘 자들이 군대장관을 해야될텐데 장군이어야 할텐데 자기는 능력은 있지만 말하자면 자격이 저 삼위째나 되는 그런 형편인데 자기더러 시켜주겠다 하니까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게 사실이라면 용서하소서. 제가 믿겨지지 아니하니까 제가 이 양털 탄자를 오늘밤에 저 마당에다 던져 놓겠사오니 오늘밤에 이슬이 내려서 양털만 푹 적시옵고 그 마당은 뽀얗게 해 주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날라가는 말씀이 아닌 줄로 알겠습니다." "그러마. 양탄자를 던져라." 
    양탄자를 던지니까 거기만 젖었어요. 가만 보니까 물이 줄줄 흐르고 바닥은 보니까 말짱하거든요. "할렐루야!" 이렇게 하다가 그 사람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아하, 내가 반대로 할 것을 갖다가…, 양탄자는 이제 뜨뜻한 게 되어 가지고서 이 밤에 기온이 내려가니까 자동적으로 이 열기가 차이가 나서 자동적으로 이 기류변화에 의해서 이슬이 맺힌 것을 내가 이 하나님이 응답해준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구나. 내가 머리를 미리 써 가지고서 뒤집어서 할 것을…." 
    고민을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 용서하소서. 한 번 더 합시다." "뭔데?" "오늘밤에는 양탄자는 뽀얗게 두시옵고 그 옆에 있는 마당은 흠뻑 젖도록 이슬을 내리신다면 하나님이 조금 전에 하신 그 말씀이 참인 줄로 믿겠습니다." 했더니 또 하나님께서 그래라 그랬어요. "네가 안 믿어지면 또 해라." 
    그래서 다음날은 또 이슬을 내리셨는데 양탄자는 포실포실하고 뽀송뽀송하고 옆에는 흠뻑 젖어 나오니 그때는 맞구나 하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몇만 명을 데리고 나가는데 많다 줄여라 하니까 또 줄이고 또 줄이고 삼백 명 가지고 가는데 계산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믿고 나아갔지요.

    아브라함 나이 많은데 자식을 주겠다지요. 또 그 자식으로 번성케 하겠다지요. 그리고 그 대단한 재물을 가지고 돌아오겠다지요. 이렇게 하니까 이 아브라함이 참 믿어지지 않아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 증표를 보여줍니다. "네가 오늘 제단 위에 짐승들을 각각 쪼개어서 둘로 나누어 놓아라. 내가 오늘 불로 임하여서 그 짐승 사이로 가면서 고기를 익히고 그리고 고기의 기름을 태워서 연기가 나게 된다면 내가 확실한 증거로써 네게 약속을 해주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 하라."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시험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나가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드온이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이처럼 징조를 보여달라고 하면서 기다렸던 그 두 사건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그리하실 줄을 내가 어찌 알리이까?" 그랬어요. 이 아브라함이나 기드온의 마음 자세는 하나님에게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치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믿어지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 하시겠지만 내가 어떻게 알겠나이까? 내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자식이며 내 이 서출 출신 군대장관으로서 어떻게 그 합동참모본부장을 하겠습니까." 말하자면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내 자신을 향하여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실 줄을 내가 어찌 알리이까?" 자기 자신이 믿어지지 아니할 때 '주여, 내가 더 믿기를 원하오니 증거를 보여 주시옵소서' 이런 뜻에서 하나님을 시험할 때 한 번 가지고 안되면 두 번, 두 번 가지고 안되면 세 번씩이라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는데 그 징표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시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천국에 갈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또 주님이 언젠가는 반드시 재림하실 것을 믿으면 아멘 합시다. 우리 다 믿습니다만 살다보면 좀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이 아하스처럼 바람에 삼림이 흔들린 것처럼 신앙이 흔들릴 때도 있는데 오늘 밤에라도 주께서 꿈에 나타나 주시든지, 환상 가운데 나타나시든지, 조용하게 기도하는 가운데 음성이 들린다든지 해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나타나주셔서 이미 약속한 그 약속에 대하여 큰 믿음의 조건이 될 수 있는 증표를 주신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믿음이 약해지겠습니까? 더 강해지겠습니까? 큰 증거를 보면 믿음이 약해진다 라고 생각이 되시는 분 계십니까? 믿음이 강해질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강해지는 것은 내 믿음이 강해지는 겁니까? 하나님이 강해지는 겁니까? 내 믿음이 강해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하스 왕에게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그 백성과 함께 외적의 침공을 인하여 마음이 흔들려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이 된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복을 명하시고 역사하시기 위해서 한 징조를 구하라고 하였더니만, 뜻밖에 이 왕이 한다는 소리가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나이다." 이렇게 응수를 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 응수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속이 많이 상하셨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이 징조를 보이시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얼마나 잘 믿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볼 때에는 이건 잘 믿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벌써 그가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네가 만족할만한 것을 구하라. 저 하늘에 있는 높은 것이든지 땅에 있는 낮은 것이든지 무엇이든지를 구하라."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건만 나는 구하지 않겠다 라고 나온 바람에 참 우리 인간만 충격받는 줄 알았더니 하나님도 충격 받을 일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참 이 사람이 이렇게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느냐? '참 믿음 좋구나. 보지 않고 믿으니 대단하구나. 나 편하게 하는구나' 이러시지 않았습니다.

    자 13절 다시 봅니다. 이제 하나님의 감정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13절에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찌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했다 그겁니다. 아 이 사람 말만 딱 떼어놓고 보면 아브라함보다도 잘 믿는 것 같고 기드온보다도 훨씬 잘 믿는 것 같습니다. 잘 믿는 게 뭐가 잘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게 잘 믿는 겁니다. 그저 이리 하라면 이리 하고, 저리 하라 하면 저리 하는 게 맞지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그냥 하나님이 하라는대도 안 합니다. "내가 왜 그럽니까?" 이런식으로 나온 사람이 하나님께 환영받은 경우가 없습니다. 
    오늘 시간 없어 다 말씀 못 드리고 그래서 이제 13절 하반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그 다음에 다 같이 시작) 주께서 친히…" 그만요.
    주께서 친히 징조를 보이신 이유가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러므로'가 무엇 때문입니까? "징조를 네가 구하라. 그러면 네가 어떤 내용의 징조를 구할지라도 내가 그대로 보여주마."라고 했는데 "안 구합니다 나는. 나는 하나님 시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나 여호와 하나님까지 네가 괴롭게 하려느냐. 네가 그렇게 하므로 내가 친히 징조를 보이마." 이랬어요. 
    여러분, 이런 형편으로서 아하스에게 징조가 왔다면 아하스에게 그 징조는 복이 되겠습니까? 화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화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보통 "주께서 친히…" 라고 하니까 "고마워라. 감사해라. 하나님께서 종중의 종을 시켜도 괜찮을 텐데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셨던지 친히 징조로 보이셨으니 정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면서 이 징조가 대단히 도움을 줄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이 친히 주셨다고 좋아하는데, 이 친히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히"입니다 그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말은 잘 믿는 것 같지만 그 속은 완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런 사람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내어놓았으니 하나님이 친히 내어놓은 징조를 맞이하는 아하스의 형편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제 다음 설명을 또 여러분께서 기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말씀했는데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는데 이 이사야서 7장 14절의 처녀는 누구이며 처녀가 낳은 아들은 누구일까요? 여러분 스스로 대답을 해 보십시오. 
    여기에 나온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말씀했는데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의 잉태할 처녀는 누구이며 이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예? 아 처녀는 마리아요 아들은 예수라. 아멘? 
    그런데 바로 그 14절을 처음부터 잘 보십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표적으로"가 아니고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했으니 마리아, 예수, 처녀로서 잉태한 마리아와 그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는 누가복음 2장 12절 말씀대로 표적인 것이지 징조는 아닙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나타난 처녀와 아들은 징조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사야서 7장 14절에 나타난 처녀와 이 아이가 훗날 표적되신 누가복음 2장 12절의 실제 인물인 표적을 설명해주는 징조로 보이신다 했으니 마리아는 징조의 어머니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징조의 아들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이사야를 통해서 이제 징조의 어머니는 누구며 징조의 아들은 누구였던가를 또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징조의 어머니와 그 징조의 아들이 나타나게 될 때에 그때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을 보게 되면 참 표적이 되신 어머니 마리아와 그 어머니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 때의 현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이처럼 말씀해주셨는데 자 15절 이하를 봅시다. 
    그때 징조로 잉태해야 될 처녀와 또 징조로 낳을 아들의 경우가 어떤 때의 사람인지를 살펴봅니다. 15절 "그가…" 이 그는 누구입니까? 아들이지요. 처녀에게서 난 아들이지요. "그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이러면 이것 몇 살쯤 되는 겁니까? 제가 또 "악을 버리고 선을 알 때에 미쳐…" 이러니까 그때에 미쳤나? 그 말이 아니고…. 
    여러분이 모르실 것이라고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 중에 한번씩 이렇게 주님오시는 이 좋은 때에 웃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까 "그가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그런데 그러면 몇 살쯤 되겠습니까? 여러분, 대체로 아이가 이것은 나쁜 것이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을 판단할 나이가 몇 살쯤 되지요? 예? 몇 살 때 알았어요? 뭐 한 열 살쯤 되는 가리는 아이가 있고 한 일곱 살쯤부터도 가리는 아이도 있고 어떤 분들이 말씀하시기를 네 살이라고 하는데 참 빠르네요. 어쨌건 뭐 네 살이 되든지 일곱 살이 되든지 '아, 이건 나쁜 짓이니까 안 해야 되겠구나. 이건 좋은 일이니까 내가 하기 싫지만 아버지 심부름은 해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할 때 즈음에 이르러 "미쳐…" 그 말입니다.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여기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이 너는 누구입니까? 지금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나이다." 하던 사람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왕, 아하스 왕과 유다를 지금 바람에 삼림이 흔들리도록 흔들거린 두 왕이 아까 거기에 다 나옵니다. 아까 다 안 읽었습니다만 르신과 베가 이 왕이 공격해 들어오는데 이 두 나라와 두 왕을 언제 다 패망시켜서 너희를 공격 못하도록 하겠다 라고 했습니까? "내가 징조로 보여줄 아이가 자라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 전에…"라고 했으니까 이제 곧 그 아이가 나게 되면 한 칠팔 년 내에 끝나게 해 주겠다 그런 약속입니다.
    그러면 이 아하스 때의 일인데 이것이 예수님 때에 해당됩니까? 안됩니까? 안됩니다. 이 아이는 예수님 때에 해당되는 아이가 아닙니다. 이 엄마도 예수님 때에 해당되는 마리아가 아닙니다. 그렇다 라고 해서 마리아와 상관이 없고 예수와 상관이 없는가? 아니요, 징조라 하지 않습니까. 징조(徵兆), 이 징조는 후일 무엇이 나타날 것을 말해주는 겁니까? 표적이 나타날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얘기가 되고 끝이 났으면 참 좋겠는데 17절 말씀이 아하스 가슴을 철컹하게 만듭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그랬어요. 이거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네가 한 징조를 구하라. 억압된 너희에게 자유를 줄 것이라. 높은 곳에 있는 징조든지 아래에 있는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구하라. 네가 믿기에 확실한 징조를 구하라. 내가 그 이적을 보여주겠다."라고 했는데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나이다." 말이야 얼마나 휼륭한 믿음인지, 실제로 믿음이 강한 사람은 항상 자신을 부족한 줄 여기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은 아주 잘 했습니다. 나는 구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괴롭게 해? 그렇다면 내가 친히 보이지." 하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가 자라나서 버터와 우유를 먹기 시작하기 전에 젖을 떼고 이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을 알게될 그 때쯤 되기 전에 너를 괴롭히던 너를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던 것처럼 만들었던 이 두 왕을 패망시켜서 내어쫓겠느니라." 
    거기까지만 말씀을 끝내고 하나님이 획 떠나가셨으면 아하스가 할렐루야 했을텐데 "안 끝이야. 마지막으로 네게 말하노니 너와 네 백성과 그리고 네 아비 집에 너희가 지금까지 당해보지 못한 가장 악랄한 날들이 도래하게 될 것이니 바로 그 징조된 아이가 선악을 알기 전에 네가 이 꼴을 당할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표적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실 일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징조로 보여주실 때의 일을 보게 되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에게 미리 어떻게 해서 보내왔습니까? 아니면 친히 보내셨습니까? 징조 때와 마찬가지로 친히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시는 이 일을 인하여 온 세상 모두가 행복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 때에 징조로 나타나는 이 징조를 인하여 당시의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화가 왔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놓고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 해 가지고 온 땅에 평화가 오는 줄 압니다. 그렇다면 저는 불만입니다. 이 세상에 왜 우리가 평화가 없습니까? 왜 우리가 두렵습니까? 이 세상에 마귀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다고 질병도 춤 출 일이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고 마귀도 춤 출 일이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고 가난도 춤 출 일이라면 우리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누가복음 오늘 본문 제 14절에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랬어요. 땅에서는 모두에게 평화가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탄생을 인하여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되지만 기뻐하심을 입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멸망의 날이 되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사야 시대에 아하스를 붙잡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친히 징조로 보일 것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이가 자라서 선악을 알기 전에 내가 분명하게 말하노니 너희를 괴롭히는 악한 것들은 패망하여 도망할 것이라. 다 무너질 것이라." 이 일을 기뻐하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악한 것들이 무너져야 평화가 되는 것이지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다고 무슨 평화가 됩니까? 우리를 괴롭히는 가난이 떠나가야 평화가 되고, 우리를 괴롭히는 질병이 떠나가야 평화가 되고,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하는 직장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평화가 오고, 복잡한 회사 문제 저 부도날 문제 해결이 되어야 참 평화가 오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 오실 때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요인들을 패망시키시고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겠다는 것이니 징조를 보여주실 때에도 사실이 그러하고, 표적으로 나타났을 때에도 천사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땅에서는 모두가 다 예수로 말미암아 승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평화로다. 그러나 기뻐하심을 입지 못한 자, 곧 죄악이며 마귀며 귀신들이며 그리고 주 예수의 나심을 반대하는 자며 하나님을 부르기는 부른다 하더라도 아하스처럼 말로는 가장 잘 믿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겉으로는 번듯한 모양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자기 욕심을 다 차리고, 이런 자들에게는 평화가 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될 것이라 하였으니. 

    실제적인 표적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 그 현장을 한번 설명 드려 볼까요. 조용한 사람들, 목자를 비롯해서 저 동방에 있는 박사들까지 평화롭고 주님의 나타나심은 얼마나 좋았던지 짐승들까지도 찬양을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난리가 났습니다. 겉으로야 "예수의 나신 곳이 어딘지 박사들이여 우리에게도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려 하오." 그러나 실제로는 얼마나 다급했던지 칼을 뽑았습니다. 예수 하나 죽이려고 두 살 이하의 아들들을 다 죽이는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오심은 헤롯 패거리들에게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망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 직전에 나타나셔서 예수를 대변한 대변자 세례 요한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예수가 곧 가까이 왔느니라. 보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므로 온 땅에 평화가 올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나무뿌리에 도끼가 이미 놓였으니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피하라 하더냐." 
    오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오히려 불을 주려 왔노라. 내가 검을 가지고 왔으니 짤라낼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짤라낼 것이 없었다면 주님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는 검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불화시키려고 왔습니다. 무엇과 우리를 불화시키려 했습니까? 근심 걱정, 더러운 죄악과 마귀의 괴계와 함께 살아가면서 괴로워하는 우리들, 억압되어 소망이 없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악한 것들 불신앙의 부정적인 것들을 끌어내기 위해서 오셨으니 여러분, 주의 성탄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을 떠나가게 하시고 우리를 실제적으로 자유케 해 주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셨으니 아무나 다 기뻐하고 있습니다만 속 영혼까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기뻐하실 사람은 누구냐?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기뻐하십시오. 환영하십시오. 오시는 주께서 우리의 환영만을 받기 위해서 조용히 오시는 것이 아니라 검을 가지고 오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불을 가지고 오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했으니 기뻐하심을 입은 여러분에게는 보혜사로 우리에게 오시겠지만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에게는 불로 역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금년 한 해 어렵게 지냈습니다만 금년 성탄을 통하여 우리의 환영을 받고 오시는 주께서 우리를 억압했던 모든 환경들을 끊어주심으로 주로 말미암은 참 평화가 우리의 것이 될 줄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다음 시간에는 그 중요한 임마누엘에 대해서 그리고 이 처녀 징조로 나타난 처녀는 누구며 징조로 태어난 아들은 누구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면서 그 징조를 통하여 표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에 대해서 이해하는 시간을 우리 성탄절 메시지에서 함께 나누겠습니다.

    104장 찬송합시다.

    우리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만 환영을 받으시려 하시고 우리 안에 그저 주님 안에 계심으로 평화를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환경들을 징조로 보일 때부터 표적되신 주님 오실 때에는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세워질 것은 세워지는 것이니 기뻐하심을 입은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기뻐하심을 입지 못한 존재들의 우리를 둘러싼 억압들은 무너지게 되는 큰 역사를 이루려고 권세와 함께 속에 사랑을 숨겨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올 줄 믿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맞이하므로 인하여 이 어려웠던 한해,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주로 말미암은 평안이 만족이 그리고 소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 충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오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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