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안히 놓아주소서
  • 조회 수: 236, 2013.08.23 21:57:00
  •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큰 부자의 외아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급한 부자는 이름난 의사들을 사방에서 모셔다가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소년은   <내가 옹달샘 물을 마시다가 실지렁이를 마셨는데, 지금 내 배속에 지렁이가 가득할 것>이라고 하면서 떼굴떼굴 굴렀습니다. 의사들이 많이 다녀갔지만, 소년은 낫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유명한 의사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의사도 소년을 진맥한 다음 한 첩의 약을 지어 놓고 이것이 효험이 있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로서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노라고 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집에 주인 아들을 어려서부터 키운 머슴이 있었습니다. 마슴은 부자에게 의사가 지어놓은 약을 자기가 달이겠노라고 자청하였습니다. 늙은 머슴이 자기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줄 아는 부자는 허락을 했습니다. 머슴은 약을 달이는 척 하다가 의사가 지어준 약을 쏟아 버리고 그 대신 자기의 삼베 끈을 잘라서 약탕관에 넣고 푹푹 삶은 다음 그것을 도령 앞으로 가지고 가서는 의사께서 말씀하기를 <이 약을 먹을 때는 반드시 눈을 감고 먹어야 한다>고 했다면서 도령의 눈을 감긴 채 자기의 삼베탕을 먹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소년이 대변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무수한 실지렁이가 배설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삼베 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소년은 그 날 아침부터 깨끗하게 나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았을까요? 소년은 자기 배속에 있던 실지렁이가 모조리 빠졌다고 생각하면서 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까딱하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자유와 해방>은 모든 사람의 이상입니다. 자유와 해방은 반드시 정치 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유명한 연설 중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네 가지 자유를 언급했습니다. 첫째는 언어와 표현의 자유, 둘째는 신앙의 자유, 셋째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넷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네 가지 자유는 모두 정신적이요, 영적인 자유입니다. 사람은 배만 부르다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더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아무리 잘 먹고 좋은 옷을 입어도 무언가 말못할 고민거리를 가슴속에 안고 있으면 얼굴이 수척해지고, 나중에는 그 음식을 보아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고 좋은 옷도 시들해집니다. 그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1999년의 마지막 주일을 지키는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지금 혹시 무엇인가 때문에 억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언가 떨쳐내지 못한 채로 매여 있지는 않습니까?     

             본문은 묶였던 무거운 짐에서 놓여 자유를 얻은 노 신앙인 한 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시므온입니다. 본문에서 시므온의 노래 소리를 듣습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시므온은.무거운 짐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을 억압하고 있던 짐은 무엇입니까? 시므온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구원을 갈망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 고통받는 백성을 위로하실 때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 갈망이 너무 커서 다른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눈으로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토록 열망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26절을 보시면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의 마음은 더 간절해졌습니다. 이제 살아 생전에 메시야를 보게 된다는 약속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더 간절하게 기다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곧 오실 줄 알았던 메시야는 그렇게 빨리 오시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은 어느 덧 백발이 되어갔습니다. 억지로 성전에 드나들며 기도하는 삶을 살았지만, 날마다 눈도 어두워지고 기력도 쇠하여졌습니다. 의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약속을 지키실 것인가?  정말 메시야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인가? 기다리다 지쳐서 그 마음의 불꽃이 재만 남기고 다 꺼질 무렵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왠지 성전에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27절 말씀처럼 성령께서 그를 감동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그의 생애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한 젊은 부부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를 보는 순간 눈이 열렸습니다. 그 아기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다 풀리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놀라운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28절 이하를 보시면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나이다!> 놓임 받는 기쁨,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홀가분함, 날아갈 듯한 자유, 이게 바로 시므온이 얻은 은총이었습니다. 
            수학 능력 시험 성적이 발표되고, 엊그제부터 특차 합격자 발표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우님 가정의 자녀들도 몇 사람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긴 긴 싸움을 싸워서 드디어 합격 통지를 받는 순간, 그 오랜 세월 동안 짓눌리던 짐을 한 순간에 벗어 던지게 될 때의 그 자유, 그 홀가분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시므온은 그런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해를 마무리할 시점에 서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다 툴툴 털고 가벼운 마음으로 2천년을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 무엇을 위해 좇아 다녔습니까? 좇아 다녔다면 좀 낫지만, 반대로 무언가에 의해 정신없이 쫓겨다니지는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쫓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신없이 달려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았다면 이젠 좀 털고 일어설 때입니다. 그 스트레스에서 좀 벗어나야 합니다.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혹은 지난 한 해 동안 무엇인가를 성취하여 그 기쁨에 사로잡힌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 기쁨도 털어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기쁨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기쁨은 우리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교만의 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실패로 인한 아픔입니다. 그렇게 좇아 다녔는데도 되는 게 별로 없어서, 이루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분들이 있는 줄 압니다. 너무 아쉬운 나머지 한이 되어 가슴을 짓누르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털어 내야 합니다. 그 실패의 아픔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지난 한 해의 죄도 털어 버려야 합니다. 그 죄책감을 그대로 가지고 새 해를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도 새처럼 훨훨 날 수 있는 자유 속에서 새 해를 맞을 수 있을까요? 시므온이 무거운 짐에서 놓은 자유를 맛본 것은 언제입니까?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분을 봄으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해결되었습니다.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나이다>란 자유의 감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 또 한 사람 마리아를 생각해 봅시다. 마리아는 성전에서 시므온을 만났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보라 아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했습니다. 네 마음이 칼로 찔리는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시므온의 말을 듣는 순간 마리아의 마음은 무거워졌습니다. 돌덩어리를 얹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다른 어머니들은 아기를 위한 결례를 행한 후 성전을 떠날 때 기뻐하면서 나가는데, 마리아는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웃을 수 없는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성전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리아의 이 무거운 짐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장하셔서 공생애를 감당하시는 모든 것을 뒤에서 바라보면서 내내 마음이 짓눌려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놓임 받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마리아도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시간을 사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쉽게 오지 않고 일생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무게가 가장 무겁게 느껴진 순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할 때였습니다. 아들의 죽음, 이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그런데 드디어 마리아도 짐을 벗고, 자유를 얻는 순간이 왔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셨을 때,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을 때, 부활하신 아드님을 뵙는 순간 마리아의 일생의 눈물과 고통은 한 순간에 벗겨지고, 그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다락방에 모였을 때 마리아는 한없이 감격하고 기뻤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모든 일이 명백하게 나타났고, 자신이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아기를 낳으리라는 말을 들은 이후 일생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벗겨졌으며,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드려진 영광된 생애가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슬픔도 없었고, 부담도 없었습니다. 자유와 기쁨만 있었습니다. 역설적인 것은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인해 짐을 지게 되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그 짐을 벗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도 99년 한 해 동안 많은 부담이 있었습니다. 성경 통독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면서 끝까지 잘 마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건강이 뒷받침될까? 성도들이 끝까지 참여할 수 있을까? 등 등을 생각했습니다. 이젠 이런 염려에서 놓일 때가 되었습니다. 99년 한 해 동안 제 나름대로 우리 교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성장해야 할 목표를 마음속에 정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목표가 달성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감을 잃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좀 더 잘하지 못한 모습에 대하여 부끄럽고 안타까움도 많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 관계에 실패한 일도 많았습니다. 좀 더 따뜻하게 대해야 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찾아보아야 할 사람들을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좀 더 베풀어야 하는데, 손이 펴지지 않아서 충분히 베풀고 나누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지른 많은 잘못과 허물도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 허물과 죄로 인한 죄책감도 털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주일을 맞으면서 저는 다음 시험을 위해 지난 시간 시험결과를 잊기로 한 학생이 되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시험 답안지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어도, 이젠 잊어야 합니다. 시험은 다음 시간에도 있습니다. 지난 시간 실패에 너무 깊이 사로잡히면 다음 시간 시험에 또 실패할 것입니다. 이젠 털고 잠시 밖으로 나와서 시원한 공기를 들이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 잊어야 합니다. 그 후 다시 다음 시간 시험에 응해야 합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는 이 시간은 바로 그런 일을 할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올 한 해의 모든 잘못된 부분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놓임을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시므온처럼 <주여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찬송하게 되길 갈망합니다. 
            육체만 휴식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정신과 영혼도 쉼이 필요합니다. 그 쉼과 휴가는 무거운 짐에서 놓이는 것입니다. 부담을 떨어내는 것입니다. 강박관념을 떨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욕망을 벗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용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므온도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자유를 얻었고, 마리아도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순간 짐을 벗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털고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의 휴지통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작아서 쓸모 없는 휴지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큰 쓰레기 청소차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후회, 우리의 슬픔, 우리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 우리의 죄악과 허물들, 그리고 꿈이 지나쳐 강박관념적인 욕망이 되어 버린 그 모든 스트레스들, 그리고 이루었다고 우쭐하면서 교만했던 그 자기도취의 감정들,,,형언할 수 없이 많은 육체적 짐들, 정신적 짐들, 영적 짐들, 그 쓰레기와 같은 감정들을 다 버려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는 분입니다. 얼마든지 우리 영혼의 짐들을 깨끗이 치워주실 분입니다. 그 분께 버릴 것들을 다 버립시다. 그 분께 다 맡깁시다. 그리고 격렬한 경기가 끝난 후 상대방 팀의 선수들을 끌어안고 운동장을 달리는 선수들처럼 그렇게 자유하게 되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분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말씀하기를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인생이란 물동이는 예수님 안에서 채워졌고, 여인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더 이상 여인은 물동이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여인의 속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송창식이란 사람이 부른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 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에서 깨어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며 고래 잡으러.............> 대충 이런 가사의 노래입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면서 열심히 살아 보아도 슬픔만 가득한 인생, 사방을 둘러 보아도 내게 등돌린 세상 뿐, 이게 인생입니다. 어쩌면 1999년이 그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젠 다 털고 일어날 때입니다. 이젠 고래를 잡기 위해 2천년을 향해 달려갈 때입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더 이상 슬퍼하면서 앉아 있지 마십시오. 이젠 손에 쥔 욕망들, 실패의 감정들, 작은 성공에서 오는 교만들, 모두를 털고 문열 열고 나갈 때입니다. 고집도 털고, 자존심도 털고, 모든 얽어매는 감정들로부터 놓일 때입니다. 과거 전체를 털어내십시오, 고민과 좌절의 골방 안에 갇혀 계시지 말고, 문을 열어 젖히고 밖으로 나와서 성령의 새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여러분의 고래를 잡기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출발하시길 기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노래는 <삼등 열차를 타고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등 열차를 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의 열차>를 타고 달려가도록 합시다.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나이다!>  이 마지막 주일 1999년의 사슬로부터 놓여 자유를 얻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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