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 밖의 초대에 응한 자들(14:16-24)
  • 조회 수: 96, 2013.08.28 16:51:09
  • 오늘은 성서학당 졸업식입니다. 학점을 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의무규정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닌데 매주 자의적 의지에 의해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성서학당을 졸업하는 것은 대단한 의지이고 인간승리입니다. 오늘 18명이 졸업을 하고 4분이 수료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멀리 인천에서 참여하시는 분 4분인데 매주 밤에 성서학당 끝난 후에 집에 가면 다음날 새벽에야 도착하게 된다고 합니다. 인천에서 오시는 한 분은 개근까지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감축드립니다."
    우리교회의 성서학당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인의 구성원 1/3이 성서학당을 통해서 교인이 되었고 전교우의 2/3정도가 성서학당을 이수하였습니다. 지난 7년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2-3개의 반 개설해서, 연인원 3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성서학당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이 뼈대는 이미 10년전 『함께 읽는 구약성서』와 『함께읽는 신약성서』(한국신학연구소, 91년 92년 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 속에 사회적 격변의 상황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엉뚱한 데를 긁고 있는 성서학에 우리 상황이 요청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새로운 눈을 가져오도록 해야겠다는 의도에서 젊은 동지 몇이 머리를 맞대고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회, 역사, 민족, 세계관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강남향린교회를 개척하고 7년간 실제로 성서학당을 해가며 많은 자료를 보충하고 성서의 전영역으로 확대하였습니다. 90년대의 변화된 상황도 적용되었습니다. 이 기간의 주제는 사회적인 데서 인간자체에 대한 관심 특히 신앙인으로서 이 사회적 제문제와 신앙의 내적 문제를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서학당에서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서를 일독하며 성서를 민중적 관점에서 재조명합니다. 이미 신학적 제 고백들, 성서를 보는 관점자체가 서구의 중세라는 암흑기, 서구의 식민지 확장 전쟁등으로 이어지며 지배자의 관점으로 왜곡, 탈색, 변조되었습니다. 이를 야훼신앙과 예수신앙의 본래의 삶의 자리인 평범한 민중의 역사로 복원하여 보는 것이 성서학당이 하는 과제입니다.
    성서와 우리의 신앙고백들의 내용을 단순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고백들이 형성된 사회적 자리, 역사적 배경을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 옷을 덧입어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게 뒤틀어진 신앙고백들의 정확한 의미를 조명하고 그 고백들의 핵심을 꿰뚫는 공부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는 이세상이 거짓 이데올로기를 선포할 때 "아니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합니다. 우린 성서학당을 통해서 어떤 것에 예스하고, 어떤 것에 노해야하는 지를,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불행히도 한국교회는 매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초기에는 한국교회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만, 요즈음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 얼굴에 침밷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기독교가 가진자의 편에 함께 그 위치를 누리게 되면 그 종교는 망하게 됩니다. 콘스탄틴 이후 1700년 동안 기독교는 지배자의 종교로 군림하였습니다. 미국의 교회가 세계 각국에 나가 착취하고 눈총받는 자국의 다국적 기업을 "야훼의 고난받는 종으로"미화한 것은 이러한 대표적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힘있는 자를 축복하는 하나님이 되고 그들이 가진 권력과 물질적 풍요는 축복의 증거로 미화됩니다. 이런 때 하나님은 억압의 면전에서 체념을 요구하고 현실의 질서를 흐트리지 않고 현상유지를 원하는 하나님이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변혁을 위한 운동에 변화나 개혁에 참여하라는 도전을 하지 않는 편리한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는 것은 오직 내면적이고 타계적인 해방입니다. 그는 하늘과 성전에 사시며 이세상 속에는 더 이상 살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한 교회의 우상일 뿐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도 하늘에 뜬 우상적 존재일 뿐입니다. 발이 땅에 안닿아 이리저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퍼맨이나 홍길동 같은 초월한 존재입니다. 그는 출생부터 우리와는 다르게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요란한 하늘의 징조가운데 오시고, 우리가 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일들을 말씀으로 척척 해치우시고, 하늘과 땅을 잠잠케 하시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존재입니다.
    인간을 위해 성육신하셨고 우리의 삶의 고통과 죽음을 하나님 안에 경험하신 예수를 우리는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내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도깨비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예수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늘을 향해 하나님 찬양, 예수 찬미를 외치며 두 팔을 벌리고 박수를 치는 일이 고작 우리가 예수를 따랄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과 육, 정신과 물질, 이세상과 내세, 정치와 종교, 속과 성, 사회와 개인 이렇게 모든 것을 양극화하고 대립시킵니다. 이러한 엄격한 이원론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되셔서 하늘과 땅의 경계를 몸소 허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면 배치됩니다. 이것은 다시 그를 하늘로 떠밀어 올리는 불경입니다. 그러면 왜 세상은 적대적 이원론을 선포합니까?
    진리가 자신의 물질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방지하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 밖으로 쫒아 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현상유지에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이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배후에는 사실은 현상유지를 뒷받침하는 일종의 종교를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도전적인 예수의 가르침은 영적 교훈으로 타계적, 개인적, 심리적인 관심사로 돌려버림으로 해소시킵니다.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신앙이란 것은 어떤 것입니까? 주술과 마술이 판을 치는 한낮 "미신화"된 기독교의 모습, 병들었던, 다쳤던, 경제적으로 어려웁던... 어떤 일을 당했던지 간에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를 외치고 선포할 뿐입니다. 그 이름 아래 많은 권세, 권능을 감추어 놓으셨으니 그 이름만 부르면 만사형통입니다. "하늘아래 모든 권세를 그 이름에 굴복하게 하셨다"는 바울의 고백을 미신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누구든지 그 이름을 주문처럼 외면, "열려라 참깨"가 되어 안 열릴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예수 의 피 한방울이 내 머리에 덜어지면 이 신비한 영혼세척제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우리의 모든 과거를 묻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천상적 존재로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의 보혈이야 말로 신비의 영약이고 기적의 묘약입니다. 도대체 이런 유아기적 신앙을 우리가 장성한 이후에도 언제 까지 가져가야 됩니까?

    오늘 본문은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벌인 것에 관해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초청되었습니다. 주인은 사람을 보내어 "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이 핑계를 합니다.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오."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들은 모두 주인의 초대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주인은 화가 나서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장애가 있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분부대로 하였지만 그래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주인은 다시 초청합니다. "큰길과 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면모를 알 수 있는 아무런 묘사가 없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 자체의 성격을 말하는 것보다는 그 나라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떠냐는 모습은 전하질 않습니다. 그 나라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를 묘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그의 나라는 단지 그 초청에 응하는 사람, 그 초청을 믿고 전적으로 응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그 나라의 내용은 공개될 수는 없습니다. 까닭은 그것은 불변의 영역이 아니라 참여함으로써 현실이 되는 순수한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거부 이유는 "내가 밭을 샀는데, 내가 겨릿소 다섯쌍을 샀는데..."등등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것, 이들이 누리는 것 때문에 그 초대를 거부했습니다. 이 소유들은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들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을 거부하게 합니다. 저들은 소유한 것에서 "나"를 사는 사람들이고 , 소유한 것에 삶의 거점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소유는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윤리적일 수도 있고 종교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기득권 일절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가 기득권을 과거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면 저들은 과거에 의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먹을 것을 문 짐승은 모든 것을 피해 굴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가진 것으로 인하여 언제나 변혁 따위를 거부합니다.
    또 이들은 가치를 저울질합니다. 하나님을 흥정합니다. 도마복음서에는 이 비유와 병행귀가 있는데 이 비유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독특한 해석을 붙이고 있습니다. "장사꾼들과 상인들은 나의 아버지의 처소에 들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장사꾼, 상인은 실제 직업으로서 장사나 상인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을 절대 가치에 놓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일 까지도 상대화 시키거나, 지금 내가 해야 할 일과 대비하여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람- 도마복음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을 흥정하는 '장사꾼'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지의 소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예, '깡통에 금메끼하는 것'이랍니다(웃음). 이것은 사람은 저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것에도 타협하지 않고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나 자신이 가진 어떤 가치보다 우선권을 두고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고작해야 밥통에 금 메끼 하는 것을 소원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려면 하나님을 소중히 여겨라.
    그런데 밭을 사고 소를 산 사람이, 생의 중대사인 장가를 간 사람이 왜 정죄 받아야 합니까? 잔치에 안가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잔치라는 것이 전제되어있습니다. 그 귀중한 초청을 상대적으로 자신의 일들과 견주어 저울질하고 셈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몫을 셈하고 하나님께 상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속에 하나님은 이미 더 이상 그에게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반면 초대에 응한 사람들을 봅시다. 이 사람들은 우연하게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미리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난하지만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라거나 불구자지만 종교심이 강하다든가 하는 긍정적인 면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단지 그 초대에 응했다"는 사실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서오라"는 내 밖에서의 초청 소리를 듣고 그것에 응하여 나를 내 맡길 때에만이 가능합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준비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초청에 응하는 것은 모험이며 결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결단은 어떤 계산에 의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초청하는 그 뜻에 무조건 자기를 내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이 새 세계로의 초청에 응할 수 있고 그 때만이 탈출이 가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초대에 자기를 개방하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가능성에 자기를 개방한 사람들, 과거적인 것들에 집착하여 살지 아니하고 과거의 연장선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도래하는 하나님나라 앞에 선 존재들입니다. 그 나라의 초대는 소를 사고 밭을 사고 결혼하고 그 안에 즐거워하는 나에게 전해집니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앞에 새로운 존재로 설 것을 요청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름을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지금가진 것들이 나를 살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병무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실은 내가 무엇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무엇들에 소유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초대에 응할 자유를 잃고 있다."(안병무 『구걸하는 초월자』"새 세계에의 초대" 한국신학연구소, 1998, 397쪽)

    우리 성서학당에 중요한 의미가 또 하나 있습니다. 요즈음 전도가 거의 수평적 전도입니다. 교회간 이동이고 특히 대교회로 몰리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서학당 이번에도 전혀 처음으로 신앙에 접하는 분이 6명이고, 어렸을 때 나갔지만 오랫동안 교회를 중단하고 안나가던 분도 여러분 계십니다.
    뜻 밖에 초청을 받은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 초청에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십시오. 오셔서 저와 함께 동거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새로운 힘이 여러분 안에서 샘솟을 것입니다. 이 떳떳하고 광명한 삶에 새로운 인간으로 서는 길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자신의 사정을 살펴 핑계치 말고 그 분의 초청에 예하고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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