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6:01-04/ 약속 있는 첫 계명
  • 조회 수: 332, 2013.11.08 20:01:24
  •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서 2~3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십계명 가운데 다섯째 계명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십계명은 원래 두 돌판에 나뉘어 있었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룬 네 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돌판에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다룬 여섯 개의 계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계명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두가 변합니다. 인심이 변하고 생활양식이 변하고 풍속이 변합니다. 옷모양도 변하고 화장하는 법도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계절은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봄이 지나고 여름철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계절은 틀림이 없습니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지, 겨울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물은 섭씨 0도가 되면 얼음이 되고 섭씨 100도가 되면 끓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말하자면 도덕의 법칙이고, 그 중에서도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우리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제일 먼저 맺는 인간관계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이 관계를 옳게 가져야 다른 사람과도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모든 사회 도덕의 기초가 됩니다.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잘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유교 사상에 젖어 있는 분들은 기독교 문화와 유교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이상 윤리적인 종교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의 정상화를 언제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실 윤리를 떠난 기독교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동양의 도덕을 간추려 말하면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삼강의 첫째가 부위자강(父爲子綱)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바른 관계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륜의 첫째도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친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다른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유교 사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그러니까 부자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도덕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계명은 모든 사회질서의 기초가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는 꼭 자기 부모뿐만 아니라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리문답에서도 제 5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5계명에 명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속한 지위와 인륜 관계 즉 상하와 평등을 따라 높힐 자를 높이고 행할 일을 행하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두려워하여야 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을 때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요사이 비극적인 사실 가운데 하나는 윗사람을 존경하는 것을 점점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경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할 때 가정의 질서가 섭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그 말씀을 따를 때 그 학교의 질서가 잡힙니다. 
    어느 기관이나 단체에서 책임자를 존경하고 그 지시를 따를 때 그 기관이나 단체의 질서가 섭니다. 모든 국민이 나라의 법을 존중히 여기고 그 법을 준수할 때 국가의 안녕 질서가 확립됩니다.
    가만히 보면 가정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자녀라야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직장에서는 상사와 사회에서는 웃어른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고 좋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신앙의 첫 열매가 됩니다. 부모와의 바른 관계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사람의 생활의 첫 열매라는 말입니다. 참 신앙은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이 면에서도 나아야지, 못하게 되면 안되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얼마 전에 어느 어머님에게서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어머님은 6.25 한국 동란 때 남편이 북한에 납치되고, 스물 세 살에 아들 형제 데리고 혼자 되어서 갖은 고생 다하며 청춘을 보내신 분이신데 지금은 맏아드님 댁에 같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어머니가 미장원에 갔습니다. 젊은 여자들이 친구끼리 같이 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는 것을 자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물더랍니다.
    “너희 시어머니 지금 몇 살이시니?”
    “우리 시어머니, 금년이 쉰 여덟이셔.”
    “그래? 아직 시퍼렇게 젊었더라, 얘.” 

    그런데 미장원에 가서 머리손질하려던 이 어머니가 그와 비슷한 연령이신데 그 젊은이들의 대화를 듣는 순간 앞이 캄캄해지고 귀가 멍해지면서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더 이상 앉아 있기가 무서워서 그 미장원을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어머니의 경우 며느리가 잘해 주는데도 ‘우리 며느리도 마음이야 다른 집 며느리나 똑같을 터인데’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다음부터는 며느리의 친구가 찾아오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저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계시는 우리 젊은 자매님을 만나면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야 다 같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이제 앞으로 노인 복지 시설이 많이 발전하게 되면 우리 생활 문화도 많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나이 많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지낼 수밖에 없는데 자녀들은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고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 돈 쓰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부모를 위해서 쓰는 것은 아까워하기가 쉽습니다. 물론 고의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 저 일 바쁘다보면 부모를 등한히 하기가 쉽습니다. 젊은이는 사업하느라고, 교제하느라고 그러자니 용돈도 많이 쓰게 되겠지만 나이도 많으신 부모님이 무슨 용돈이 필요하겠나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용돈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손자 손녀들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돈을 줘야 좋아합니다. 안 그래 보세요. 어린애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쓴 오이 보듯 합니다. 저도 손자들이 있는데 한 주일에 한 번 만나면 애들한테 돈을 줍니다. 그러면 그렇게 좋아합니다. 할아버지가 좋아서 그러는지 아니면 돈이 좋아서 그러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리고 우리 집 아들딸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용돈을 줍니다. 물론 아직은 제가 현역이니까 그 돈 없이도 살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용돈 받을 때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어요. 

    연세가 높으신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아무리 내 아들, 내 딸이라고 해도 다 큰 사람들에게 용돈 달라고 하기가 참 힘들다고 해요. “얘야, 나 용돈 좀 다오”라고 말씀하실 때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하시는 말씀으로 아셔야 합니다. 우리 경험대로 말하면 남편에게 달라고 하는 것은 쉬운데 자녀에게 달라고 하려면 눈치보게 된다고 해요. 자녀 된 여러분, 부모님의 그 사정을 아십니까? 제가 부모님을 대변해 드립니다. 미리 알아서 용돈 넉넉히 드리세요. 효도의 길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고 그 부모가 기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이런 면에서 앞서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전도가 됩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옳은 일일 뿐더러 하나님께서 십계명 가운데 하나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5계명에서 사람들 사이에 갖는 관계에 대한 계명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5계명이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의 나열 순서대로 말하면 첫계명이 아니지만 그 중요성에 있어서 첫째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순서대로 말하면 세 번째이지만 중요성에 있어서 사랑이 첫 번째라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계명을 주시면서 약속을 덧붙였습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했습니다. 이 말은 성실하게 이 말씀을 지키는 아들과 딸이 반드시 이 땅에서 오래 산다는 의미입니까? 그런 말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복된 생활을 하기 원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나이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선한 손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자연의 질서가 이 진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뿐 아니라 율법도 그것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자연의 원리나 질서를 거슬러서 살라고 하지 아니합니다. 율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율법에 은혜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 계명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은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 감격한 마음으로 율법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행하는 동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율법이 그 계명을 지시합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지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순종하는 것에 대한 보다 더 큰 의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하는 것을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에 가서 순종하여 받드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비록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의식을 자기 안에 가지고 계셨지만, 자신을 낮추셨고 육신의 부모를 순종하며 받드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모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늙어갑니다. 늙으면 심신의 기력이 쇠약해집니다. 사는 것이 고독합니다. 죽음과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진 것입니다. 팔다리에는 힘이 없어지고, 삶의 의욕이 고갈됩니다. 모든 일에 관심과 감격이 적어집니다. 삶에 권태가 찾아옵니다. 몸에는 병이 생깁니다. 생활에는 능력이 없어집니다. 가족한테 소외당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곱게 늙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고독감을 이기고, 소외감을 견디며, 인생과 세상에 대하여 따뜻한 관심과 흥미를 잃지 않고 가족과 친지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서 아름답게 늙을 수 있을까요? 늙으면 늙은 대로, 자연스럽게 의연하게 노년을 맞이하는 길이 어디 있을까요?
    동양은 옛날부터 경로 사상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산업화되어 가면서 우리의 이 아름다운 전통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늙은이를 존경하려 하지 않습니다. 노부모님을 모시고 살려는 자녀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노인 문제가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등장했습니다. 노인을 존경하는 사상이 노인을 멸시하려는 생각으로 변해 가는 것이 역사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오늘은 젊지만 언제나 젊은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노(老)가 찾아옵니다. 미국에 가면 공원 벤치에 쓸쓸하게 앉아 있는 노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식당에 가면 기운 없는 노인이 테이블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혼자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노인 아파트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베란다에 나와서 하루종일 멀거니 혼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의 표정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생명의 즐거움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고독과 허무감만이 남아 있습니다. 
    명절 때가 되어도 찾아오는 이도 없고 또 찾아갈 곳도 없습니다. 멀리 있는 자녀가 보내온 축하 카드를 혼자서 뜯어보고 가족을 생각할 뿐입니다. 이런 고독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하는 노인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의 양식을 먹지 못할 때 정신은 병들고 성격은 멍이 듭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정이 오가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한국은 아직 늙은이의 왕국입니다. 노인은 집안의 어른으로 권위를 갖고, 귀여운 손자 손녀를 돌보면서 생의 행복과 기쁨을 누립니다. 한국의 노인은 미국의 노인처럼 외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도 서서히 미국과 같은 노인의 비극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부부 중심의 핵가족으로 변하면서 노인의 권위는 무너지고 설 땅이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외로운 노인이 자꾸 생겨납니다. 아들딸들이 노부모를 돌보려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늙어서 자식 신세를 지지 않고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도 이제는 노인의 천국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을 미국과 같은 노인의 지옥의 나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노인이 설 땅이 있어야 하고, 사는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노후의 인생에게 행복과 안식의 보금자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노인을 공경하는 사상은 성경의 교훈이요, 약속 있는 첫 계명이요, 동양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소중한 유산입니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에게는 경험에서 오는 지혜가 있습니다. 
    어린애는 할머니가 돌봐야 잘 돌볼 수가 있습니다. 손자들의 가장 가까운 벗은 할아버지 할머니입니다. 저마다 제 분수를 지키면서 노소동락하며 정답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요, 얼마나 슬기로운 지혜입니까? 노인의 경험과 청년의 박력, 노인의 지혜와 청년의 정열이 합할 때 시행착오가 없는 원만한 진리의 실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젊음의 스테미너도 좋습니다. 과감한 추진력도 좋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원숙한 예지를 또한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늙은 세대와 젊은 세대가 교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늙은이와 젊은이의 세대 융화, 세대 협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젊은이를 아끼는 동시에 늙은이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노후가 패배감과 고독감, 허무함과 좌절감으로 점철되어서는 안됩니다. 욱일승천의 장관도 아름답지만 낙조의 미 또한 아름답습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합니다. 희망의 젊음으로 시작한 인생이 패배의 늙음으로 끝난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을 어린이의 왕국으로 만들고, 동시에 노인의 안식처로 만들어야 합니다. 

    끝으로 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한다고 하면 우선은 싫어합니다. 자녀를 칭찬하고 자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진 부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를 키울 때 이렇게 해 주었는데 너는 나에게 이렇게 밖에 하지 않아”하는 생각을 가지면 부모님의 마음도 괴롭고 자녀의 마음도 섭섭합니다.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세요. 자녀는 고마워하시는 부모님께 더 해드리고 싶어할 것입니다. 

    늙으면 노욕(老慾)이 생기기 쉽습니다. 권세욕, 재물욕, 명예욕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말년에 추잡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즉다욕’(壽則多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 살다 보면 욕된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욕된 노후를 갖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생명이 늙는 것은 자연의 대질서입니다. 겉사람은 날로 후패합니다. 우리는 이 질서에 순응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져 자연의 질서에 거역해서는 안됩니다. 노욕의 노예가 된 노인처럼 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눈길과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인자한 노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와 자비의 덕을 갖춘 노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계속 힘써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약속 있는 첫 계명, 바로 지켜 노인을 공경하고 젊은이를 아껴서 생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43 admin 234 2013.11.08
admin 332 2013.11.08
141 admin 317 2013.11.05
140 admin 341 2013.11.04
139 admin 213 2013.10.31
138 admin 268 2013.10.29
137 admin 428 2013.09.12
136 admin 243 2013.09.09
135 admin 312 2013.08.28
134 admin 324 2013.08.28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