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도가 입어야할 옷(골 3:12∼17)
  • 조회 수: 263, 2013.07.25 12:40:25
  • 인간이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은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자신들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최초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고 창3: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창3:21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왜 옷을 입었으며 그 옷은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결국 옷은 수치를 가리는 수단입니다. 그리고 추위를 막는데 필요한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제 아무리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리고 아무리 비싸고 좋은
    옷을 입었어도 별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늘 입고 다니는 의복의 경우 분수의 맞는 것으로 절제해야 합니다. 요즈음 팬티까지도 외제, 스타킹도 외제, 옷 한 벌에 수백만원 하는 밍크,
    보세요.  그런 것 입었다고 얼굴색깔이 달라집니까?  머리칼 색깔이 달라집니까? 국적도 없는 옷의 패션도 문제지만 젊은이들이 생각 없이 모방하는 일본식 패션은 더욱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경제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작금의 우리 경제는 사면초가라는 것입니다. 통상 압력, 수출부진, 심각했던 노사분규, 사치, 낭비, 향락산업의 발달로 인해서 곤두박질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민족의 역사와 국가의 흥망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학자들은 앞으로는 다가올 미래는 무기로 싸움하는 별들의 전쟁이 아니라 무역전쟁 또는 경제전쟁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검 절약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몫이요, 앞장서야할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벗어야할 것과 입어야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엡4:22절 "너희는 기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라고 했고, 4:24절에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였으며 오늘 본문 12절 끝에 보면 "옷 입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벗어야할 것은 벗어버리고 입어야할 것은 다시 입는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우리가 예수 믿고 믿음 안에서 교회 생활 즉 신앙 생활하는 것은 신령한 영적인 영역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돈벌고, 먹고 즐기기 위해서 교회에 모이는 것도 신앙생활 하
    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이 입어야할 옷은 신앙생활에 필요한 신령한 옷, 즉 영적인 옷이지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옷이 아닌 것입니다.때문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를 옷 입으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밝힌 신령한 옷들인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라는 옷의 성격은 하나님을 향한 조건들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필요한 조건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 역시 벧전3:1-6절 말씀에 예수 믿는 부녀자들이 어떻게 자신
    을 단장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3-4절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치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외적인 단장이 혹 인간을 기쁘게 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숨은 사람" 즉 마음의 단장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유익을 주는 것이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옷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입는 사람이 편해야 합니다. 제 아무리 비싼 옷이라 해도 몸에 꽉 낀다든지 단추가 안 잠기고, 움직이며 찢어지고, 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남이 볼 때 아름답고 유아하고 편해야합니다. 가끔 T.V, 영화에서 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젊은이들 모습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를 모습이나, 머리를 인디언의 추장처럼 아랫머리는 다 짤라 버리고 윗 부분만 마치 깃털처럼 만들고 다니는 모습도 봅니다.
    물론 자기는 멋을 부리느라 그랬는지 몰라도 제가 보기에는 정신병자처럼 보입니다.스타일도 그렇고 옷도 남이 보아서 혐오감이 든다든지 건덕을 해친다면 안됩니다. 나 자신은 아무리 좋은 행동이라고 고집해도 그리고 아무리 좋은 처사라고 해도 그것이 이웃과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것은 벗어야할 옷임에 틀림없습니다.그리고 바울의 말씀대로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자기를 낮추고, 온유하고, 오래 참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몰인정의 옷, 교만의 옷, 신경질의 옷, 조급성의 옷은 벗어버리고 신령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우리들이 입어야할 신령한 옷의 덕목들인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는 바로 주님이 지니셨던 품성들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그 옷을 입는 비결은 주님의 마음을 본 받음으로써 신령한 옷을 입을 수 있게 됩니다.

    둘째, 13절을 보시면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러분!  여기서 말씀하시는 "혐의"라는 말의 뜻은 "비난하다"라는 말에서 유래
    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혐의가 있다" 즉 "비난할 만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우리 모두는 누구나 비난받고 책망 받고 욕먹을 만한 일들이 있습니다. "누가 뉘게"라고 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너나 나나"라는 뜻이요, 결국은 너도 나도 혐의는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누가라도 비난받고 책망 받을 잘못은 있다.
    2) 서로 용납하라.    3) 피차 용서해야 한다.
    4) 주께서 너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용서란 피차 해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아무리 용서해 주
    고 싶어도 용서가 안되는 것이고 반대로 아무리 잘못했다고 빌어도 용서할 사람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한다고 한다면 용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께서 너를 용서 하신 것처럼 너도 그리하라"
    는 용서의 명령입니다.
    자!  여러분! 이 시간 종이를 펴놓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양심적으로, 신앙적으로, 잘못한 일들을 기록해 보세요.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아무리 적게 잡아도 70년 살면 7만번의 현행 죄를 짓는 데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용서받고 큰소리 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석금 내고 용서받았습니까?  감옥생활을 했어요.  매를 맞기를 했어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 때문에 내가 용서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네가 그처럼 용서받았으니 너로 남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내가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혐의를 가진 채 비난하고 힐난하는 생활을 계속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1. 첫째, 내 성격이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변질됩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무조건 헐뜯고 비난하고 공격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됩니다.
    2. 둘째, 나 자신 역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비난과 비판을 받는 다는 사실입
    니다. 주님께서 마7:1-2절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고 계속해서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3. 셋째, 예배가 바르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5:23-24절에 보면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예배가 어떤 것이며, 어떤 장애물이 제거되어야 예배를 받으시는가를 밝히신 주님의 교훈입니다.
    성도여러분,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예배는 용서하고 드려야합니다.  기도 역시 용서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4. 넷째, 친구가 떠납니다. 매사에 헐뜯기 좋아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흉보기
    좋아하는 사람 곁에 누가 서 있으려고 하겠습니까? 결국 그 사람은 그렇게 되면 외로운 기러기처럼 됩니다.

    세 번째, 14절 말씀을 보면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그 자체로서 귀한 행동이며 결단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버리면 안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계속 되풀이해서 지난 잘못을 되씹고 들춘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 아무리 거룩한 옷을 입고, 신령한 옷을 입었다고 해도,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했습니다. 양복바지는 띠를 매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허리에 힘도 없고요. 더구나 한복 바지는 반드시 띠를 매야지 그렇지 않으면 흘러내립니다.
    우리의 신령한 옷도 매한가지입니다. 반드시 사랑으로 띠를 매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온전한 옷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죄 자체는 단죄하고 심판합니다만 그러나 죄인은 용서하고 감싸는 따뜻한 의복인 것입니다. 사랑이란 잘못을 때리면서 매맞는 사랑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이며,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지금 삭막한 황야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떨고 서 있
    는 존재들입니다. 이제 성도들은 신령한 옷을 더욱 확실하게 입고 믿음으로 굳게 서서 이 세상을 사랑의 옷으로 감싸주는 일을 해야합니다. 서로 용서하며 사랑의 띠로 엮어 나갑시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을 오늘 당장 내 주변의 사람에게 실천하시면서 더욱 풍성한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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