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 LA에서 흑인 폭동사건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때에 한인타운과 한인상가들이 제일 큰 피해를 입었지요. 그만큼 미국사회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되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거부감이 완전히 해소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작년 7월 4일 인디아나 주 블루밍턴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성도들 가운데 26살 윤원준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일련의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학생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다 백인 우월주의자 벤자민 스미스가 무차별 난사한 총에 이 학생이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일주일후 오후 7시 뉴스시간에 미국 전역에 추모예배 광경이 방영되었습니다. 미법무장관과 한국에서 온 윤원준 학생의 부모와 그의 친척들 그리고 한인교인들 1,500여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장엄한 분위기였습니다. 추모예배 마지막에 윤원준 학생의 이종사촌 형인 박승호 목사라는 분이 가족을 대표하여 인사를 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박승호 목사의 인사에 온몸이 감전되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그렇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 가족을 대표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사촌을 죽인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가족의 꿈을 빼앗아 가고 아우의 피를 흘리게 한 이 미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 오셨기 때문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후 한인상가를 떠났던 미국인들의 발걸음들이 잦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용서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병든 몸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고 흐트러졌던 인격을 가다듬어 주는 위대한 힘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영혼을 풍성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를 약탕에 넣어서 풀풀 끓여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엑기스 한방울 똑하고 떨어지며 "용서"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용서"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용서요 복음의 내용이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용서요 하나님에 사랑의 색깔을 표현해 본다면 용서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게 없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용서를 제하고 나면 나무토막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마쳐지는 종교입니다.
누구나 다 교회에 처음 찾아나오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땅에 생이 마감되고 천국문이 열려질 때에 용서의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용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드라마를 이 땅에 펼쳐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는 기독교 역사는 용서의 역사였습니다.
제1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몸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제2막 3년동안 그분은 용서의 복음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3막 일주일동안 우리가 당해야 될 온갖 수치와 냉대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될 온갖 수치와 부끄러움을 온몸에 감당하셨습니다.
제4막 그분은 용서를 완성하시기 위해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용서의 역사를 펼쳐가십니다.
여기 강단은 하나님에 용서의 선포장이요 목사는 용서의 대언자요 교회는 용서를 파는 곳입니다. 용서의 능력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주님 전에 찾아나올 때마다 용서를 사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의 알림장이요 십자가는 용서의 영수증이요 성령은 용서의 전파자요 선교는 용서의 전달식입니다.
1. 왜 그렇게 용서가 중요합니까?
역설적으로 말하면 용서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용서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용서를 체험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내 몸으로 기적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용서의 선언이요 대헌장이요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절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모질고 쓰린 아픔을 온 인류가 감당해야 될 고통을 한 몸에 지금 걸머지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자신의 고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못질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그분은 이 땅에 용서를 선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는 바로 용서의 절정이요 용서를 완성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아가다가 이웃들에게 오해당하고 거절당하고 비판과 냉대를 받으며 고발당하고 억울함이 있을 때에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내게 결정적인 상처를 남기고 떠났던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우리는 용서가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이 땅에 용서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으며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입니까? 용서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평안도 천국도 없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지금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의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지않든 이미 사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기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인 것입니다.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고통이 심하면 심할 수록 모질면 모질 수록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여" 왜요? 그 아버지가 그분을 이땅에 보내주실 때에 용서의 사명을 가지고 이땅에 보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용서하는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이웃이 있습니까? 그를 위해 기도해 보셨습니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십자가 상에 매달려서 주님이 고난을 당하실 때에 많은 영상들이 그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스승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얼굴이 스쳐지나갑니다. 예수님은 호통과 함께 절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가룟 유다를 용서하시옵소서." 어린 계집아이 앞에서 수제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공인받던 베드로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저주하며 예수를 부인하던 그 못난 얼굴이 예수님 얼굴에 영상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저 못난 베드로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왕이라도 되실 줄 알고 호산나 호산나 노래부르며 종려나무가지 흔들던 군중들, 제사장의 꾀임에 넘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부르짖던 그 못난 얼굴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주 아버지여 저 어리석은 군중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는 용서를 가능케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를 위해서 우리가 충분히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삶을 원하십니까? 기도의 승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리스도의 심장을 나누어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2. 어떻게 용서가 가능해 질까요?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용서가 가능해 집니다. 나혼자 상처를 받은 것 아닙니다. 나도 상처를 주었습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가슴으로 보십시오.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이해할 때에 용서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예수님의 손발에 못을 박고 있던 어리석은 병정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다. 도대체 당신이 모질게 고통하는 이분이 누군지 아시오. 나사렛 예수 목수가 아니요. 아니요. 그분은 당신의 구세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요.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당신은 알고 있소. 나는 국가에 충성을 하고 있다오. 늘 하듯이 오늘도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오. 아니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과 나의 죄를 걸머지시고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그분이 지금 죽으시고 있는 것이오. 당신이 당해야 될 수치와 설움을 그분이 담당하고 있다오. 이분은 하나님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말이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알았더면 저들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사도 베드로는 얘기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알지 못하여 그리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지를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도 무지했고 너도 무지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도 주인을 알거늘 만왕의 왕되시고 인류의 주인되시며 역사의 주인되시는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무효화시켜려 했던 우리의 사악함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아셨습니까? 그 무지를 회개하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롭게 무지를 회개할 때에 용서의 능력을 새롭게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오순절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베드로는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여 우리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도다. 저들이 알지 못하여라고 하는 말과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우리는 알지 못하여 너희는 알지 못하여라는 말과 동일한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무지를 회개하라고 요청했을 때에 수많은 군중들이 울며 베드로 앞으로 몰려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에 삼천명이 통곡하고 달려나왔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한사람이 단으로 뛰어나와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길래 끔찍한 죄인인 줄 알고 침을 뱉었습니다. 나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당신의 무지를 회개하십시오. 예수님의 수염을 당기고 조롱했던 군인이 바로 나였습니다. 나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너희가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을 지어다. 예수님의 오른손 왼손에 못질하던 군인이 바로 나였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짓누르던 못난 사람이 나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너희가 알지 못하여 그리하였도다.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내가 찔렀습니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의 고통이 나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고백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이시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통하여 그분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용서는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용서는 권면이 아닙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나의 성품을 나누어 주었노라. 나는 너희에게 용서의 씨앗을 용서의 권능을 너희에게 나누어 주었노라. 너희는 용서하라 명령하십니다.
이 아픔, 이 실망, 이 좌절을 남기고 떠났던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나를 무시하고 냉대했던 결정적인 상처를 남겼던 내게 결정적인 아픔을 남기고 실패를 남기고 떠났던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따라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마음이 있을 때만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기분과 느낌이 있을 때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 의지를 따라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 노력으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따라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 하나님 저사람에게 진노를 내리시옵소서. 지금까지 모진세월 살아오면 내게 아픔을 남겼던 저사람에게 벼락을 내리시옵소서.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못난 사람들이지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용서의 기도는 원문에 살펴보면 한번 한글로 되어있지 않고 계속적으로 한글로 되어있습니다. 그만큼 주님도 용서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지요.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있었습니다. 누군가 왼손에 못을 박을 때에 그 고통이 쓰리고 아파서 "아버지여 이 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가시관을 씌워놓고 조롱하고 침 뱉을 때에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발을 묶어놓고 못질할 때에 땅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저며오는 아픔을 느끼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날카로운 창이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올 때에 "아버지여 이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니이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성경은 계속 용서를 선언했다고 현재진행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용서해라! 그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용서할 마음이 생기거든 용서해라가 아닙니다. 느낌을 따라 용서해라가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용서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예" 순종하겠습니다. 순종은 의지적인 것입니다. 용서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 기분이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인 동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사람 다 용서할 수 있어도 이 사람은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가장 먼저 용서하고 사랑해라 말씀하십니다.
수년전 세상을 떠난 전세계가 존경하던 인물 화란의 유명한 성자 코리텐 붐여사가 있습니다. 이 할머니는 유대인들을 숨겨두었다가 화근이 되어 독일이 침략했을 때에 독일 병정들에게 잡혀서 라벤슨 부르크 수용소에서 처절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여자로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고통을 이길 수 없었던 언니 베티는 감옥에서 죽어갔습니다. 코리는 극적으로 생명을 보존하고 살았지요. 독일이란 말만 들어도 오장육보가 뒤틀리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독일의 국기와 지도만 보더라도 온 몸이 아파오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잔인한 명령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독일인을 사랑해라. 독일을 찾아가 용서의 복음을 선포해라. 독일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얘기해라. 독일인들에게 치유의 복음을 전파해라. 용서의 복음을 전파해라. 그가 찾아가 집회를 시작할 때에 인산인해를 이루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았던 사람들이 코리 여사의 손등에 키스하기 위하여 줄을 서서 한걸음씩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큼 한 낮익은 얼굴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옵니다. 바로 라벤슨 부르크 수용소의 그 간수, 히틀러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내 몸에 모질게 고문을 가하던 그 간수, 발가벗겨 내게 부끄러움을 주던 바로 그 간수, 언니가 고통 가운데 죽어가던 그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책에 코리 할머니는 그렇게 기록을 합니다. "그 순간 내 피는 거꾸로 용솟음쳐 오르고 있었다." 내게서 한마디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님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하나님은 내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용서해라. 아니 하나님 할 수 없어요. 용서해라. 할 수 없어요 하나님. 용서할 마음이 아닌걸요. 아니다. 코리야 용서해라. 그 사람은 계속 한걸음 한걸음 아무 일도 모르고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너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는가 아닌가 묻는 것 아니다 용서해라 이것은 나의 명령이다. 용서해라. 그 순간 코리 할머니는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고 용서할 수 있는 기분이 전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단했습니다. 바로 그 앞에 섰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결단하고 손을 내밀어 그 간수를 끌어 안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내게 주었다. 그를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 당신의 느낌과 마음의 상태를 주께서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세주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고 고백하십니까? 그분이 명령합니다. 용서해라. 새가 노래하듯이, 말이 달리기를 기뻐하듯이, 물고기가 헤엄을 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이면.
율법에 의하면 랍비 하나니는 "자기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되 세 번이상 용서를 구해서는 안된다." 랍비 예우다는 "사람이 한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가 된다. 두번 범하면 용서할 수 있다. 세번까지는 어쩔 수 없이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네번째 범하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똑같은 잘못을 두번 세번 범하면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똑같은 잘못을 범하게 되면 한결같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인간은 용서할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라고. 그렇게 해서 버린 친구들이 얼마였으며 그렇게 해서 내팽개친 교우가 얼마였습니까?
베드로는 유대인보다 아주 넉넉한 마음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였을 때에 칠곱번까지 용서할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 이 말씀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얘기가 아니올시다. 인간의 마음을 초월하고 율법을 초월하는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천국의 세계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런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내가 똑같은 죄를 490번 범하고 주님 앞에 찾아갔을 때에 가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못난 얼굴을 하고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주님이 나를 용서해 주실까?
여러분 사람의 범죄라는게 오늘은 사람을 죽이고 내일은 간음을 하고 모래는 강도를 하고 하는게 아닙니다. 사람은 연약한 곳이 대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똑같은 죄를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이래서 안돼지, 이래서 안돼지 하면서도 똑같은 죄를 짓고 또 짓고 주님 앞에 찾아올 때마다 똑같은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게 나의 모습이요 너의 모습이요 우리 인간된 모습 아니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할 때에 본문은 제게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얘들아 나는 490번까지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490번까지 일흔 번씩 일곱 번씩이라도 너희는 용서해야 된다 그 말이겠습니까? 나는 천번 만번 범죄하고 내 앞에 돌아온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용서를 구할 때마다 나는 너를 용서할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죄악이지만 가장 소중히 여기고 사랑스러운 얼굴은 용서를 구하는 너의 얼굴이노라. 나는 가증스럽다 더럽다 말하지 아니하고 나는 너를 용서하기를 원하노라." 주님 의 용서가 가득히 담겨져 있는 소중한 복음 아니었습니까?
4. 그렇습니다. 용서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이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깨끗하게 용서받고 누군가를 깨끗하게 용서하고 주님 앞에 서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 죽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게 건강이 필요해요. 하나님은 이 시간 말씀합니다. 아니다. 네게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는 네게 치료하는 능력이 되어 줄 것이다. 하나님 내게 친구가 필요해요. 아니다. 진정 네게 필요한 것은 현재있는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 친구로부터 용서받는 것이다.
발이 없다면 신발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눈먼 소경에게 안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가 교육을 받으면 더 큰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용서받지 못하고 돈을 벌면 악한 영향을 남길 뿐입니다.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고 친구를 얻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용서할 때에 군말을 붙이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을 도무지 용서할 마음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니 용서합니다. 군말붙이면 용서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유와 변명을 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족을 붙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했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용서할 때에 조건을 붙이지 마십시오.
용서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일주일동안 기도하고 다음 부활주일부터 용서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설교끝난 다음 집에 가서 분위기 잡고 촛불켜 놓고 앉아서 손 마주 잡고 용서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용서하라. 지금 당장 용서해라. Now and here.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 마음속에 생각나는 얼굴들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광부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동네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학교가는 길에 한 아이가 가슴을 푹 쥐어박습니다. 교실에 앉으면 한 아이가 등을 확 쥐어박습니다. 또 돌아오는 길이나 만날 때마다 가슴을 푹푹 쥐어 박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죽고 나 죽자. 그래서 온몸에 다이나마이트를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옷을 벗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누구든지 나를 치면 이 다이나마이트 터진다. 그리고 너 죽고 나 죽자. 아무도 겁이 나서 그 아이 곁에 가질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아이 주변에는 아무도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친구 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작 불안하고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은 이 아이였습니다. 미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이나마이트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원망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은혜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불가능해 집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담이 막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집니다. 믿음이 떠나갑니다. 손해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영혼도 쇠약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유없이 가끔 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대게 그 마음속에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답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손과 발이 마비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병이 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암세포가 꾸준히 생성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마음속에 분노의 문제, 갈등의 문제, 이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경통, 위궤양, 밥만 먹으면 이유없이 설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대게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사람들이 허다하다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든가요? 이 시간 용서하라고 말씀할 때에 여러분 떠오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원수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까? 아니예요. 김정일한테 상처받으신 분 계십니까? 아니예요. 저는 제 마음속에 용서의 설교를 준비하며 하나님 아버지 이 설교가 내 입술의 설교가 되지 말게하시고 내 삶의 설교가 되게 하시고 내 인격의 설교가 되게 하시고 내 신앙고백이 되게하여 주십시오. 두가지를 묵상했습니다. ① 나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인가? 아멘 한 후에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② 내 마음속에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누구인가? 정말 내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이 설교를 하는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용서를 해야될 사람들이 참으로 의외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나를 그토록 사랑했던 선생님의 어린시절, 청소년시절 그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 어린시절에 내게 주었던 상처가 아직까지도 용서되지 않고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아무개 선생님을 용서합니다." 생명처럼 사랑했던 교우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내 가족보다 더 내가 그를 더욱더 사랑했던 사람들, 내 자식을 위하여 기도하지 못할 때 나는 그 자식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고, 내 아내를 위하여 기도 하지 못할때에 그의 아내를 부둥켜안고 기도했고 가족처럼 소중히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여 아무개 집사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집 두채 지어서 일층에 너 살고 위층에 나살자. 그러고 사랑했던 친구가 내 가슴속에 상처를 남기고 떠났을 때에 깨끗하게 용서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해야 될 사람이 먼 곳에 있는 것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미움은 너 죽고 나 죽자의 철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너도 살고 나도 살자의 상생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손양원목사를 한국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자로 인정합니다. 왜요? 그의 용서가 위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용서가 초라한 신앙인은 초라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위대한 신앙인은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일전에 호주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한 집사님이 식사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옛날 한국대학에서 독문학과 교수를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친구와 원수를 맺고 깊은 상처를 서로 주고 받았습니다. 서로 한 땅에서 얼굴을 맞대 고 살아가게 되면 그가 나를 죽이든지 내가 그를 죽이든지 했을 것이라고. 그래서 도망가는게 좋겠다 해서 보따리 싸서 호주로 도망을 왔답니다. 건강했던 몸은 간곳이 없고 꼬챙이처럼 말라있었습니다. 성격 파탄자가 되어있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목회자를 괴롭히는 초라한 신앙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용서를 경험하지 아니하면 몸도 마음도 함께 죽어가게끔 되어있습니다.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주님 앞에서 해결해야될 문제가 있습니다. 용서하는 일입니다. 용서받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