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 다스리기(막 7:24-30) [사순절 시리즈]
  • 2013.02.26 17:37:36
  • 지난 주일은 사순절에 섬김의 삶을 살아보자 라는 요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로서 이번 사순절에는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 봅시다!’ 라는 요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부딪힘으로 발생합니다. 사람과의 부딪힘, 사물과의 부딪힘, 환경과의 부딪힘....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 동안 감정의 바다, 이 감정의 격랑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감정이란 것은 자신의 안경과도 같습니다. 모든 색깔을 있는 그대로 총천연색으로 볼 수 있는 감정은 좋은 감정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어릴 적부터 누적된 경험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는 어느 정도 자기 스스로 색깔을 칠해서 봅니다. 예를 들면, 과거 거절감에 휩싸인 경험이 충격이었던 사람은 조그마한 제스추어나 눈빛에도 거절감을 느껴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정욕의 상처가 온전히 치유되지 않은 경우에는 늘 그러한 압박감을 스스로 만들어 과잉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또한 어릴 때 대장 노릇을 하는 쾌감과 권력욕을 맛본 사람은 늘 그런 기질을 충족하려 합니다. 그래서 각 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평가해 볼 때 늘 긍정적인 사람, 늘 부정적인 사람, 늘 근심염려가 많은 사람, 늘 자부심이 배인 사람, 등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은 흔히 좋은 의미라기보다는 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발전되어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로 부터 비롯된 불신과 의혹,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시기심, 비교의식, 죽이고 싶은 감정, 라멕으로부터 시작된 자기감정을 마음대로 표출하여 기분 나쁘다고 그냥 사람을 죽이는 식의 모습... 이렇게 감정은 좋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진작부터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감정을 다스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감정도 죄의 소욕과 마찬가지로 다스림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의 감정을 잘 다스림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잠간 살펴보면.... 예수께서 두로 지역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조용히 지내시려 했는데 벌써 소문이 나버렸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한 여인이 당장에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했습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로'(시리아)와 '보니게'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보니게는 두로와 시돈지역인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보니게 공화국에서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여인은 이세벨입니다. 이 여인은 이 지역 왕의 딸로 북쪽 이스라엘 아합 왕에게 시집을 오며 이스라엘 왕국에 이 지역의 우상이었던 바알과 아스다롯을 도입했던 사악한 여인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지역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기대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사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믿음입니다.  이방인이 이 정도 나오면 예수님이 기뻐하면서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로, 이방인은 개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인이 개 취급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말입니까? 고쳐주기 싫으면 그만이지, 왜 '개'니 뭐니 하는 얘기를 하는 겁니까? 아주 모욕적인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인이 여기에 나오기까지 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주저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있는데서 "내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이방인을 개로 바라보는 유대인들  앞에 나가는 것은 죽기 보다 싫습니다. 자기를 낮추어 보고, 업수이여기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나왔는데 예수님의 대답이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여기서 틀어지게 마련입니다. 별 것 아닌 걸 가지고도 화를 내고, 오해를 하며 야단인데 이정도로 험한 소리를 들으면 끝난 거죠. 오늘날로 말하면 더 이상 교회 나오기 힘듭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을 만  하니까 이 여인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28절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참 대단한 응답입니다.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정했습니다. "주님이 맞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상아래 개들도 자녀들이 먹던 부스러기 정도는 먹을 수 있나이다. 주님이 유대인들을 알아주고, 저 같은 이방인을 개 취급하는 것 제가 뭐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저 같은 이방인에게도 주실만한 은혜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여인은 참으로 대범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 엄청난 모욕의 말에 부딪혔지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잘 다스렸습니다. 그 예수님의 엄청난 말을 단 한 마디 믿음의 말로 잠재워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여인에게 그렇게 모욕적인 언사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예수님이 왜 이런 말을 하셨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 수로보니게 여인이 보여준 그 대범한 마음, 상처 받지 않은 마음... 이 대범한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심리상태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여인은 자신의 영역에서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개 취급 받을 염려도 없고, 뭐 열등감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종교영역에 들어서면 문제가 생깁니다. 멸시를 받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니 얼마나 상처를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여인의 감정을 가장 민감하게 자극하는 것은 바로 이 유대인들을 접할 때요, 그들의 종교를 접할 때입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유대인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그가 예수님의 그 모독적인 언사를 잘 받아 넘긴 것은 참으로 대범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범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저는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 혹은 경외심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신의 운명을 쥐고 있다, 자신의 딸의 운명을 쥐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언사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레벨에서는 감정을 잘 드러냅니다. 상당히 기분 나빠 합니다. 그러나 나 보다 상당한 우위에 있는 존재로부터 어떤 말을 들으면 절대로 기분 나쁘게 와 닫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에 다니는 사원이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을 때 기분 나빠할 여유가 없습니다. 감정이 알아서 잠을 잡니다. 이 정도로 끝내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습니다. 이럴 때는 오히려 안도가 되고 마음에 치유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삶 속에서 느낍니다. 이럴 때에는 감정이 우리 밖으로 나올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가 집안에 어른이 있어도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참지요. 하물며 어떻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 속에 감추어 놓은 죄를 드러내는 것 같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도 상처가 많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별 것 아닌 말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신앙인은 좀 더 대범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상처가 많은 마음에는 은혜가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 자존심 상할 만한 예수님의 말씀에도 대범하게 반응하니 어둡고 캄캄한 환경이 단번에 빛나게 되었습니다. 딸을 괴롭히던 귀신도 물러가고 모든 상황이 축복으로 변했습니다. 우리 삶이 반드시 이 여인과 같지는 않지만 우리의 믿음의 한 마디, 그리고 격한 감정에 욱하며 판을 깰만한 것도 잠시 참고 마음을 잘 다스리면 놀라운 일들이 기적과 같이 우리의 삶을 채울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얼마든지 축복으로 우리 삶에 안기게 될 그 귀한 일들을 불신앙의 말, 격한 말, 그 알랑한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엉망진창으로 만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 귀신이 좋아하는 환경이 여러 가지입니다. 사탄은 사람의 감정을 잘 이용합니다. 그러니까 감정의 문제로 신앙이 엉망이 됩니다. 교회 안에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사실은 다 감정의 문제입니다. 특히 귀신은 절망적인 말, 부정적인 말, 후회, 한탄, 원한, 낙심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잘 활동합니다. 귀신은 희망이 없는 곳, 믿음 없는 곳에 역사 합니다. 여러분이 절망하고 있다... 귀신이 활동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희망에 가득차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일하시고 있는 증거입니다. 믿음의 말은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믿음의 말 한마디는 어두운 상황을 밝게 만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격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믿음의 말로 넘겨버리면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런 한 주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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