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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주님 앞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3장 14절부터 22절 말씀을 가지고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에서 끼니를 굶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도 미국입니다. 미국에서 결식자 가운데 약 2백만 명은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하고 지내는 날이 종종 있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 인구 가운데 약 1%가 이 풍요의 나라에서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1,100만 명이 굶고 있는 미국 땅에서 한 해에 무려 4,360만 톤의 식량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 현상을 묘사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고 있었던 1세기의 교회 가운데 한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서머나 교회와 정 반대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궁핍한 것 같으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고 말하지만 내가 볼 때에 너는 헐벗은 자이니라." 다시 말하면, 서머나 교회가 가난한 것 같으나 부요한 교회였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 같았지만 실상은 가난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본래 시리아 제국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시리아 제국의 안티오커스 2세의 아내의 이름이 라오디게아였는데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이 도시는 이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는 라오디게아 한 곳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 (14절)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모습입니다. 본문 14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4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여기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세 가지 단어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아멘, 충성된 분, 참되신 분인데 이 세 가지 단어를 함께 어우를 수 있는 하나의 단어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신실함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는 신실하지 못한 교인들이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를 향해서 신실하신 주님이 신실하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그 자체가 바로 이 교인들에게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왜 여기에서 주님이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셨을까요? 그것은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와 교인들은 새로운 창조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만일 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바르게 믿음으로 응답하기만 하면 창조의 능력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바르게 믿음으로 응답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모습으로 새롭게 창조될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바로 그분이 라오디게아 교회와 우리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2.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책망 (15~17절)
그렇다면 두 번째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살펴보겠습니다. 왜 칭찬을 이야기하지 않느냐고요? 칭찬할 것이 있어야지요. 이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을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 받지 못한 교회가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데 교회였고, 또 하나의 교회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열정의 상실입니다. 그들이 열정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자아 성찰능력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사는 열정을 상실하고, 거기에다가 자기 성찰의 능력조차 잃어버렸다면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 책망의 내용을 보십시오. 15절과 16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5~16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우리들은 이 셋 중에 하나입니다. 첫 번째 뜨겁다, 두 번째 차다, 세 번째는 미지근하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여기에서 뜨겁고 차다는 말은 좋고 나쁨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것도 필요하고, 차가운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님께서 거부하고 있는 것은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에서 약 7-9km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히에라볼리’(현재명: ‘파묵칼레’)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온천 도시로 유명하여 이 히에라볼리에서 라오디게아까지 수도관이 연결되어 뜨거운 온천수가 공급됩니다. 차가운 냉수는 ‘골로새’ 라는 도시로부터 공급 받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라오디게아는 가끔씩 식수문제가 생깁니다. 뜨거운 온천수가 7-9km 떨어진 라오디게아로 흘러오는 동안에 이 온천수는 미지근해집니다. 이 미지근해지는 과정에서 이물질 같은 것이 침전되면서 오염되고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때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물이 됩니다. 그리고 토해 버릴 수밖에 없는 물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당시의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상태가 이렇게 마실 수 없는 물, 사용할 수 없는 물, 토해 버릴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이렇게 된 원인은 그들 안에 있었던 영적인 교만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부자 도시에 살던 성도들도 상당히 부자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영적인 비참함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17절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당시에 세 가지로 유명했습니다. 첫째는 금융업입니다. 그래서 그 옛날도 이 도시에는 은행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돈이 많이 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유명한 것은 양모 산업이었습니다. 양들이 많았고, 그것으로 좋은 옷을 짜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 사람들은 그 당시 옛날이지만 패션을 즐겼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이 도시에서는 좋은 안약이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눈이 아픈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은 눈에 관한 한 건강한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랑을 하고 있었던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돈이 많고 부자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볼 때 너는 가난한 사람이야." 그리고 그들이 좋은 옷을 입고 패션을 자랑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볼 때 너는 지금 벌거벗고 다니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건강한 눈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볼 때 너희들은 눈이 멀었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어." 이것이 바로 그 당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형적으로는 가난함을, 벌거벗음을, 그리고 보지 못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주님 보시기에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헐벗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이 멀어버린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여러분은 어떨까요? 아니, 당신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권면 (18~19절)
이제 우리는 세 번째로 이런 상태 속에 있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금이 많은 사람에게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금은 물질의 황금이 아니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 그것은 어떤 시련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금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하십니다.
또한 너희들은 아름다운 옷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들이 정말 입어야 할 옷은 흰 옷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흰 옷은 깨끗한 거룩의 옷으로서 흰 옷을 입음으로 벌거벗음을 보이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옷입니다. 이 옷을 입지 않으면 천국에서도 쫓겨납니다. 또한 안약을 자랑하고 있는 그들에게 진짜 안약을 바르라고 하십니다. 단순한 화학적인 약품으로써의 안약이 아니라 성령의 통찰력을 말합니다. 성령의 통찰력으로 자신의 영적 실상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권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19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들이 다시 한 번 열심의 자리로 나아가 열정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뉘우쳐도 변화되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그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의 목표는 회복입니다.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그 자리에 설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회개를 위한 성찰의 기도입니다. 성찰의 기도문으로 좋은 말씀은 시편 139편 23절과 24절 말씀입니다. (시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이 말씀은 ‘나를 살펴주십시오’, ‘나를 시험해 보아주십시오’, ‘나를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이는 자기 성찰만이 나를 진정한 회개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여러분과 제가 다시 쓰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기에 합당한 교회로 서는 것입니다. 자 찬양 하나 합시다.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2)
하나니-임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니-임 나의 마음 새롭게 하소서
둘째로,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주님과 나 사이에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내가 서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서 떠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나와 주님 사이에 친밀한 교제를 회복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 붙들려 사는 쓰임 받는 인생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와 주님 사이가 언제나 친밀한 관계 속에 있다고 확신하지 마십시오. 어느 날 보니까 나와 주님 사이가 멀어져 버릴 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지붕 아래에 부부가 살고 있다고 해서 그 부부의 관계가 반드시 건강하다고 장담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지붕 아래에 부부가 살면서도 남남처럼 살아가는 부부가 적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애정이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한 지붕 아래에 산다고 해서 저절로 애정이 자라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애정을 관리해야만 합니다. 이것처럼 신앙의 영역에서도 내가 교회에 출입하고 있지만 나와 주님 사이의 관계가 저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부의 애정도 관리되어야 하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교제도 관리되어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느 날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종종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미 예수를 믿고 있었던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믿는 성도들도 주님을 내 마음 문 바깥에 세워놓고 주님과 나 사이에 만남이 없는 삶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삶을 살 때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금도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부터 친밀함을 유지하도록 항상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네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슨 까닭으로 이런 권면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 라는 여인의 집에서 가정교회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골로새서 4장 1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골4:12)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 너희에게서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여기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 라는 여인의 집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모이면 더 친밀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 라는 여인의 집에서 시작하면서 이 집에 모여 그들의 모든 삶의 아주 세밀한 이야기들까지 같이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서로 돌보며 사랑하고 기쁨으로 교제하는 끈끈한 교제로 이 교회는 시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회가 커져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주님과 성도들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덩치는 커졌지만 어느 날 보니까 주님이 쓰실 수 없는 쓸모없는 공동체로 변질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교회도 지금은 친밀함이 넘치는 가정과 같은 교회이지만 성장하면서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예배 시간에만 의존하는 교회로 계속 간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비극이 오늘 우리 교회의 비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나누는 모임을 별도로 가져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QT로, 교회에서는 구역모임으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주님의 위로와 만지심을 통해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그곳에서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주님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실 때 거기에서 진정한 부흥이 일어납니다. 우리 항도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뛰어넘는 서머나 같은 교회, 빌라델비아 같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 때문에 책망만 받았습니다. 게다가 권면받기를 부자라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곤고한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불로 연단한 금과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까지 사서 눈에 바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열심을 내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주님과 나 사이의 친밀한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복이 주어진다고 하셨나요? 21절과 22절을 보십시오. (21~22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는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으로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음으로 왕적인 지위를 누리시는 것처럼 승리자에게도 그와 동일하게 권세를 허락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적인 통치를 공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약속을 믿고 지키면 이런 권세를 부여받게 되어 놀라운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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